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의 열반

시 -5 2026. 10. 31. 17:29

낙엽의 열반

                                       차옥혜

겨울 숲길을 걸어가니
밟히고 밟혀 더 이상 부서질 것 없는 낙엽이
부드럽고 포근하게 내 발을 받쳐 준다.

낙엽은 으깨지고 으깨져야만
찢기고 찢겨야만
제 고향으로 제 뿌리에게로 가는가
제게로 돌아가는 길이
그렇게도 힘이 드는가

발을 옮길 때마다 낙엽이 밟힌다.
낙엽은 이미 오래전
바스락 소리도 잊고 아픔도 잊은 듯
평화롭기만 하다.

고요하고 고요한 낙엽들이
스며들고 있구나
저만치 오고 있는 봄 속으로

                                                         (PEN문학 2005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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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그림자

시 -5 2026. 8. 8. 09:23

나무와 그림자

                                         차옥혜

나무는
해바라기이면서도
평생 해를 등지고 있는
제 그림자가 아프다

나무는
제 발 밑에서만 서성이며
끝내 말 한 마디 못 하는
제 그림자가 안타깝다

나무는
한 번도 일어서지 못 하고
꽃 한 번 못 피우고
땅에 납작 엎디어 사는
제 그림자가 안쓰럽다

나무는
어둠뿐인 제 그림자가
종내는 제 모습 같아 서럽다

                                          (시와산문, 2011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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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탄 집에 소 떼 돌아오다

                                                                         차옥혜

집 뒷산에 불이 났으니
빨리 마을회관으로 피하라는
이장의 전화 자다가 받고
허둥지둥 집 나서던 노부부가
외양간 문 열어주며 소들에게

“어서 나가 여기 있으면 죽어.”

외치니 소들이 우르르 어둠 속으로 사라지다

아침에 집에 돌아온 노부부는
주택, 살림살이, 농기구, 외양간 몽땅 숯덩이가 된 집터에
어미 소 열네 마리와 송아지 여섯 마리
불에 그을린 소도 있지만
한 마리도 빠짐없이 스무 마리 소가
고스란히 돌아와 있는 모습 보며 눈물 펑펑 쏟다

공포에 집 나간 소들은
처음 보는 불난 세상 어떻게 피해 모두 살아왔을까?
뛰며 각자도생하지 않고 어떻게 함께 불길을 헤치며
노부부와 외양간 그리며 돌아왔을까?

자기들만의 말과 몸짓으로
그들만의 믿음 신뢰 지혜 사랑으로
서로서로 격려하고 부축하며 응원하며
불타는 산길을 헤쳐 돌아온 소들!
우러르고 우러른다

                                                (한국시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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