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토밭 원고지’ 위에 세우는 ‘초록시’의 집
송용구(시인ㆍ고려대 연구교수)
차옥혜
1945년 전북 전주 출생. 경희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에서 문예창작학을 전공(졸업)하였다. 차옥혜 시인은 1984년『한국문학』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한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생태주의’ 패러다임을 詩的언어로 형상화해왔던 시인이다. 시인들 중에서 “나의 시는 ‘…주의’ 시입니다.”라고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특정한 사조 혹은 경향에 구속 시키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 시인의 천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학비평가의 안목으로 본다면 ‘자연’과 인간의 공존및 공생을 추구하는 ‘생태주의적’ 경향이 차옥혜 시인의 창작 여정에서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의 몸 속 세포마다 올올이 스며있는 ‘자연’과의 연대의식連帶意識이 육화肉化된 언어의 열매로 거듭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시집 『흙바람 속으로』의 서문에서 시인은 “삶의 모태인 흙의 근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 곳에 나를 세우고 세계로 향하는 문을 다시 열고 싶었다. (···) 모든 목숨이 제 빛을 발하며 서로에게 등불이 되고, 자연과 인간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싱싱하고 활력이 넘치는 세상을 보고 싶다.”고 말하였다. 차옥혜 시인이 生의 마지막까지도 자신의 생명을 의탁하고자 하는 ‘고향’이 어떤 ‘세상’인지를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최근의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에서 직접 고백한 것처럼 시인의 ‘고향’은 자신이 ‘태어난 전주’가 아니라 ‘자연이 인간에게 종속되지 않고 인간과 대등한 관계로 대접받으며 공존하는 모든 곳’이다. 시인이 태어나고, 살아가고, 머무르며, 묻혀야할 ‘고향’은 ‘흙’, ‘물’, ‘바람’, ‘나무’, ‘풀잎’과 한 가족이 되어 서로의 생명권生命權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생태사회‘ 혹은 ’에코토피아‘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필자(송용구)는 차옥혜 시인의 시를 “생태사회를 미시적微視的으로 집약시킨 마이크로코스모스”라고 규정해본다. 2010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는 차옥혜 시인의 생태의식生態意識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생태시집”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경희문학상』을 수상하였던 시인의 대표적 시집으로는 『발 아래 있는 하늘』,『흙바람 속으로』, 『허공에서 싹 트다』,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가 있다.
황토밭 원고지에
식물글자로 시를 쓴다
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야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후에도 보살피지 않으면
제멋대로거나 사라지지만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이다
언제나 설레고 아름답고 편안한
숨 쉬는 생명시이다
옷은 황톳물과 풀물로 얼룩지고
호미들고 동동거려 팔다리가 쑤셔
볼품없이 늙고 여위어도
식물글자로 시를 쓰는 것이 즐겁다
어느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지 어언 20년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지금 내 몸과 영혼의 집이 어여쁘다
-차옥혜의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전문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 2010년 ‘시문학사’에서 출간된 차옥혜 시인의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에 수록된 표제작이다. 시인은 ‘황토밭’ 위에서 ‘식물’들과 함께 살고 있다. 이 ‘식물’들은 시인이 ‘온 몸으로 껴안고 보살피는’ 가족과 같다. 식물을 키우는 ‘황토밭’이 시인에게는 ‘시’를 기르는 ‘원고지’와 같다. 시인은 원고지에 ‘글자’를 심고, ‘글자’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 넣는다. ‘황토밭’ 위에서 ‘땀’과 ‘사랑’으로 키워낸 ‘식물’들이 살아있는 ‘글자’로 일어서서 ‘원고지’의 이랑마다 ‘초록시’의 ‘파노라마’를 펼친다. 풀잎들은 ‘초록’ 시행詩行 의 ‘파노라마’를, 나무들은 ‘초록’ 시연詩聯의 ‘파노라마’를 ‘원고지’의 밭이랑마다 다채롭게 채색하고 있다. “식물은 흙범벅이 된 내게. 때로는 어린아이처럼 재롱을 떨기도 하고, 때로는 어머니처럼 나를 껴안고 내 등을 다독여주기도 하는가 하면, 연인처럼 내 영혼을 어루만져주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시가 되어 오기도 했다.”라는 시인의 담담한 고백에서 정겨운 “집”의 모습이 떠오른다.
‘식물’은 ‘풀물’로 여울진 ‘황토밭 원고지’ 위에서 시인의 가족이 되고, 시인의 ‘시’가 되어 시인과 함께 같은 “집”에서 살아왔다. 한 그루의 ‘나무’, 한 자락의 ‘풀’이 시인에게는 한 편의 ‘시’와 다름 없을만큼 소중한 존재이다. 그들이 저마다 한 편의 독립적 ‘시’로서 시인의 곁에 살고 있다면 , 시인이 ‘식물’과 함께 살아가는 ‘황토밭 원고지’는 그들 모두의 “집”이다. ‘황토밭은’ 흙으로 이루어진 건너방이고 ‘원고지’는 안방이다. 안방과 건넌방 사이를 혈맥血脈처럼 이어주는 “길”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 “길”은 모든 ‘식물’의 ‘생명’을 향해 혈액처럼 흘러가는 시인의 ‘사랑’이요, 시인의 마음이다. 시인이 ‘식물’과 더불어 한 가족으로 살고 있는 이 “집”은 ‘나무’와 ‘풀’ 같은 독립적 ‘시’들을 끌어안고 있는 총체적 ‘초록시’이다. ‘출판할 수 없는 한권’의 초록빛 생명시집生命詩集이다. 본래 ‘생태eco'는 그리스어 ’오이코스oikos'에서 파생된 낱말이다. ‘오이코스’는 우리말로 옮기면 ‘집宅’을 뜻한다. “나는 어느덧 식물들의 어머니나 언니나 동생이나 자식이 되었다.”는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식물’과 한 가족으로 살아가는 시인의 ‘집’은 ‘식물’과 시인이 서로 도움을 주고 받는 ‘생태사회eco-society'이다.
“식물은 맑은 공기를 생산하고 인간의 밥이 되어주고 집이나 가구가 되어 주고 사람에게 안식과 평화를 준다. 삶의 토대가 되어주고 세상을 풍요롭고 아름답게 한다. 식물은 동물과 세상의 생명이다.”
-시집『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의 「시인의 말」중에서.
인간의 ‘집’에서 살아가는 가족이 서로를 돕지 않으면 ‘집’은 무너질 수 밖에 없다. 생명의 ‘집’인 ‘생태사회’도 마찬가지이다. ‘식물’ ‘동물’, ‘자연’에게서 받는 고마운 혜택을 잊지 않고 ‘생명과 식물에 대한 권리와 가치도 인정하고 배려하고 지켜줄’ 때에 시인의 ‘몸과 영혼의 집’을 튼튼히 보존할 수 있다. 그 ‘집’은 ‘식물’과 시인의 상호의존相互依存을 통하여 ‘황토밭 원고지’ 위에 세워져가는 총체적 ‘초록시’이다. 독일의 유태계 시인 넬리 작스가 경고했던 ‘지구’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代案은 무엇일까? 지구의 모든 ‘흙’을 ‘원고지’로 삼아 ‘식물글자’로 ‘시를 씀’으로써 지구를 ‘생태문화’의 ‘집’으로 바꾸는 일이다.
<시문학 2011년 6월호 101-105쪽 수록>
'시에 대한 비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독」 - 김규화 (0) | 2019.10.23 |
---|---|
「이태석 신부님의 향기 때문에」 외 4편 - 오철수 (0) | 2019.10.23 |
「어머니와 꿩과 불명열」 외 1편 - 전원범 (0) | 2013.03.02 |
「선인장 꽃을 순례하다」 외 2편 - 이향아 (0) | 2006.04.07 |
「사랑법」 - 양병호 (0) | 2006.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