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글방은 경계 없는 세상이다
차옥혜
내가 글방을 갖게 된 것은 나이 서른아홉이 되어서다. 6ㆍ25 전쟁 후 초등학교 시절엔 책상도 없이 가족들이 함께 쓰는 단칸방 한구석 바닥이나 툇마루에 엎드리거나 앉아 책을 읽고 숙제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언니, 동생과 함께 쓰는 방에 조그만 책상 하나가 나에게 할당되었다. 우리 집엔 따로 글방은 없었지만 안방이나 마루 식당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빈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책으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자아를 확장하고 세계를 구축해온 탓에 아버지의 전공인 법학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책과 명상집이 많았다. 게다가 바로 위 언니가 독서광이어서 동화, 위인전, 만화, 소설책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집 전체가 살림집이면서도 글방인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책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가난했지만 책을 많이 가지고 많이 읽은 것에 자부심을 지녔다. 이런 탓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저절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쓴 글을 상자나 대바구니에 넣어 보관하고 이사할 때 마다 보물처럼 끌고 다녔다. 지금도 중학교 때 신문에 발표한 단편과 수필, 그리고 원고지에 쓴 글들을 묶어 “꽃봉오리”라는 제목을 붙여 내 손으로 만든, 조잡하지만 단 한 권짜리 최초 문집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자취방에 나만의 책상과 책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전업주부가 된 후에도 학자인 남편의 서재 한구석이나 거실이나 안방 빈 곳에 내 책을 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엔 안방이나 식탁이나 거실 탁자나 방바닥을 전전했다. 아이들은 취학하면서 공부방을 주었지만 나까지 글방을 차릴 여유는 없었다. 드디어 29년 전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아파트 부엌 옆 한 평 쯤 되는 골방에 책상과 작은 책꽂이를 간신이 넣은 내 글방을 처음 갖게 되었다. 비로소 내가 사람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20년 전 쯤 조금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내 글방은 조금 더 넓어졌고 남편이 직장에 갔을 때만 이용하던 남편의 컴퓨터 대신 내 책상에도 나만의 컴퓨터가 생겼다.
책은 자꾸자꾸 불어나 둘 데가 없어 도서관이나 문학관 등에 수시로 기증하고 문예지들은 내 작품이 실린 책들만 보관하고 자료가 될 만 한 것은 복사하여 바인더에 넣어두었다.
한편 집안에 글방을 갖게 된지 몇 년이 지난 때부터 자연과 흙이 강렬하게 나를 부르는 바람에 농촌 황토밭에서 나무와 밭작물을 기르는 일도 병행하게 되었다. 이 일은 나에겐 식물 글자로 땅에 시를 쓰는 행위와 같아서 황토밭은 내 자연글방이 되었다. 자연글방에서 얻은 영감으로 종이에 쓴 시를 집안 글방 컴퓨터에 옮겨 정리한다. 아마도 내가 시인이기 때문에 두 개의 글방을 왕래하며 사색하고 시를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연글방이나 집글방 책상 앞에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정한 나의 글방은 자연글방과 집글방을 포함한 경계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한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지하철에서, 여행 중에, 몇 권의 대하소설을 읽다가 혹은 신문을 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꿈꾸다가 불현듯 시를 만난다. 세상을 떠돌다 어느 순간 나와 세상과 우주가 통합될 때, 혹은 어느 사물이나 현상에 부딪쳐 내 영혼이 불꽃을 낼 때 시가 온다. 그래서 늘 가방 속에 수첩이나 종이를 가지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바로 적어놓지 않으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세상글방에서 쓴 시를 집글방에서 읽고 또 읽으며 완성한다.
좋은 시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경계 없는 내 광활한 글방인 세상에서 온몸과 마음으로 일하고 서성이며 헤매고 바라보며 읽고 명상하며 쓰고 또 쓴다.
<『문학의 집ㆍ서울』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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