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옥 선생님 수기『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를 읽고

       - 가을 들녘에서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노래를 들으며 -

 

  선생님! 가을걷이가 한창인 들녘에서 토란을 추수합니다. 지난여름 무서운 폭우에도 금시 빗물을 흘려버리고 싱싱한 마른 얼굴로 하늘을 마주보던 큰 잎을 꼿꼿이 받쳐주고, 스스로 독을 뿜어 어떤 병충도 막아내 주렁주렁 탐스럽고 굵직한 알뿌리를 땅속에 키운, 토란 대를 잘라 껍질을 벗겨내고 얇게 썰어 가을볕에 널어 말리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들녘을 바라봅니다. 알곡과 뿌리와 잎과 알뿌리와 열매, 생명을 해산하고 누워있는 산모들! 껍질들! 쭉정이들! 누런 콩대, 깻대, 호박 줄기, 도라지 꽃대, 더덕줄기, 토란대 껍질 ……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합창 소리가 들립니다. 보랏빛 벌개미취 꽃이, 흰 참취 꽃이, 늦봄부터 서리 내릴 때까지 피고 지는 알록달록 백일홍이, 아직도 피어있는 능소화가, 과꽃이, 국화가, 맨드라미가, 노랗게 익어가고 있는 벼들이 껍질들과 쭉정이들의 합창에 몸을 흔들어대며 끼어듭니다.

  합창은 소멸을 슬퍼하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의 영속을, 영원을 위해 생명을 낳고 생명의 대지로 우주로 귀향하는 승리자의 승리의 노래이고 환희의 노래입니다. 분명 소리는 없지만 마음과 영혼으로 듣는 합창입니다.

  이 위대하고 아름다운 껍질들과 쭉정이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가슴 벅찬 합창을 들으면서, 저는 선생님과 최근 출판하신 선생님의 수기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를 생각합니다. 한 예술가가 70 세를 넘기고 혼신의 힘으로 써낸 처녀작! 껍질과 알곡! 예술인과 예술!

  이화대학 음대 교수였고, 두 아들의 어머니였고, 천성적으로 대책 없이 순수하고 사랑이 넘쳐 강한 것엔 강하고 약한 것과 수난과 핍박 받는 것엔 한없이 부드럽고 눈물 많은 어머니였던, 선생님은, 서울대 미학과를 나와 통신사 외신부 기자로 근무하다, 독일 본 대학에서 정치학, 철학, 사회경제학을 공부하고,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대학에서 학위 논문을 쓰다, 군사독재정권의 공작정치의 산물인 동백림 사건에 연류 되어 3년 동안 투옥되었다가 8ㆍ15특사로 풀려나, 일거리가 없어 성당의 종지기라도 시켜달라고 신부에게 부탁하던 선량한 공광덕 선생님을 만나 열애에 빠지고 이혼하게 됩니다. 공 선생님을 구하러 독일로 건너가 독일 대통령 영부인을 만나고 윤이상 교수 등을 만나 공 선생님을 독일에 망명하게 하시고 그 곳에서 재혼하십니다. 독일에서 두 분은 유럽에서 조국의 민주화 운동에 헌신하시고 김지하 구출 위원회도 만들어 활동하시며 독일의 지성과 훌륭한 작가들과 한국 교포들과 국내 최고의 지성과 양심세력과 교우하십니다. 한국에서 음악 교수로 얼마든지 화려하고 넉넉하게 살 수 있었던 선생님은 독일에서 생계 때문에 온갖 고생을 하게 됩니다. 거기다 공 선생님께서 암에 걸리고 암을 극복하기 위한 42일간의 단식을 선생님의 주도로 감행하게 됩니다. 그 단식 일지 사이에 선생님의 전 생애의 여러 사건들이 교직됩니다. 단식은 성공하여 공 선생님은 프랑크프르트 대학 “국제관계 정치학 연구소”에 다시 복직하셨지만 1 년 만에 다시 암이 발병하여 돌아가시고 맙니다.

  선생님의 책은, 이응로 화백의 감동적인 예술성도 소개되지만 무엇보다도 분단 조국 역사의 수레바퀴와 비민주적인 정치권력이 무고한 사람들의 자유와 인권을 어떻게 유린했는가를 보여주고, 그 격랑에 천재적인 예술가 선생님의 아름다운 사랑과 공 선생님의 지고한 정신과 많은 등장인물들의 맑은 영혼과 뜨거운 인간애가 독자의 가슴을 울리는 종소리가 됩니다. 동시에 이 책은 조병옥 선생님이 분단 조국의 민주주의와 인류의 평화와 자유와 정의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합니다.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82년 남편이 프랑크프르트 대학 법학과 객원교수로 유학해, 우연히 프랑크프르트 위성도시 노이이젠브르크 2 쉬발벤쉬트라쎄에 있던 선생님 댁 바로 옆 골목에 살게 된 때였습니다.

  선생님 댁은 싸르트르의 카페처럼, 유럽 지성과 양심과 예술의 메카였고, 한국 해외 민주화 운동의 산실이었으며, 선생님 예술의 공연장이기도 했습니다. 자주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좋은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대화가 얼마나 사람들의 지평을 넓게 하고 삶을 풍부하고 즐겁게 하는 것인가를 그 곳에서 보았습니다. 선생님 댁엔 인문학과 예술이 있고 음악이 있고 자유가 있고 꿈이 있고 사람이 있고 사랑과 신이 있고 자연이 있었습니다. 거실엔 싱싱하게 자라는 풀꽃들이 있었고 노이이젠 부르크를 에워싼 광활한 숲에서 불어오는 상쾌하고 맑은 공기가 가득했지요. 선생님은 요리도 참 잘하셨습니다. 손님을 위해 정성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셨지요. 선생님은 참으로 부지런 하셨고 일과 사람에 최선을 다하셨지요.

  때때로 선생님은 직접 작곡한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입니다”, 양성우 시인의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 등의 노래를 부르기도 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시를 보는 눈이 시인 이상으로 예리하셨고 저보다 시를 더 많이 읽고 계셨습니다. 저는 가끔 선생님께 미흡한 제 시를 보여드리기를 좋아했습니다. 제 시 “기도 2”에 곡을 부쳐주셨고 유럽 교포신문에 발표도 해주셨지요. 선생님은 일상에 매몰되는 제 시심을 자주 일깨우셨지요.

  제가 뜻밖의 병으로 입원하게 되자 선생님은 저보다 더 많이 울고 슬퍼하셨지요. 그렇게 사랑이 많으셨습니다.

  어느 이른 봄날 제가 제 집 길 쪽으로 난 거실 창밖 나무에 맺힌 수많은 이슬들이 보석처럼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는데, 길 건너편 슈퍼마켓 쪽으로 걸어가는 선생님이 보였습니다. 모딜리아니의 그림 같기도 하고 사슴 같기도 한 선생님의 모습이 쓸쓸하고 우수에 차 보였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항상 밝고 환하고 발랄하고 재치 넘치던 선생님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을 떠나서 살아야하는 망명자의 얼굴일까? 자신의 내면을 보고 있는 예술가의 얼굴일까? 선생님이 사라지신 뒤에도 저는 움직이지 않고 선생님의 또 다른 모습을 오래도록 상기하고 있었습니다.

  1984년 저희 가족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프랑크프르트 공항에, 항상 부드럽고 인자하시고 사람들과 담소하기 좋아하시던 공광덕 선생님과 선생님께서 나오셔서 아무 말씀도 못하고 우리를 바라보시고 계셨지요. 마음대로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저희들을 바라보시면서 그리워도 고향에 갈 수 없었던 선생님들의 가슴! 저 역시 무슨 말씀을 드려야할지 몰라 아무 말씀도 못 드리고, 두 분을 뒤로 한 채 비행기에 탑승했지만, 두 분 선생님들의 호수 같은 큰 눈이 제 앞에서 떠나지 않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쏟았습니다. 아이들 앞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울지 않던 저였는데 아무리 억제하려 해도 눈물이 자꾸만 흘렀습니다.

  눈부신 조병옥 선생님!

  『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를 읽으면서, 다 읽은 후에도 "조병옥 선생님 만세!"를 외쳤습니다. 조선생님과 공광덕 선생님과 두 아드님 호정이 호산이 모두 삶의 승리자이십니다. 인간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이 수기에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지고지순한 사랑의 빛으로 엮어진 삶의 무늬들! 아프고 눈부십니다.

  이 한 권의 책으로 선생님은 선생님과 공광덕 선생님과 사람과 사람세상과 역사를 영원하게 하셨고 인간에게 꿈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참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큰 일 하셨습니다.

  조 선생님! 문학의 성과에서도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의사 지바고』보다 더 감동스럽습니다. 선생님은 지바고의 라라보다 더 아름답고 향기롭고 아픕니다. 공광덕 선생님은 지바고보다 더 따뜻하고 깊고 멋지십니다.

  선생님은 과연 예술의 덩어리입니다. 선생님에게서 분출되는 강렬한 예술의 힘은 음악을 넘어 문학에서도 이 처녀작 한 권으로 선생님이 얼마나 큰 작가이신가를 보여주시네요. 문장의 아름다움과 힘과 독창성 그리고 내면의 깊이와 폭넓은 시야가 독자를 설레게 합니다.

  인간과 삶과 세상과 세계와 우주와 신을 품은 선생님의 큰 가슴이 장엄합니다.

  프랑스의 여성작가 뒤라스는 노년에 젊은 날 보다 더 좋은 작품을 썼다고 합니다.

  부디 건강하셔서 앞으로 많은 걸작으로 인간세상을 아름답고 향기롭게 하는 빛이소서.

  온 마음으로 다시『라인강변에 꽃상여가네』를 축하드립니다.

 

                                                     2006년 10월 5일
                                                                              차옥혜 올림

 

                                            <소리없는 그리움 -2006년 서간문집(한국여성문인회)  2006>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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