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깨는 마늘 싹 앞에서
이혜선(시인ㆍ문학평론가)
허공에서 싹 트다
차 옥 혜
여름 가을 겨울
처마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던
마늘이
허공에서 싹 트다
파릇파릇 마늘 싹이
허공에서
초록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구경한다
쪼글쪼글한 마늘이
말라비틀어지는 마늘이
제 몸의 수액을 한 방울이라도 더 짜서
새싹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올리려고
몸부림친다
마늘 싹이
허공을 깬다
모든 씨앗은 땅에 묻혀야 비로소 싹이 트고 자라서 열매 맺을 수 있다.
그런데 여기 허공에서 싹 트는 마늘이 있다. 양분도 수분도 따스하게 감싸주는 흙의 품도 없이 홀로 허공에서 싹트는 마늘이 있다.
그 싹을 밀어올리기 위해 마늘은 얼마나 안간힘을 쓴 것일까. 쪼글쪼글해지고 말라비틀어지다가 마침내는 빈 껍질이 되어 사라지는 마늘의 일생.
자신은 빈 껍질이 되어 사라지면서도 초록 싹을 세상에 밀어올리기 위해 몸부림치는 마늘의 삶에서 우리는 모든 어미의 삶을 생각한다. 제 몸 속에서 새끼를 키우며 제 살을 양분으로 제공하여 새끼가 다 자라서 나가고 나면 텅 빈 껍질이 되어 사라지는 어미고둥처럼, 땅 속에 묻혀 제 몸이 썩어야 무수한 새로운 열매를 맺는 갖가지 씨앗들처럼 모든 어미들은 제 몸을 희생하여 새로운 생명을 키워낸다. 아무리 그것이 이 세상에 생명을 존재하게 하고 영속하게 하는 자연의 섭리며 이법이라지만 한 번쯤 둘러보고 고마움을 새길 일이다. 조그만 마늘 싹이 허공을 깨고 있는데 우리는 언제까지나 눈을 가리고 나 혼자만 잘났다고, 나 혼자 태어나서 나 혼자 자랐다고, 나만 잘 살면 된다고 두 팔을 휘저으며 걸어가고 있는가.
<『이혜선의 시가 있는 저녁』 2019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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