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담바라 시인
- 김규화 선생님께 -
선생님! 그 많은 문우들 가운데 제게 편지를 주시다니요! 선생님의 편지는 제게 오헨리의 ‘마지막 잎새’가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식물들의 어머니 시인’이라고 호명하시고, 제가 그렇게 시를 쓰기도 했지만, 오히려 나무와 풀이 저를 키우고 이 세상 진실을 보여주며 시를 쓰게 한 어머니고 스승이 아니었나 하는 마음이 들어 한없이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 제가 선생님의 해바라기인 것은, 선생님의 끝 모를 순수함, 세계에 대한 예리한 통찰의 힘, 철학적인 시의 향기, 남을 배려하는 따뜻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어느 문학 세미나 저녁 식사 후 산자락 산책 도중 달맞이꽃을 보시고는, 선생님께서 젊은 날 어느 산사 숲길에서 한밤중 달맞이꽃이 펑펑 터지는 것을 보셨다는 말씀에 연유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저는 우담바라가 떠올랐습니다. 불가에서 천년에 한 번 핀다는 상상의 꽃 말입니다. 얼마나 긴 밤을 지새며 달맞이꽃 무리를 바라보셨기에, 사바세계의 번뇌에 남몰래 흘린 눈물이 많았기에, 달맞이꽃들이 무더기로 꽃문을 여는 것을 보셨겠습니까? 저는 틈만 나면 식물들과 오랫동안 몸 부비며 살았어도 아직 꽃 한 송이도 막 첫눈 뜨는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 달맞이꽃 무리의 꽃빛을 타고 무의식 상태에서 이르렀을지도 모를, 불교의 무심(無心)의 경지에서 쓴 선생님의 시 「지나가기」 전문을 봅니다.
왔다가 가는 데는 걸림이 없기 / 그림자 가리다가 / 가는 것같이 / 미풍이 살랑이다 그친 것같이 / 기대란 철없다, 열정은 쉽게 탄다 / 시냇물이 냇가의 포플러나무 / 내려보는 것에 흐르듯 / 그렇게 보고 지나가기 / 참으로, 약속은 않는 준비를 하자 / 동구 밖 나무가 마을 바라보듯이 / 나뭇가지 새로 바람 지나가듯이 / 물이 되어 물과 섞어지게 하고 / 영원 속의 영원이 되어 / 참으로, 약속은 않는 준비를 하자 / 해를 가리고 지나는 구름같이 / 모양이 없는 몸속의 마음같이 / 그냥 내쉬는 숨같이 / 왔다가 가는 데는 걸림이 없기
선생님은 나무, 냇물, 바람, 구름처럼 그냥 무심히 이 세상을 지나서 영원 속의 영원이 되고 싶어 하십니다. 선생님 빛의 근원을 봅니다.
제 황토밭에 오신 많은 분은 저보고 당장 그만두라고 사람이 두 번 사는 것도 아닌데 왜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걱정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제 밭 푸른 잎들의 파도를 지나 건너편 산자락 은초록 빛으로 반짝이는 미루나무를 한참 바라보시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이대로 살아요.” 말씀하시며 제 작고 거칠며 주름진 미운 손을 들여다보며 쓰다듬어주셨습니다. 그 후로 저를 만나면 아무 말씀 안하시고 제 손을 들여다보십니다. 그 때마다 저는 선생님의 소리 없는 말씀을 듣습니다.
선생님은 불편하고 고생스러워도 견디시며 갈 길은 가시는 분입니다. 선생님은 1978년 이래 지금까지 『시문학』을 한 달도 거르지 않고 발간해 오셨습니다. 이 나라 시밭을 갈아 시꽃을 피우고 계십니다. 많은 문예지가 계간, 반 년간, 연간으로 돌아섰는데 「시문학」이 여전히 월간인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지요. 선생님은 『시문학』을 지키는 일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는 심정과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보셨다고 하셨습니다. 게다가 청렴하게 잡지를 운영하십니다. 문예지들이 구독신청을 강요하고 후원금을 종용하는 일이 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런 말씀은 하실 줄 모릅니다. 현대시인협회 사화집을 출판하고 시인들이 하는 일에 이익을 낼 수 없다고 원가를 제외한 나머지 금액을 돌려주셨다는 회계보고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문예지가 문인들에겐 하나의 정부이기도 한데 전혀 권력을 행사하지 않고 문인들에게 고스란히 나누어주십니다. 제가 세 번이나 『시문학』에서 시집을 내면서 이 세상에 계산할 줄 모르는 분이 산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시문학』 운영경비를 선생님의 봉사와 헌신으로 절약하고 감내하십니다. 어느 겨울 제가 시집 초교를 들고 시문학사에 들르니 난방이 안 되는 사무실에서 선생님은 팔목이 부러져 깁스를 한 아픈 손으로 일하고 계셨습니다. 인쇄소도 일일이 직접 다니십니다. 선생님은 맡은 일에 책임감이 강하시고 최선을 다하십니다. 보통 다른 출판사에선 제가 편집한대로 시집을 내는데 선생님은 시집 표제를 제가 ‘꽃보다 눈부신 사람’으로 한 것을 ‘허공에서 싹트다’로 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시 몇 편 순서를 바꾸는 것과 시집 표지 디자인에 대해서도 의논하셨습니다. 선생님의 신선하고 탁월한 예술적 안목에 고개를 숙였습니다. 음악과 미술에도 조예가 깊으신 것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매달 『시문학』을 발간하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시를 발표하셨지요. 그런데 최근 기존의 시와 전혀 다른 하이퍼시를 쓰시면서 이렇게 설명하셨지요.
“변화하는 시대에 새로운 시를 탐구하고 싶었다. 늘 쓰는 시의 주체를 ‘나’에게서 객체인 ‘사물’로, 주체의 감정 혹은 정서보다는 사물의 본질 (과학적 입장이 아님)을 규명하는 쪽으로, 변화 많고 다양한 구성 쪽으로. 또한, 현실생활의 절반을 차지하는 컴퓨터 화면의 세계(하이퍼 〈저너머〉의 세계)로 나의 시선을 돌려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는 가상세계를 만들며 일상에서 쓰는 언어의 의미를 가급적 배제했다. 의미를 털어버리려니 자연히 음성 언어 쪽으로 치우쳤다.”
선생님의 소리 이미지에 중점을 둔 하이퍼시 「매미소리」를 읽어봅니다.
역사박물관에서 <미륵> 강의를 듣고 나오는데 / 마당가 미루나무숲의 매미들이 한꺼번에 / 미륵 미륵 미륵, 미르 미르 미르 르르르 / 소리를 흘린다 // 염소에게서 배웠나, 매해해 얌얌 염소 / 입을 뾰죽이 내밀어 / 매매매 하는 그그그 미 / 매 하는 미, 매미이이이를 // 플랫폼에 혼자 두고 기차가 / 소리 한 번 매앵! 지르고 바퀴를 자글자글 굴리며 떠난다 // … (생략) …
이 시를 어느 시인은 하이퍼시의 전형이라 말하며 “탈관념의 사물과 상상 이미지의 두 단위의 초월 관계를 연결하여 완성된 시”라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시의 달인이십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을 바라보는 것처럼 선생님의 하이퍼시는 독자에게 예술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사고의 폭을 넓혀주며 호기심과 재미를 줍니다.
이제 선생님의 시는 세계로 날아가 둥지를 틀었습니다. 3년 전엔 미국에서 영역시집이 출간되었고 작년 말엔 프랑스에서 불역시집이 출간되어 현지인들에게서 호평을 받고 있습니다. 프랑스 평론가 마리안느 B가 선생님 시집에 대한 평론에서 “이 시집을 통해 나는 행복을 만난 것 같다. 시작품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의미를 발견하고 공감하였으며, 재능 넘치고 명망 높은 여 시인 뒤에 숨은 영혼이 나를 한층 더 감동으로 몰아갔다.”는 구절을 읽고 참 기뻤습니다.
우담바라 김규화 선생님! 이 나라와 세계 문학에서 만년 그대로 아름다우소서.
저는 선생님의 편지에 힘입어 성장하는 시인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차옥혜 올림
<『문학의집ㆍ서울』 2014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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