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촉의 난과 별의 철학 

                  - 시인 이경희 선생님께 -

 

  선생님! 그토록 춥고 눈도 많이 오던 겨울은 가고 봄이 왔습니다.

  시방 저희 집엔 겨우내 꽃대를 다섯 개나 밀어 올리던 동양난이 한꺼번에 꽃을 피워 선생님을 생각나게 합니다. 아마도 지금 편찮으신 선생님의 가슴에도 화사한 햇빛이 비쳐 무더기로 핀 난 꽃이 천리 밖까지 향기를 뿜고 있겠지요. 아니 선생님은 봄뿐만 아니라 사시사철 꽃을 피우는 한 촉의 난이시지요.

     죽어/ 한 촉의/ 난으로 솟아// 목마르되/ 티 내지 않는/ 윤기// 고운 태/ 뻐기지 않는/ 곧 곧함// 가녀린 살결/ 속의 속/ 모세혈관 속까지/ 스며 있는 향기// 풍진 세상/ 버팅기는// 죽어/ 한 촉의/ 난으로 솟아 

  선생님의 시 <한 촉의 난처럼>은 죽어서 난으로 환생하고 싶은 선생님의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를 처음 읽는 순간 바로 선생님의 자화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986년 선생님을 처음 뵈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티 내지 않는 윤기, 고운 태 뻐기지 않는 곧곧함, 모세혈관까지 스며 있는 향기, 풍진 세상 버팅기는” 선생님은 한결같이 한 촉의 난이십니다. 그리고 발산하는 내면의 빛으로 선생님의 모습은 제겐 살아 움직이는 한 편의 시로 보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빛나는 시 <별의 철학>을 책상 위에 놓고 보며, 날카로운 저를 갈아 선생님처럼 관용으로 세상을 끌어안으려 수양하고 있습니다. 

어둠이 있어/ 반짝이는/ 너의 존재//  하면/ 반짝임은/ 어둠을 품고/ 있음일게 그려.

  삶을 다 알아버린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시! 짧지만 대하소설 몇 권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 선생님! 얼마나 많은 슬픔과 고통을 견디고 이겨 별이 어둠을 품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까?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하는 삶의 비의를, 모든 생명이 탄생과 죽음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 품고 있는 엄연한 진실을 어떻게 이처럼 간결한 두 연의 시로 선명하게 보여주시는지요. 그래서 선생님은 세상 어둠을 어루만지고 품어 별이 되셨는지요. 선생님의 포용력과 중용정신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를 잘 알겠습니다.

  선생님의 시엔 미술과 음악이 함께 있지요.

  몇 년 전 문학의집ㆍ서울에서 선생님께서 평생 동안 관람하시고 모아두신 많은 미술전시회 팸플릿들과 카탈로그들을 전시한 일이 있으셨지요. 1950년대 초의 것들도 있어 이미 여학교 시절부터 예술을 사랑하는 문화인이셨던 것에 놀랐답니다. 그 소장품은 전시회를 마치고 김달진 박물관에 기증하여 한국 미술사와 미술 애호가들에게 유익한 자료가 되고 있다지요.

  선생님의 <길>이라는 시엔 “사시(四時)를 노오란/ 반센트 반 고흐의 길/ 길은 서강으로 뚫려있다”라는 시구가 있지요.

  절대성을 동경하고 순수에 집착하던 선생님의 초기 시집 『분수』에 나온 <분수> 연작시들은 음악에도 얼마나 조예가 깊으신지를 보여줍니다.

  선생님께서는 60년대 초 안익태 선생님의 주선으로 열린 국제음악제에 거의 빠지지 않고 가셨다지요. 그 때 ‘앙드레 나바라’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첼리스트의 연주에 심취하여 둔탁한 목기의 첼로는 첼리스트의 품에 안겨 어느새 사랑의 여신으로 변해 있는 것을 느끼셨다 하셨습니다. 그리곤 이내 선생님이 첼리스트가 되고 첼로가 되어있는 시적 체험을 하면서 분수 연작을 쓰셨는데 그 중 한 편이 이렇지요. 


난 첼리스트// 다칠세라 당신을,/ 금이 갈세라,/ 가만히 포옹하면/ 매지근한 체온에/ 튀는
스타카토/ 내 어깨에 기대인/ 당신의 머리카락은 바닷물결,/ 차츰/ 잠기우는 몸을 안고/ 흔드는 파도의 요람// 내 기인 손가락은/ 당신의 허리에서 내려가는/ 엉뚱한 애무처럼// 몸 저리는 연소에 타는/ 소나기, 소나기 소린/ 내 그이의 분수.
 


  선생님은 시 <사부송(思父頌)>에서 “모오짜르트의 음악에서 들리는/ 당신의 구두징 소리”, “모오짜르트의 음악에서 울리는/ 낭랑한 당신의 소리”라고 읊으십니다. 모오짜르트의 음악에서 아버지의 구두징 소리와 목소리를 들으시네요.

  미술과 음악이 함께 있는 선생님의 시문학은 광활하고 깊고 높아서 저에겐 무척 경이롭고 아름다운 세계입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뵌지 벌써 2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한동안 선생님께서 아프신 줄도 몰랐습니다. 한동안 사무실로 연락이 안 되어 어느 날 댁으로 전화를 드렸을 때 좀 일이 있어 집에 있는데 곧 나갈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몇 달이 지나도 선생님께서 사무실에 나오시지 않아, 이상한 마음이 들어 댁으로 전화를 드려 “선생님 아프신거지요?” 하고 거듭 여쭈니 그제야 좀 아팠는데 다 나아가는 중이니 나가면 만나자고 가볍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 년이 지났습니다. 뒤늦게야 우연히 다른 분을 통하여 혼잡한 곳에서 급히 마주 오는 건장한 남자와 부딪힌 사고로 골절 수술을 하고 병원에 계시다 댁에서 요양 중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선생님께선 부딪친 사람에게 일체 내색도 연락도 안하셨다지요. 조그만 실수에도 책임을 묻고 권리를 주장하는 세상에서 어떻게 그렇게 초연하실 수 있으신지요. 제 정당성만을 내세우며 살아온 저는 인간에 대한 배려가 무엇인지를 선생님에게서 배우며 부끄러워집니다. 선생님은 조금도 남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하시고 어떤 아픔도 혼자 인내하시며 조용히 견디시는 성품이셔서 혹 불편을 드릴까 봐 병문안도 못 갔습니다. 그래도 오늘은 자꾸만 죄송한 생각이 들어 난 꽃의 향기를 맡으며 선생님의 시집과 수필집을 다시 읽으며 선생님의 쾌유를 기도합니다.

  선생님께서 투병 중에 발표하신 시 <흐르는 물이듯>을 암송해 봅니다. 

초에/ 어느 골 골 흘러 흘러/ 여기에 이르렀을까/ 때로/ 어둡고 거치른 바위 틈새/ 따스하고 매끈한/ 조약돌 사이/ 몸 오므려 펴기를/ 터득하는 지혜로/ 홀연 해살 쏟아지는 하늘벌에/ 팔 벌려 수줍음 껴안고/ 어느 깊은 숲속/ 잠시 머물며/ 생명을 잉태하는 충만/ 다시/태초에 몸 맡기고/ 어느 골골 낮게 낮게/ 흐르는 물이듯 

  선생님께서는 “태초에 어느 골골을 흘러 흘러 여기”까지 온 선생님의 생애를 “다시 태초에 몸 맡기고 어느 골골 낮게 낮게 흐르는 물이듯” 가고 계십니다. 시에서 저는 선생님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봅니다. 이런 선생님의 모습이 아름다우면서도 아픕니다.

  선생님! 어서 건강을 회복하여 한국현대문학관이나 「문학의 집ㆍ서울」에서 일하시는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다시 음악회와 미술전람회에도 가시고 연극도 보러 가소서. 저와 함께 은행나무 고목이 굽어보는 풀향기에서 좋아하시는 들깨 국수와 두부말이를 드실 날을 설레며 기다리겠습니다.

  선생님의 난 꽃 향기, 시의 향기 영원하소서.

                                                   
                                          2010년 초봄     
 
                                                  차옥혜 올림

 

 <『문학의집ㆍ서울』 2010년 4월호>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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