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

                    - 차옥혜의 시세계 -

임헌영 (문학평론가)

 

     1

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1986)에서 차옥혜는 종소리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진동시키며 멀리멀리 아름답게 울려퍼지려면 먼저 종이 좋아야겠지요.”라고 말한다. 차옥혜 시의 종소리는 마치 비 내리는 축축한 황무지에서 젖은 몸으로 대지를 호미질하는 수도녀의 육성처럼 깊고 멀리 울린다. 이 시인은 황무지에서도 풍요를 수확할 수 있는 예지와 투지를 함께 지닌 채 고통스러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음을/감사하겠습니다.//어두운 소리들이 허우적이는 시궁창에/내 귀도 빠지게 하소서/그리하여 함께 썩고 썩어 /발효하여/가스로 훨훨 날아가/하늘이 되게 하소서//괴로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3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 1990, 수록,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전문)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이 모든 존재에 대하여 귀를 열고 있는 건 곧 우리 현실에 대하여 어떤 편견이나 기득권도 버린 채 객관적인 위치를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그것이 냉철한 비판적인 자세이기보다는 따스한 모성애를 바탕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는 열린 귀뿐이 아니라 마음 전체가 그러함을 아래 시는 보여준다.

 

기쁨만 아니라/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희망만 아니라/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가진 것만 아니라/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승리만 아니라/ 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건강만 아니라/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

―『깊고 먼 그 이름수록, 기도 2전문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고 도전적이기까지 한 자세를 차옥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육화시킨 것이 아니가 싶을 만큼 비로 오는 그 사람에 실린 아버지두 편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런 대담성은 제2시집 서사시 바람 바람꽃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에서 감지되는 차옥혜의 신앙적 감성이나 우리 시대의 한 전범처럼 맺어진 부부의 인연 맺기와 이를 바탕한 가정생활의 영향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너는 부른다./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깊고 먼 그 이름수록,서시개구리전문)이라는 소망을 가득 담은 이 울음이야말로 차옥혜의 은은한 쇠북의 종소리일 것이며, 그 소리는 햇살 따스한 인생의 봄날보다는 음습한 역사의 계절인 가을에 더욱 멀리 울려퍼질 것이다.

이 시인의 소우주에는 깊고 먼 그 이름겨울보리비 내리는 날연작이나, 비로 오는 그 사람, 아름다운 물, 비를 기다리는등에서처럼 황무지를 적셔줄 생명의 원천인 수분을 갈구하는 기원과 투지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설사 대지가 아무리 메말라도 겨울보리처럼 그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뿌리의 생명력은 충분히 성장에 필요한 수분을 흡수하고야 만다는 악착스러움이 차옥혜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은 제4시집 발 아래 있는 하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2

초기 시집이 지녔던 사변성이 일상적인 삶 속으로 융해된 채 보다 보람된 생활과 인생의 본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로 바뀐 제4시집은 이 시인이 그간 고뇌를 거듭한 끝에 다다른 황무지로부터의 탈출, 혹은 황무지에서의 풍년제의 소망을 담아낸다.

내 가슴이 비좁아/숨막혀 못 살겠다고/네가 홀연히 떠나/종적을 감추자/나는 황무지가 되었다./우러르는 하늘마저/나를 외면하고/종일 모래바람만 분다.”(전문), 1988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시가 추방당한 시대에 황야를 개간하는 이 시인의 끗끗한 겨울 나무 같은 의지와 섬세함이 공존한다. 시인은 시가 없어서만 황야가 아니라 설사 시를 부활시킨대도 우리 현실은 황야임을 전제로 하면서 그 북바친 하소연을 이렇게 토론한다. 

 

머리채는 하늘에 잡히고

발목은 땅에 묶여

빛과 어둠의 채찍을 번갈아 맞으며

둥둥둥 울고 있는 북아

뿌리쳐라

하늘과 땅을 뿌리쳐

네 뜻대로 굴러

네 울음 울어라

―「전문 

 

앞의 시집들이 종소리였다면 이제 제4시집은 끝내 북소리로 바뀌었는데, 종소리가 높든 낮든 안온한 화평과 여유를 동반하는데 비하여 북소리는 급박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시 형태나 기교에서는 약간 풀어진 느낌을 지녔으면서도 역시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차옥혜의 느긋함 속에 감춰진 황야에서의 씨뿌리기 작업의 긴박성이 내비친다.

현실과 삶 그 차체가 어둠이고, 어둠이 보기 싫어서/벽을 쌓다 보니/내가 그만 어둠이 된다는 이 시인은 피를 흘리고/하루를 잃을지라도/내가 흘리는 눈물만이/어둠을 씻어내리니/내 체온만이 어둠을 녹여내리니”(어둠)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이 시인이 오늘의 삶을 어둠이라고 진단 내리는데는 하류층과 상류층 여인의 하루 생활을 대비시킨 두 여인의 하루나 방직회사 여공의 소박한 꿈을 그린 김성희와 같은 현실인식의 측면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원초적으로 갈등과 모순의 반복으로 보는 이 시인에게는 산다는 것은/먼지가 쌓이는 일이다./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산다는 것은)로 풀이된다. 그래서 차옥혜에게는 삶의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이 인생의 참다움에로의 승화이며 그것은 황무지에 풍년제를 올리는 환희에 해당된다. 그 과정에서 이 시인은 때로는 종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다급하면 북을 치기도 한다. 그 북치기 작업은 이 시인에게 생존경쟁을 위한 싸움이자 그 싸움을 중단시키려는 평화의 호소이기도 하다. 

    3

모든 아룸다움 중에 으뜸은/생명이니/생명을 지키기 위하여/싸움 아닌 것이 있느냐”(눈이 오는 날엔)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지닌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리로 으르렁대는 현실진단을 간과함과 동시에 바로 그 뒷구절에 이어지는 눈이 오는 날엔/우리의 상처마저/아름답구나에서 다툼을 멈추게 하려는 시인의 평화에의 기원을 전달 받는다.

생명체란 떠나야/사는/불붙은 맨발”(바람)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은 황야에 선 겨울고목이라도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그 존재의 보람을 과시함을 보여준다. 

 

겨울고목은 사상을 한다.

엄숙하고 깊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겨울고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목은 엄청난 사상의 힘으로

하늘을 빨아들이고

나를 삼킨다

그러자 나도 애닯고 장엄한 고목이 되어

사상의 힘으로

언 땅을 뚫고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대지를 빨아들인다

수맥을 마신다

아 모처럼 배가 부르다

―「겨울고목전문 

 

갈등과 모순에 찬 삶, 즉 황야에 내던져진 그 각박하고 척박한 조건에서도 뿌리가 있음으로써 나무는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배를 불릴 수 있다는 진단은 바로 이 시인이 자주 등장시키는 움직임, 바람의 이미지와 물, , , 바다의 의미와 상통한다.

이 시인은 생명의 투지력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위에 든겨울고목과 는 달리, 수세미 줄기를 잘라 그 수액을 먹는 사람을 향하여 내 피를 마시니 좋으냐고 빈정거린다./하기야 저희들끼리도 약한 자의 피땀에/빨대를 대고 사는 족속들인데 라며 조롱한다.”(잘린 수세미꽃이)는 것은 생명력의 경쟁이나 잔인성 혹은 비인간화를 상징한다. 바로 이런 생명력, 잡식성 지배욕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경고를 위하여 이 시인은 노동자농민의 핍박스런 현장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에 도식적으로 집착하지는 않으나 인간주의적인 애정을 보내는 입장에서 차옥혜는 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를 추구한다. 

 

황토흙을 받아/텃밭에 깔아주고/땅을 뒤집어/헌 흙과 새 흙을 뒤썪는다/헌 흙은 텃세도 하지 않고/새 흙을 받아들여/금새 한 몸이 된다/어디 저희끼리 만이랴/그래서 하늘을 날던 새들도/땅 위를 헤매던 짐승들도/종내는 흙에게 안기는 것이리라”(흙은 흙을 거부하지 않는다전문) 

우주 만상의 존재 일체가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태, 상대를 거부하지 않고 평화로이 수용하는 상태를 이 시인은 발 아래 있는 하늘로 상징화한다. “가지와 잎과 꽃이 한 그루 나무이듯이/발 아래 있는 하늘과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하나이고/그 하늘과 나와 당신이/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발 아래 있는 하늘)는 깨달음은 가깝고도 멀며, 쉬우면서도 어려울 수 있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이 경지에 이르러 인간과 삼라만상은 명실상부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으며 시인은 좌절과 슬픔보다 환희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체화와 조화는 신명풀이의 만남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단을 이 시인은 내려준다. 연작들이 제시하는 세계는 갈등과 증오가 뒤엉킨 만물들이 사랑의 매개로 만나서 화해와 일체화에로 승화하는 과도기 모습이다.

목숨의 허물을 벗었어도/떠나지 않아라/뜨겁고 괴로웠던 황무지에/사랑 있어/춤으로 살며/거듭거듭/물이 되는 넋이여”(3)라는 환희의 순간은 만남 사랑의 절차를 요구한다. 

 

천년 화석으로

마주본들 무엇하리

석불로 나란히 서서

눈비 맞은들 무엇하리

 

멀리 있어도

얼굴을 몰라도

마음이 만나야

만남인 것을

벌거벗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얼음 안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불이 된다네

―「만남전문 

 

황무지를 만나가 내리는 땅으로 바꾸려는 꿈은 시인의 영원한 작업이며, 그 노정에 차옥혜 시인도 동참한다. 이 시인은 모든 존재의 만남을 사랑이란 의전절차를 거칠 것을 강조하며, 이점 역시 많은 시인들과 닮았다. 그런데 차옥혜는 그 만나는 장소를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닌 발 아래의 하늘로 잡았다는 점에서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생명력의 영원한 원천인 대지를 상징하며, 이런 시인의 의도는 흙을 향한 노래연작에 여실히 드러난다.

대지에 뿌리 내려 사랑으로 만난다는 것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가차없는 항의와 비판이자 바람직스럽지 못한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그렇다. 차옥혜의 시는 하늘과 땅이 만나 사랑하는 관계로 이어주고, 그 사랑을 대지 깊숙이 묻어 생명력을 번창하게 만드는 종소리이자 북소리이다. 울려 퍼져라, 대지를 향한 복음이여.

 

<임헌영 문학평론집 우리 시대의 시읽기290-297쪽에 재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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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속에 짓는 집

  홍정선(문학평론가)

 

    1.

이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 필자는 몇 가지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변명이라기보다 필자의 나쁜 버릇에 대한 참회라고 해야 더 올바른 말이 될 것 같다.

차옥혜 시인의 원고를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6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로 출판사로부터 해설 원고를 써줄 것을 부탁 받은 지 4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 엄청난 시간 동안에 필자는 시집 뒤에 붙일 한 토막의 글을 쓰지 못해서 마냥 헤매고 있었다.

원고가 늦어지는 동안 처음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엎치고 겹쳐서 그렇겠거니 하고 시인과 출판사 모두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5공 청산 문제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국민들처럼 양측은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지만 필자의 원고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시인 쪽에서 도리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차옥혜 시인의 바닥 모를 순수함이 낳은 그 같은 불안감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었으며, 문제는 필자 개인에게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 머리 속으로는 끝없이 글을 쓰고 지우고 했지만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좋게 말하면 기독교 문제에 대한 직장에서의 심각한 좌절감이 이 시집을 통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볍게 마주 대할 수 없는 원고에 대해서는 마냥 시간을 끄는 평소의 버릇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즈음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의 말을 빌리면(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들어서 박해자의 대열에 선) 기독교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직장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의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제의적인 기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차옥혜의 시는 필자에게 갈등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차옥혜의 시에 나타나는 기독교와 그녀의 시로부터 우러나오는 품성은, 소설가 정찬의 말을 임의로 이 자리에 잠시 도용한다면, <사랑의 군중을 거느렸고><그럼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생생히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었던> 예수, 앞에서 이야기한 지라르의 예수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상반되는 두 기독교의 모습 앞에서 마냥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필자는 시인으로부터 우송받은 교정쇄를 가방 속에 넣은 채 마냥 들고 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18개월의 기간을 약속하고 10년을 넘게 시간을 끈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상처럼(필자의 글은 감히 그 명작과 비교 될 수 없지만 어쨌건 시간을 끌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 원고는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마치 밀린 원고를 두고 도박에 몰두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순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로댕과 도스또예프스키를 이해하는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필자를 구속하고 있는 기독교적 현실의 언어와 필자가 써야할 해설 속의 기독교적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그 언어들이 이루는 의미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순결함으로 필자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저쪽에서 필자를 부르고 있었다. 

    2

차옥혜의 두 번째 시집 [바람 바람꽃]에 붙인 해설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었다. <차옥혜의 서사시[바람 바람꽃]을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한동안 막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수 있다니---->라고. 필자의 이같은 생각은 이번 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을 읽고 난 후 더 분명하게 굳어진다. 그래서 그녀의 이번 시는 이 세상의 온갖 천박함으로 물들어 있는 필자에겐 두 번째 시집의 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고, <이 세상을 넘어서 피어 있는 바람꽃>이다.

그녀의 시에는 두 번째 시집이 그랬듯이 이번 시집에도,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시는 독특한, 정화된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길을 막고 선

가시나무에

피 흘려도

어서 건너와

당신의 몸

찔린 상처마다

피어난 꽃을 보라는

나는

당신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에서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당신>의 이미지에는 조금도 증오와 원망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또한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항의와 반발을 해보이지도 않는다. 자신의 완벽한 무죄로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집단의 폭력성을 입증해 보인 예수처럼 이 시 속의<당신>은 그렇게 서 있다. 그 당신은 <길을 막고 선/가시나무에/ 피 흘려도><찔린 상처마다/피어난 꽃을 보라는> 그런 당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신의 모습에는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자신의 수난을 증거로 타인에 대해 마찬가지의 수난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세속의 오만함을 이 시 속의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이 시에는 그 대신 오로지 자신의 끝없는 수난으로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입증해 보이는 사람의 자세가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당신>의 경지는 차옥혜 시가 도달하려는 목표이다. 그녀 시의 화자가 목메어 부르는, <내 애간장 다 태우>며 기다리는 그곳에는 언제나<당신(혹은 님)>이 있다. 그 님, 혹은 당신은 비록 호칭이나 시적 진술에 있어서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인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독교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에는 그래서 주()를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항상 들어 있다. 그 자세로 그녀 시의 화자는<당신>과의 합일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며 나아간다. 

 

마침내 꽃잎 지듯

내 살과 뼈 재가 되어

님이 밟을 땅

웅덩이를 메우며 스러져도

이 세상 끝날에도 타고 있을

내 불꽃 넋은

님 속에 집을 지으리니

-[분신]에서 

 

그러면 그녀의 시에서 <내 살과 뼈 재가 되>도록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님 속에 집을 짓>는 것이며 <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 다시 님의 나라로 가는 길

때때로 가시 찔리고

들짐승이 으르렁거리고

강도 만나는 길

그러나 생명인 길

-[제야의 종소리]에서

 

따라서 우리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차옥혜의 이같은 시를 두고 <님 속에 짓는 집>, 혹은 <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옥혜의 시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도대체 어떤 집일까? 그 집은 어떤 모양의 집이기에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하는 것일까? 그 집은 세속의 질서를 벗어난 저 먼 곳의 세계에서 아득히 우리를 손짓하며 오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어떤 집일까? 아니면 세속의 가치와 안락으로 우리를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집일까? 그리로 그 집은 어떻게 지을 수 있는 집일까? 우리는 이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시를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질서 속에 세운 집은 아니지만 세속의 집을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세우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정의로움과 무관한, 초월적 세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녀가 세우려는 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의 현실이라든가 노동의 착취와 같은 온갖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죄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아아 입 다물고

황사 바람에 눈감고 산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분단의 벽은 얼마나 더 높아졌던가

-[소리와 침묵]에서 

 

그녀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부터 벽돌장을 놓아가는 집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삶의 질서, 세속적인 안락의 집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녀가 짓는 집의 초석을 이루고 있다. 이웃의 가난과 이웃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깊이 통회하면서 그녀가 세속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수평적이 삶(정의로운 삶)에 대해 가지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은 이번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집 지하실 단칸방에/노모와 동생들과 함께 세를 살던 노총각은 /공장에서 12시간 노동에/잔업으로 야근까지 하고 돌아온 일요일/불편한 노모를 부축하여/마당가 화장실을 다녀가다/발을 멈추고/라일락꽃에 부서지는 봄볕을/하염없이 바라보다/문득 꽃밭을 손질하고 있는 나에게/어떻게 하면/집을 가질 수 있죠/라고 물었다./부지런히 일하고 근검 절약하면/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어요/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그들은 소리 없이 씁쓰레하게 웃었다./그 순간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히는 /그들의 웃음이여

-[우물 안 개구리] 전문

이렇듯 [내 친구의 십자가는]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친구의 자기 희생적인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웃의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지리산 마을에서 하룻밤]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와 역사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녀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차옥혜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는 이 부끄러움은 그러나 이 글의 첫머리 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회나 집단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곧장 표출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 시에서 화자는 이 부끄러움을 자신의 내면을 향한 죄의식으로 치환시킨다. 윤동주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이 세상의 온갖 모순에 대한 성찰을, 그녀 자신이 그러한 죄 많은 세상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의식으로 치환해서 다시 성찰한다. 그녀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이 사실을 우리 앞에 뚜렷이 증거해 준다. 

 

창 너머 밝아오는 새벽빛을

차마 고개 들고 바라볼 수 없었다

-[아버지]에서

 

나이 사십이 넘고도

제자리에 없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기도]에서 

 

그녀 시의 화자는 <내가 죄인이듯이 당신도 죄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그렇게 사람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그녀가 파악하는 예수의 죽음이 제의화된 기독교가 아니었듯이 그녀 시의 화자는 섣부르게 이 세상을 향해 강압적인 목소리로 회개를 요구하거나 대속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다만 <차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의 죄의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이 죄의식은 순결하다. 거기에는 희생적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이 세상 속에 마련하겠다는 욕망이 전혀 배어들어 있지 않다.

그녀 시의 화자가 드러내 보이는 이와 같은 순결한 죄의식은 그녀의 시를 수평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수직적인 삶의 높이에로 끌어올린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수직으로 치솟아 오른 포풀라나무가 그가 도달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갈망의 표상이었듯이 차옥혜 시에 있어서<당신()>은 그러한 표상이다. 그녀 시 속의 화자는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둥켜안고 <당신()>을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자는 인간들을 향해 속죄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세계를 향해 기도의 자세를 취한다. 

 

채우지 마소서//비어있기에/충만한 평안을/그대로 머물게 하소서//비어있기에 꿈꿀 수 있고/내 안에 /햇빛과 달빛이 쉬어 가고/바람도 노래하다 떠나며/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감사하게 하소서//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 주소서

-[빈 잔] 전문 

이 기도의 자세는 위에서 보듯<당신()>을 향해 있다. 그러나 그녀 시의 화자가 당신을 향해 드리는 이 기도의 내용은 <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기뻐하게> 해달라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을 향해 있다. 모든 것이 제 모습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자세는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의 집을 버리고 <당신>의 나라에 집을 짓고 싶다는 그런 일방적인 수직적 초월의 기도가 아니다. 그 자세는 수평적인 삶이 없이는 수직적인 삶도 없다는 자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는 수평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수직적인 삶에 못지 않게 아끼고 사랑한다. 이 세상 속의 집들과, 그 집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족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여긴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비어 있는 이 세상과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찬탄한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다음 두 편의 시는 그래서 그녀가 <아름다워>라고 써놓지 않았더라도 무척 아름다운 시들이다. 

 

모두 훨훨 벗어버려

다 보이는 겨울 숲이여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낱낱의 작고 가냘픈 어린 나무들이

드러나고

땅에 엎딘 마른 풀들도

환하구나

큰 나무들은

아득한 어린 나무들 앞에서

겸손하구나

이제 보인다

가려 보이지 안던

앞마을과 뒷마을

먼 산과 강과 지평선

그리고 길들이

환히 보이는구나

-[다 벗으니 다 보이는구나]에서 

 

서기 36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키프로스 쿠리온 시 유적터의 한 주택 내부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가 마주 꼭 껴안고 아빠가 엄마의 등 뒤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를 함께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의 완전한 유골이 발견되어 그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공포의 순간을 사랑으로 버티고, 1996년 오늘까지 이 세상의 뼈들 중에 가장 행복하게 남아 있는 이 유골들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워라

-[가족] 전문 

 

그녀 시의 화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이 가족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비록 차옥혜의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세워진 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집이다. 화자의 그러한 의지는 <아름다워라>라는 찬탄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 시의 화자는 가시적인 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집은 쉽게 허물어지고 영속하지 안는다. 그녀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그런 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마음의 집이다. 

 

내가 지은 집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성이었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철근 기둥 세워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콘크리트 지붕 위에 기와를 올리고

높다란 돌담에 철대문도 달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잠깐 왔다가는 세상

바람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성이었습니다

이제는 해와 달이 아무리 넘나들고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부서지지 않을

(중략)

울타리 없는

집을 지으렵니다

-[모래성]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바람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집이 아니라,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부서지지 않을> 집이며 <울타리 없는> 집이다. 이 집은 지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형태를 가진 집이 아니라 차라리 마음 속에 세워진 집이며, 화자의 삶이 끝난 후에<내가 떠난 후에도 내 노래는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집이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만금의 재물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고, 만 권의 책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능히 그것을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오직 덕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이다 라는. 그녀 시의 화자는 이같은 자세로 오직 <당신> 속에서만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는, <당신>의 세계의 흔적을 가진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한다. 그 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이 세계 속에 있다. 

  3

이 시집에 대한 해설을 마치면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늘어놓았던 변명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와 같은 차옥혜 시의 기독교적 세계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과 관계된 것이다.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은 순수한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가지고 완전한 <당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적인 갈등의 흔적이 별로 없다. 이를테면 필자와 같은 경우 <가족>과 같은 시를 읽으면서 신의 완전한 사랑에 필적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과 함께, 그 같은 사랑을 지닌 인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신의 의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차옥혜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번 시집에 수록된<아버지>에 대한 시들에서 엿볼 수 있듯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풍토에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개인적인 소신으로는, 이러한 반발과 회의의 진폭이 진정한 기독교인에게일수록 필요한 것이라 믿고 있다.

                                                      198912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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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예수 -그 희망과 절망의 높이-

  홍정선(문학평론가/ 한신대 교수)

  

   1.

차옥혜의 서사시 [바람 바람꽃]을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한동안 막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수 있다니

[바람 바람꽃]은 제목 그대로 필자에겐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었고 이 세상을 넘어서 피어 있는 바람꽃이었다. 이 세상은 이 시집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어떤 높이를 가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과 한층 더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는 생각 사이에서 필자는 막막해 있었다. [바람 바람꽃]에서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밑바닥에서부터 삶을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가 가진 신념의 두께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믿음을 너무나 확고하게, 그러나 조금도 모나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가지고 있어서, 우리 인간에겐 그가 같은 인간이었다는 측면에서 가능성의 희망이면서도 절망의 높이였다. 

 

아시나요

바람이 쌓고 있는 산을

바람이 기르는 벌판을

바람이 끌고 가는 강줄기를

 

아시나요

바람의 가시 박힌 맨살을

바람의 부서진 뼈를

이 모두가 당신과 나에게 미친

사랑 때문임을

 

아시나요

당신도 나도

그 산과 벌판과 강줄기로 돌아갈

바람인 것을 

 

필자는 이처럼 필자를 향해 던져지는 아시나요라는 질문 앞에서, 또는 우리 모두가 예수가 이룬 그 산과 벌판과 강줄기로 돌아갈 바람이라는 대답 앞에서 다시 한번 어쩔 줄 모르는 막막함을 느낀다. 당신의 시대에 당신이 겪었던 사랑의 고통은 왜 똑같은 모습으로 지금 여전히 반복되어야 하나요? 틸리히의 설교 제목을 내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당신이 살았던 그 어려운 시대는 왜 지금도 영원한 지금으로 계속되어야 하나요? 불의와 탐욕과 수탈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이름은 더욱 명예로와지며 당신에 대한 갈구는 더욱 절실해진다는 건 얼마나 역설적인 건가요? 그것은 이 모두가 당신과 나에게 미친 사랑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필자는 평소 이런 질문들을 사람의 아들’(예수)에게 던지고 있었고, 이런 질문을 가진 심리적 기반 때문에 [바람 바람꽃]을 덮으며 필자는 막막해 했었다. 아직 나에게는 이문열 소설의 아하스 페르츠적인 사고가 종식되지 않은 까닭일까, 아니면 [바람 바람꽃]에서 가리옷 유다에 대해 시인만큼이나 내가 애정을 가진 탓일까 등의 자문자답을 하면서 필자는 이제 이 글을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보여준 가능성의 희망아니절망의 높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로 써보고자 한다. 

   2.

예수와 예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재미있게 기억되는 소설에 백도기의 [가리옷 유다에 대한 증언]이 있다. 이 소설에서 백도기는 유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스승은 너무 순진해, 세상의 악이 얼마나 견고하고 교활하고 뿌리깊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네. 나는 스승을 그 악과 직접 대결시켜 보고 싶었네라고. 그리고 또 그는 직접 나는 가리옷 유다에게서 수많은 전형을 본다. 사상적 혹은 행동적인 테러리스트들과 맑시스트, 본질적으로 인간의 힘만으로 이 세계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전형들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되풀이되는 불의와 탐욕과 수탈의 여러 형태들은 유다적인 행동주의에 대한 매력을 낳는다. 억압과 수탈은 저항의 당위성을 확보해 주며, 윤리의 부재는 물리적인 힘과 힘의 대결을 정당화시킨다. 유다에게서 백도기가 읽어낸 행동적 민족주의자로의 면모는 이처럼 시대상황이 그러한 해석을 정당화해 주는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백도기는 사람의 법과 경쟁하지 않는 예수를 통해 유다의 한계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시대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또 다른 가치의 척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 세상의 의미를 상대화시키는 저 높은 곳의 가치 척도를 인간의 행동양태에 적용함으로써, 힘에 의한 정의의 단명함을 지적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백도기는 결국 틸리히의 다음과 같은 말, “사랑을 정의 할 수 있는 더 높은 원리란 없다.”는 말을 수용하면서 현실정치를 강조하는 유다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보여주는 사랑의 원리는 과연 현실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송상일이 나인홀드 니버의 왜 기독교의 도덕주의는 정의의 문제에 대해 미약한 공헌밖에 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빌어 기독교 윤리의 가장 곤란한 문제는 사랑과 정의 사이의 딜레머라고 지적한 것처럼 앞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다. 유다가 강조해 보인 정치현실의 중요성은 사랑의 원리에 의해 대치 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 땅에서 불의와 탐욕과 수탈을 종식시키고 정의를 회복하려는 모든 노력은 언제나 물리적인 힘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 점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전쟁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옥혜는 [바람 바람꽃]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 곤란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차옥혜가 형상화해 낸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와 가리옷 유다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일까.

차옥혜의 [바람 바람꽃]은 하나님의 죽음과 이 세계의 정신적 불안이라는 기독교 문학의 일반적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이 땅 위에서 고통받는 인간 현실을 목도하면서 조건 없이 하나님 없이도 성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차옥혜는 그러한 질문마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까뮈 식의 만일 우리 시대가 허무주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허무주의를 무시하고서는 이루어지지 안는다는 철저한 대결의식을 차옥혜의 시에서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대신 이 땅을 지배하는 고통스런 현실과 이 현실에 대응하는 참된 종교인의 자세에 대한 고뇌 어린 모색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로 대변되는 진정한 사랑의 본질 문제를 현실정치와 관련하여 따져 볼 수 있게 된다.

차옥혜의 [바람 바람꽃]은 예수 생존시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말하지 않으면 평생 풀려나지 못해

병사들은 채찍질을 하고

무릎 사이에 방망이를 끼우고 앉혀

양끝에서 방망이를 밟아대네

몰라요 몰라요 정말 몰라요

병사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옷을 벗긴 후

첫눈 쌓인 순백의 처녀림

아직 다람쥐 발자국도 없는

순수의 숲인 벌거숭이 처녀를

수갑채우고 족쇄채워

주무르고 비비고 쥐어뜯네 

 

위에서 부분적으로 보았듯이 로마 병사들에 의한 막달라 마리아의 연행, 고문 재판과정에는 우리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으며, 이러한 장면의 등장은 분명히 현실적 상황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또한 의식적이건 의식적이지 않건간에 마리아의 오빠 시몬과 가리옷 유다의 모습 속에는 지금 우리 사회의 운동권 혹은 반체제 단체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들어 있다. 

 

바다에서 평안히 그물질을 하기 위해선

먼저 하늘과 땅에 그물을 드리우고

잡아야 할 것들이 있었네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져야 했네

희망과 독립과 자유 속으로

이스라엘을 건져야 했네

막달라 마리아의 오빠는

제로테가 되어

이스라엘 남쪽 광야로 떠나버린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네 

 

차옥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연상시키는 고통스런 현실을 막달라 마리아의 수난과 로마와 헤롯의 압제와 제사장들의 투쟁과 예수의 사랑의 투쟁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다와 예수의 논리 속에 잠긴 이 땅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유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며 청교도적인 정신자세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엄격하게 절제함으로써 혁명에의 열정을 불태운다. 그가 이 땅의 가난을 물리치는 방법은 예컨대 예수의 발에 발라주는 향유를 보면서 내뱉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았다면/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거요/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도울 수 있었을 텐데/이 무슨 허식의 향연이요?”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유다는 현실주의자이며, 상대방을 높임으로써 자신도 높임을 받는 정신적인 충족감을 납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현실 대처 방식을 정면으로 문제를/해결하지 안고 회피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예수는 한 영혼의 값은/삼백 데나리온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영원하기 위한사랑의 길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걸어간다. 유다가 예수에게 정면으로 대어드는 다음 장면은 오늘의 세계질서를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통한 정신혁명에 유다가 구체적 현실을 들어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로마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땅에 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일한 땀의 결실을

매일 본국으로 수송하고

우리를 다그치며 가난과 궁핍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려는 시선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어떤 구체성 있는 대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을 통해 제시되는 대답은 진리는 낯설고두렵다는 것이며영원한 생명이라는 종교적 추상을 띤 이야기일 따름이다. 예컨대 마리아가 변호하는 예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캄캄한 사람들이여

어둠을 어둠으로 부수지 않고

빛으로 끌어내려는

죽음을 죽음으로 두지 않고

생명으로 깨우려는

깊고 깊은 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는

자갈들이여 

 

마리아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되는 예수는 어둠을 어둠으로 부수지 않는 사람이며 죽음을 죽음으로 두지 않는사람이다. 그의 논리는 칼에는 칼, 이에는 이로 맞서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로마를 무너뜨리는바람(사랑)의 논리이다. 일견 보기에 현실적인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본질 그 자체를, 일생의 복락이 아니라 복락의 본질 그 차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같은 형태는 그러면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 땅의 괴로움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현실적인 정의와 예수의 사랑을 얼마나 합치될 수 있는 것일까.

차옥혜는 분명히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분신인 사람들이 이 척박한 땅에서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시도한다. 그는 그것이 예수의 보편적 사랑, 다시 말해 민족애와 같은 특수한 형태가 아닌 사랑의 본질 그 자체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시집에서 바로 되풀이해 반복하는 바람이고, 생명의 영원성이며, 진실의 힘이다. 그녀는 이 바람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사는 땅은 한 걸음씩 낙원으로 접근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은 이 시집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이자 차옥혜의 믿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선이 확장하는 영역만큼이나 악의 영역도 확장되어 왔으며, 공의가 확립되는 만큼이나 악도 강대해져 왔다. 정의를 직접 만져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깊고 깊은 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는 /자갈들로 남겨 두는 한, 악의 세력은 언제나 현실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다. 사랑의 원리는 최상의 원리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며, 추상적인 한 이땅의 고통은 언제나 그것과 거리를 가지기 마련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차옥혜가 제시하는 사람의 아들 예수는 유다처럼 이 땅의 문제와 관련된 구체성의 면모보다, 성경의 해석에 근거한 보편성의 면모가 더욱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의 사건들 속에 여전히 갇혀 있으며, 이 땅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유다의 구체성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는 상당부분에서 성경기록과 다른 역사적 현실의 주인공이 되고 있지만 그 것이 그의 생애에 직접적인 좌절을 가져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 예수의 사랑은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며, 이 세상을 넘어서 있는 바람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신음하는 바람이고자 하지만 언제나 이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속에도 역시 부정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모습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정의롭지 못함의 구체성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을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 역시 그렇게 우리 속에 있을 것이다. 유다의 가슴 속에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을 거쳐 예수가 각인되듯이.

필자는 이제 마지막으로 서사시의 화자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시집에 대해 몇 마디를 첨가하고 싶다. 이 시집은 거의 전부가 막달라 마리아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유다나 예수가 직접적으로 화자가 되는 경우는 좀체로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긴 서사시를 어떻게 단조롭지 않은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옥혜는 마리아의 목소리에 의해 전개되는 부분과 시인의 목소리에 의해 전개되는 부분, 그리고 인물의 목소리를 마리아의 목소리가 격자구조로 감싸안으며 전개되는 부분을 적당히 교차시키고 있다. 

 

1) 이 막달라 마을에

    마리아라는 이름의 처녀가 있네

    사람들은 마리아가

    귀신들린여자

    미친 여자라고 말하네

 

2) 천대받고 손가락질 받던 나를

    사람이라고 목숨이라고

    이 세상 년년이 번영케 하는

    창조의 몸인 존귀한 여자라고

    말씀하신 이여

 

3) 모든 사람에게 영원하기 위하여

    나는 이제 곧 무서운 전쟁을

    홀로 치르어야 하리

 

    막달라 마리아는

    소리 없는 님의 말을

    다 듣고 있네 

 

위에서 1) 부분은 시인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2) 부분은 마리아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고, 3) 부분은 앞의 예수의 목소리를 마리아의 목소리가 격자구조로 감싸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이 시집은 그러나 묘사체의 “-라는 서술어를 지나치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화자의 구분에 대한 혼란과 함께 단조롭다는 느낌도 주고 있다. 예컨대 진리는 미래네/진리는 낯서네라고 말하는 것과 진리는 미래다/진리는 낯설다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어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보다 부드럽고 경어체에 가깝지만 묘사하는 대상을 풍문처럼 들리게 만든다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릎을 끓고

님의 옷깃을 잡아 흔드네

막달라 마리아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남겨둔 채

광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네

 

그리고 화자구분 문제의 경우 위에 인용된 구절은 그 앞에 놓여 있었던 예수의 이야기를 마리아의 입을 통해 이야기된 것으로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시인이 마리아의 행동을 묘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그러한 이중적인 효과에 동반하여 그 앞에 있었던 예수의 이야기를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에 화자인 마리아의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혼란도 초래한다. 

   3

이 글을 끝맺으면서 필자는 이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인 바람바람꽃에 대해 소홀했음을 느낀다. 이 시집의 1장에서바람으로 불어와서 4장에서 바람꽃으로 결실하는 이들 시어는 반드시 주목해 읽어야 할 언어이다. 차옥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들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늘한 바람을 선사하면서, 그 바람에 의한 어떤 결실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유다와 민중들이 그 바람 앞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편안해졌듯이.

차옥혜가 바람에서 바람꽃으로 정화를 통해 보여주려 한 역사성(현실성)과 초월성(기독교)의 동시적 결합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사랑과 정의 사이의 갈등에 대한 한 의미 있는 모색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그리고 또 영원히행복해지기를 원하는 한 이 시집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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