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재가 불타고 있는 것은

                                                   차옥혜

노령산맥 줄기 병풍 같은 산 중턱
하늘재가 소리 없이 안으로 불타고 있는 것은
가을 탓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도에 없는 거의 사라진 마을이지만
인심 좋아 물이 좋아
120여 가구 모여 살던 마을이다.
하루아침에 생각 하나로
이웃끼리 형제끼리 적이 되던 미친 시절
사람이 반가워서
사람이 가여워서
밥 주고 재워준 게 죄가 되어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보이는 대로 과녁이 되었다.
그래도 20여 가구는 남았는데
과부들은 두세 번씩 시집가고
한 사람 두 사람 바람 따라 길 따라 흩어져
지금은 네 집만 남았다.
그중 두 집은 빈집이고
두 집은 산닭을 길러
내장사나 담양호로 가는 관광객이나
운치 좋은 곳에서 식사하려는 도시인에게
도리탕이나 백숙을 팔고 있다.
그나마 그들도 아이들 때문에
도시로 나갈 꿈을 꾸고 있다.
몇십 년 꼭꼭 숨겼던 이야기
어쩌다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조금 들려주는데
통일이 되면 이 나라 능선마다 계곡마다
어떤 십자가들 튀어나올까.
하늘재가 소리 없이 안으로 불타고 있는 것은
가을 탓이 아니었다.

                                   <기독교사상,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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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5 2025. 4. 20. 19:34

                                              차옥혜

1854년 초 시애틀 지역
수쿼미시 부족 추장이
원주민 땅을 수용하려는
미국 연방정부 협상단에게

“어떻게 하늘을 사고 팔 수 있으며
대지의 온기나 영양의 신속함을
사고 팔 수 있다는 말인가…
공기의 신선함과 물의 반짝임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
마지막 원주민이 이 땅에서 사라지고
그에 대한 기억이 백인들 사이에서
신화가 될 때도
이곳 바닷가는
한때 이곳에 살았고
아름다운 이 땅을 여전히 사랑하는
영혼들이 모여들 것이다”

라고 했다는 말이
자꾸만 나를 치며 아프게 한다

 

                                                                        (한국현대시, 2019하반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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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뿌리 4

시 -5 2025. 3. 22. 15:31

연뿌리 4

                                                      차옥혜

줄기, 잎, 꽃, 연밥은
겨울을 건너지 못하지만
나는 순조롭게 건너 해마다
새 줄기, 잎, 꽃, 연밥을 낳아
봄, 여름, 가을을 아름답게 수놓습니다
감옥인 줄 안 진흙구덩이와 연못이
오히려 나를 지키고 보호하는
나를 먹이고 기르며 살리는
신의 품입니다
눈이 내리고 연못이 꽁꽁 얼어도
나는 멀쩡하게 편히 누워
새 봄을 준비합니다
투박하고 못 생긴 나를
언제나 꼭 껴안아주는
진구렁은
아무리 가물어도
나를 목마르지 않게
흠뻑 적셔주는
연못은
사랑이고 축복입니다

은혜의 순환 없이
어찌 세상이고 생명이겠습니까
어느 날 사람의 몸을 지날 때
연꽃등을 켜 어둠을 거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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