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야 발바닥을 들여다보다
차옥혜
막 출판한 열세 번째 시집 『말의 순례자』를 친지들에게 보내는 작업을 마치고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직 바람은 차지만 햇볕은 따스하고 언뜻언뜻 개울가에 줄지어 선 수양버들 줄기에 연두 빛이 얼비치는 듯했다. 윤슬이 반짝이는 냇물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 물닭, 원앙새와 먹이를 노리고 서 있는 백로, 그리고 길가 누런 풀밭에서 풀씨를 쪼는 비둘기와 까치가 나에게 생동감을 안겨주었다. 봄이 가까이 오고 있는 풍경에 빠져 나는 이른 봄꽃이 되었다. 그때 굵은 모래가 들어간 듯 오른쪽 발바닥이 따끔거렸다. 운동화를 벗어 털어냈다. 다시 걸으니 또 불편했지만 견디며 1시간 넘게 바람을 쏘이다 집으로 돌아왔다. 평소 발이 조금 아픈 것 정도는 늘 이렇게 무시하고 살았다.
밤에 두어 시간 자다 오른쪽 뒤 허벅지에 통증이 느껴져 깨었다. 진통제를 먹고 곧 낫겠지 하며 기다리다 주말이라 병원 갈 시간을 놓쳤다. 점점 더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신음했다. 정확한 증세를 알기 위해 진통제를 중단했다. 걸으면 좀 통증이 덜한 것 같아 걸으니 발바닥에 가시가 있는 것 같아 양말을 뒤집어보고 실내화를 들여다보았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이 되어 척추 신경에서 오는 통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이름난 척추 전문 병원을 찾아갔다. 관절센터와 척추센터에서 각각 엑스레이를 촬영한 후 허리와 다리를 살펴본 두 의사 선생님은 이상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사 선생님들은 명절 연휴가 끼었으니 우선 7일 동안 진통소염제와 신경통 약을 먹어보고 낫지 않으면 정밀검사를 하자고 했다. 약을 먹어도 별 차도가 없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다 다시 병원 가기로 한 전날 우연히 발바닥을 만져 보니 우둘투둘 한 게 손끝에 느껴졌다. 그제야 발바닥을 들여다보니 불그레한 발진들이 돋아 있었다. 10년 전 대상포진을 석 달 앓았고 그 후 대상포진 예방주사도 맞았는데 또 대상포진일까? 이번에는 피부과 병원을 찾았는데 대상포진이라 했다. 막상 피부과에 갈 때는 통증도 많이 가라앉아 있었다. 7일 동안 대상포진 약 먹고 발진에 세균 감염 막는 연고를 바르니 완전히 통증이 사라졌다. 의사 선생님은 예방 백신을 맞아서 비교적 빨리 나은 거라고 했다.
왜 나는 가장 먼저 아프다는 신호를 보낸 발바닥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사코 허벅지와 장단지만 부여잡고 끙끙대었을까. 평생 대접 못 받고 제일 밑바닥에서 아파도 걸으라면 걷고 변함없이 나를 떠받친 발바닥! 나는 너무 늦게야 들여다본 발바닥에게 미안하다고 거듭 사과하다가 문득 사람살이를 떠받치고 있는 이 세상 발바닥을 돌아본다. 눌려 아파도 힘들어도 숨죽여 일하며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고마운 사람들을 생각한다.
코로나19 감염병 대유행이 일 년을 넘게 세계를 휩쓸고 있는 이때, 내가 오늘도 무사히 존재할 수 있음은 불철주야 헌신적으로 일하는 관계 공무원들과 의료진들 덕분이다. 어떤 간호사님은 코로나19 중환자실에 근무하면서 일 년 넘도록 세 명의 어린 자녀들을 보지 못했다고 눈물짓지 않던가! 또 무수한 택배 노동자들이 내 집 앞까지 먹거리를 가져다주어 내가 안전하게 살아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폭주하는 택배 물량 때문에 과로로 여러 명의 택배 노동자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지난겨울 엄동설한에는,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 태안화력발전소에서 2년 전 한밤중 혼자 낙탄 작업을 하다 기계에 빨려들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노동자 김용균의 어머니가, 더 그렇게 세상 자식들을 죽게 할 수 없다고 국회 본관 앞 길바닥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제정하라”고 근 한 달 동안 단식농성을 했다. 그는 안전장치 없이 일 시키는 사업주에 대한 명확한 처벌 규정 없이는 매년 산업현장에서 2,400여 명이 죽고 10만여 명이 부상하는 행렬을 멈추게 할 수 없다고 절규했다.
이 나라에서 멀쩡하게 일하다가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사람이 매일 7명씩이나 되다니! 작업 발판, 안전난간, 추락방지망이 없는 일터에서 사람 꽃들이 일하다가 떨어져, 끼여, 부딪혀, 깔려, 무너져 죽다니! 위험작업에 ‘2인 1조’ 규칙 안 지킨 회사 때문에 혼자 일하다가 죽다니! 사람 목숨보다 방호 장비 비용이 더 중요하다는 것인가?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이고 7대 수출 강국이며 케이팝, 케이방역 등으로 국제적 위상이 높은 나라 대한민국에 걸맞게 이제는 사람들이 누구나 안전한 일텨에서 일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희망을 품으며 살 수 있도록 제도와 관행이 뒷받침하여야 하겠다.
너무 늦게 이제야 내 발바닥과 세상 발바닥을 들여다본다.
<리더스에세이, 2021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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