하늘재가 불타고 있는 것은

                                                   차옥혜

노령산맥 줄기 병풍 같은 산 중턱
하늘재가 소리 없이 안으로 불타고 있는 것은
가을 탓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도에 없는 거의 사라진 마을이지만
인심 좋아 물이 좋아
120여 가구 모여 살던 마을이다.
하루아침에 생각 하나로
이웃끼리 형제끼리 적이 되던 미친 시절
사람이 반가워서
사람이 가여워서
밥 주고 재워준 게 죄가 되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과녁이 되었다.
그래도 20여 가구는 남았는데
과부들은 두세 번씩 시집가고
한 사람 두 사람 바람 따라 길 따라 흩어져
지금은 네 집만 남았다.
그중 두 집은 빈집이고
두 집은 산닭을 길러
내장사나 담양호로 가는 관광객이나
운치 좋은 곳에서 식사하려는 도시인에게
도리탕이나 백숙을 팔고 있다.
그나마 그들도 아이들 때문에
도시로 나갈 꿈을 꾸고 있다.
몇십 년 꼭꼭 숨겼던 이야기
어쩌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조금 들려주는데
통일이 되면 이 나라 능선마다 계곡마다
어떤 십자가들 튀어나올까.
하늘재가 소리 없이 안으로 불타고 있는 것은
가을 탓이 아니었다.

                                   <기독교사상,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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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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