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들의 어머니 시인

           -차옥혜 선생님께 -

 

김규화(시인, 시문학 주간)

 

우선 나는 차옥혜다음의 말로 씨라고 쓸가, 님이라고 쓸까, 선생님이라고 쓸까 한동안 망설이다가 선생님이라고 쓰기로 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이라고 부르니 거리감이 있고, 격식을 차리는 사이같이 느껴지네요.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나는 지금 차옥혜 선생님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 이렇게 책상 앞에 앉았는 걸요.

 

선생님은, 내가 듣기에는 남들 모두의 이름 끝에 선생님자를 붙여 부르더군요. 언젠가 한번은 함께 택시를 탔는데 택시 기사에게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길을 묻더군요. 그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절대 아부내 표현이 지나치다면 용서하세요는 아니고 평소에 몸에 밴 겸손과 친절, 거기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런 소리더군요.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인가, 동숭동에서 여성문학인회 모임에 함께 참석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서였습니다. 먼저, 아무개라고 나에게 이름을 말하고, 나를 약간 올려다보며 웃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때 약간 고전적인 청색 투피스를 입고, 손에는 갖 나온 시집 아름다운 독이 들려 있었는데 그 표지 색깔이 입고 있는 투피스 색깔과 같았습니다. 맞지요? 시집 제목이 산뜻하면서도 강렬하여 표제시 아름다운 독을 들춰봤습니다. 

아니, 시를 말하기 전에 조금 낯간지러운 일이지만 그날 선생님의 인상부터 말하자면, 아무 사심 없는 맑은 눈웃음이었어요. 나처럼 쌍꺼풀 없는 약간 작은 눈에 눈웃음을 살짝 치면반쯤 눈이 자무러들어가고 그걸 보는 사람도 그 웃음에 반쯤 넘어갈 것 같았어요. 

아름다운 독이라는 시의 한 대목을 보자면 이렇습니다. 

 

장마로 웃자란 개나리 가지를 치려다 / 벌의 세계를 건드렸다 / 벌은 순식간에 내 손등과 손가락에 독화살을 쏘고 / 땅바닥에 쓰러졌다 / 목숨을 건 장렬한 저항과 방어 뒤의 고요 / 벌의 몸뚱이가 가볍게 바람에 흔들린다/나에겐 아름다운 독이 없다/ 내 집만 끌고 다니는 나는 달팽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경기도 어딘가에 선생님의 말씀처럼 황토밭이 있더군요. 위의 시는 그 황토밭의 마당에 서 있는 개나리 가지를 손질하려다 벌에 쏘여 혼이 난 과정과, 그 과정에서의 깨달음을 쓴 시였어요. 벌은 영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건다는 것과 도 나의 무엇을 위한 목숨 건 독이었으면 하지만 나는 내 목숨만을 지키기 위한 딱딱한 집 안에서만 웅크리고 사는 달팽이 같은 존재라는 것입니다. 

벌써부터 선생님은 시의 시선이 인간 상호간의 감정이나 내면 심리에 향하여 있기보다는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인 동물이나 식물을 인간과 같은 레벨에 두고 동등한 생명체로 보며 상생과 연민과 화해 쪽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경기도 어느 곳에 있는 황토방은 단순히 도시 생활자가 주말에나 가 보는 낭만적 생활에 기인한 그런 곳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연을 사랑하고 돌보는 대모로서의 자식 사랑의 집이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명체, 특히 식물을 가족 공동체로 파악하고 보살피는 것이 선생님의 자연 사상이었습니다. 

나는 그 황토밭에 10년 전인가, 초대되어 가 봤지 않습니까? 넓은 밭에는 없는 것 없는 식물 세계가 펼쳐져 있더군요. 살구, 매실, 호두, , 고추, 피망, 가지, 고구마, 배추, 서리태 등의 식물 자식들이 사는 한쪽에 대모가 사는 작으마한 집 한 채. 그 안에서 통유리 밖으로 바라보는 바깥풍경은 잘 가꾸어진 잔디밭과 그 너머 멀리 미루나무 몇 그루. 마침 그 때가 초여름이었던가요? 미루나무잎이 바람에 몸을 뒤집고 있더군요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대로 하자면 황토밭의 이 모든 나무와 풀과 꽃과, 찾아오는 벌나비까지, 다람쥐, 여치, 매미까지도 하나하나 빼놓지 않고 자상한 어머니가 되어 물 주고 거름 주며 보살핀다는 것이지요? 고마운 마음에 자식(?)들이 어머니 드세요 하며/싱싱한 열매와 잎을 듬뿍 내밀기도 한다고요?(나는 전생에 나무였나봐에서) 

그래서 선생님은 이 체험을 가지고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를 한 권 냈지요. 황토밭이 원고지가 되고 그 위에 손을 움직여서 식물을 기르는 일을 시를 쓰는 일에 빗대서 쓴 시가 이 시집 한 권입니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몹시 고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자연과 인류가 함께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의미와 보람도 있었다고요. 

선생님의 천성적 모성의 정은 나에게도 많이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를 보면 늘 칭찬을 합니다. 물론 나는 그 칭찬을 그대로 곧이듣지는 않습니다만 잡지나 시집에 나온 내 시를 빠뜨리지 않고 읽고는 꼭 나에게 전화를 하지요. 언젠가는 내가 쓴 하이퍼시를 한 편 읽고는 시의 달인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최근의 나의 시가 생뚱맞아 매끄럽지도 못하고 언어유희가 많아서 일반적으로 소통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그에 비해 선생님의 시는 이 시대의 사회적 현안을 꼭 집어내는 주로 생태주의, 환경주의 시로서 쉽고도 명징하게 쓰는 소통의 시가 아닙니까? 맑은 물같이, 밝고 따뜻한 햇빛같이 쓰는 선생님의 시가 아닙니까 

선생님은 생활면에서도 자신을 엄격하게 관리하며 삽니다. 또한 꾸밈이 없는 진솔한 면도 보여줍니다. 언젠가 반백의 머리를 염색을 않고 그냥 나타나서 하는 말이 선생님들한테 죄송해요였습니다. 그러나 풍성하고 윤나는 은발이 오히려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더군요. 언제 한 번은 여럿이서 점심을 끝내고는 잠깐 쉬는 틈에 요가를 시범해 주었습니다. 고난도의 요가법을 우리에게 열심히 알려주는 몸맵시가 군살 하나 없는 것이 끊임없이 자신을 닦달하면서도 남에게는 너그러움을 보여주는 그 자세더군요. 그러면서 선생님 몫의 어른 장지만한 크기의 고구마빵 하나를, 저녁식사로 딱 알맞다고 하면서 가져갔어요. 

그러한 청렴하고 절제된 자세로 살면서 시를 쓰니 시도 맑고 공감이 가는 시가 되겠지요. 언젠가는 선생님은 지금도 그렇지만반향을 크게 불러일으키는 시인이 될 것입니다. 

이 말을 하고 보니 릴케의 말테의 수기에서 명성은 성장하는 인간에 대한 공공연한 파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그러나 내가 선생님에게 한 반향이라는 말은 릴케가 말한 명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지요? 그리고 우리는 성장해버린 인간(시인)이 아니라 지금도 성장하고 있는 인간(시인)이기를 바란다는 것에도 이의가 없지요? 

안녕! 나를 보면 언제나처럼 웃어주세요. 그것이 나에게는 요즘 말하는 힐링이 되니까요.

 

<문학의 집서울 20142월호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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