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조명 차옥혜 -

              위대한 모성과 신성의 빛

임동확(한국신학대학 교수시인)

 

잘 늙는다는 것은 가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안정과 적절한 지위를 확보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은 자신이 목표로 한 삶의 성취와 이상의 실현을 나타내지 않는다. 자칫 그것은 한 집단이나 공동체가 요구하는 가치관이나 행동규범을 자아가 마치 자기 것인 양 착각한 결과일 수 있다. 한 인간으로 살아오는 동안 어느 특정 집단이 요구하는 삶의 태도와 생각, 의무와 역할로서 페르소나(Persona)를 잘 유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 사회의 이상이나 윤리도덕의 체화가 인간 삶의 최종목표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그것들은 진정한 의미의 라기보다 남들의 생각이나 소속집단의 가치관과 타협한 외적 인격일 뿐이다.

이른바 잘 늙는 사람에서 흘러나오는 나이의 위엄과 지혜는, 따라서 한 사회나 집단의 특수한 윤리나 행동규범을 곧이곧대로 준수하는 데서 오지 않는다. 무조건적으로 한 사회가 부과한 의무나 역할에 동일시하기보다 어쩌면 역사 이전부터 한 인간의 내면을 형성하고 있었을 심혼의 부름에 충실할 때 드러난다. 특히 예술가의 경우, 모든 세대와 인종을 초월하여 우리들 심연에 영원히 살아 있는 원형적 이미지나 상징들이 그들의 작품속에 확인될 때 확인된다.

차옥혜 시인의 의식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층위이자 무의식으로서 모성의식이 그렇다. 이번 소시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모성의식은, 따라서 단지 생물학적이고 개인적인 차원의 감정이나 정서의 출현이 아니다. 뭇 생명을 잉태해 기르지만 한편으로 죽음을 포용하기도 하는, 모든 인간 정신에서 작용하는 어머니 원형(archetype)의 이미지가 구체화되어 있다. 

 

낙엽이 낙엽을 덮어주며

마른 풀들이 마른 풀들을 껴안으며

빈 나뭇가지들이 빈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적막한 겨울 들판이

적막한 겨울 숲이

적막한 나를 품는다

 

쓸쓸한 겨울 들이

고요한 겨울 숲이

뿜는 시리고 찬 은은한 빛이

쓸쓸한 내가

고요한 내가

읊는 시에

따뜻함으로 서린다

— 「적막이 적막을 위로한다전문 

 

이른바 노년기를 상징하는 낙엽과 마른 풀”, 그리고 빈 나뭇가지는 단지 고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새 그것들은 서로를 덮어주거나 껴안으며 바라보는 겨울 들판과 숲은 그야말로 적막한 나를 품어준다. 그러니까 그 가운데 출현한 쓸쓸하고 고요한 겨울들과 숲이 연신 뿜어내는 시리고 차며 은은한 빛은, 한낱 초월적인 그 무엇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전히 미지의 상태로 남아 있는, 각 개인의 무의식 심층에 있는 누미노제(Numinose)를 의미한다. 한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들어 있는, 흔히 혼이라고 부르는 정신의 독자성 또는 자율성을 나타낸다.

원로시인 차옥혜의 시에 서려 있는 신성의 빛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녀의 시에서 한낱 고집 센 노인들이 보여주는 정신적 무력감이나 공허감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이른바 잘 늙는극소수의 노인들만이 보여주는 영적인 따스함과 내적 풍요로움이 두드러진다. 제 연령에 맞는 심리학적이고 정령적인 심리 발달의 단계를 넘어, 얼추 종교 영역을 건드리는 새로운 심리적 발달의 가능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가을 콩밭에

콩깍지 터지는 소리

콩 튀어나오는 소리

콩깍지 콩으로 거듭나는 소리

흥겨워라

경이로워라

 

콩깍지야

겨울을 넘어

해마다 새싹으로 콩으로

거듭나는 콩깍지야

늙고 병든 나도

이 들녘에서 이 숲에서

거듭거듭 거듭나

너와 함께 살리라

— 「거듭나는 가을전문 

 

현재 는 어쩔 수 없는 세월의 힘에 늙고 병든 상태에 있다. 하지만 수확기의 가을 콩밭에서 콩깍지가 터지고 튀어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생명의 경이와 흥겨움을 느낀다. 특히 그 햇콩이 또다시 콩깍지 속의 콩으로 거듭나는 소리를 들으며, 해마다 새싹이나 콩으로 거듭나는 자연의 영원한 생명성에 감탄한다. 하지만 모든 콩깍지는 한낱 콩을 털어낸 껍질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모든 존재를 먹여 살리는 콩을 보호하고 은신처를 제공하는 콩깍지를 통해 영원불변하는 자기-생식의 원리를 경험한다. 무수한 생명들을 보호하고 양육하며 영양분을 제공하는 여신적(女神的) 자궁이 바로 콩깍지인 셈이다.

지극한 모성성을 대변하는 철수네 엄마가 그 좋은 예이다. 어쩌면 차옥혜 시인의 분신이라해도 무방한 철수네 엄마는 현재 암 투병중임에도 언제올지 모르는 아들네상차림을 위해 식은땀을 흘리며” “한여름 뙤약볕에서 밭을 맨다. “병든 어미를 잘 찾아보지도 않는” “아들네맨날 기다리며/죽어가는 몸으로/을 맨다. 그리고 이러한 철수네 엄마는 모든 것을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하는 위대한 어머니 의식의 발현을 나타낸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을 자처하는 위대한 어머니의 원형적이고 억압할 수 없는 생명력을 예시하는 것이 철수네 엄마”(사랑 2).

하지만 이러한 위대한 모성의 출현은 한 여성으로서 차옥혜 시인의 의식의 오랜 노력과 인내의 결과만이 아니다 단적으로 그것은 차옥혜 시인의 무의식에 들어 있는 내적인격으로서 아니무스가 잘 발달된 결과다. 예컨대 단식으로 속병을 고치다며/식사를 거부한 채 한사코 막무가내” “물만 마시다가 돌아가신 시아버지”(씨앗의 노래)평생 산을 가꾸고 지키며 살았할아버지 산지기”(벼랑에 몰린 할아버지 산지기)가 그 단적인 예이다. 그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 인물을 가리키지 않는다. 시아버지나 산지기는 모두 차옥혜 시인의 아니무스상의 투사 대상으로서 일종의 영혼의 인도자(Psychopompos)이자 의식과 무의식의 중계자로서 노현자(老賢者)에 가까운 인물상이다 

 

희망은 어서 자기를 찾아오라고

수시로 내 마음에 발신지가 없는

전문을 보내지만

나는 이제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지치고 발가락이 아프며

신발도 닳아 터졌다

얼마나 많은 날들을

새벽부터 밤늦도록 찾아 헤맸나

신기루일까 별일까

이제 희망을 버리고

호박이나 바람개비로 살자 하는데

나를 포기하지 않고

어서 오라고 끈질기게 재촉한다

몇 걸음 떼어보다 헐떡이며 주저앉아

제발 나를 그만 내버려둬

소리친다 그래도 한사코 끝까지

저를 찾는 것이

참 삶이라고

나를 부추긴다

— 「희망이 부르는 소리부분

 

여기서 희망에게 자기를 찾아오라는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하지만 그 발신지를 알 수 없는 희망의 부름에 는 응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는 발가락이 아프고 신발이 다 닳도록 그 무언가를 찾아 헤맨다. 자신도 모르게 어떤 식으로든 완전해지려는 내면의 요구에 따른 결과다. 하지만 어느 순간 는 그 희망이 처음부터 실체가 없는 신기루나 단지 하나의 이상일 뿐이라는 생각에 끝내 포기하려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를 재촉하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호박이나 바람개비처럼 주어진 상황이나 현실 속에 주저앉고자 한다.

하지만 제발 나를 그만 내버려둬라고 해도 한사코 저를 찾는 것이 있다. 그러면서 그러한 행위 자체가 바로 참 삶이라고 부추긴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이미 한 인간의 내면에 부여되어 있는 정신의 독자성, 자아를 초월하는 정신의 자율성이 끝까지 에게 포기하지 못하도록 한다.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혼이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신성한 힘 또는 강렬하고 자유로운 충동이나 정감이 끊임없이 작동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발도 무릎도 성치 않은 나를

오라오라 부르는 소리 끊임없어

드디어 너를 찾아 가는 길

끊어질 듯 숨이 끊어질 듯

터질 듯 가슴 터질 듯

오르고 오른 산길

마침내 만난 너

아름다워라 눈부셔라

하얀 나무들의 숲

천사들의 마을인가

평화의 나라인가

성자들의 사원인가

얼마나 사랑이 넘치면

온몸에 하얀 꽃 피었을까

하늘도 내려와 기댈까

어느덧 내 안의 나는

자작나무들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

자작나무 나라에 망명하여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선다

— 「자작나무 숲에 망명하다전문 

 

여기서 내가 발도 무릎도 성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애써 그 어떤 부름에 너를 찾아가는 길은 다른 것이 아니다. 어디선가 끊임없이 를 소환하는 그 무엇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전체인격이 되려는 내적 충동으로서 원형의 움직임이다. 그야말로 숨이 끊기고 가슴이 터질 듯 간난신고(艱難辛苦) 끝에 마침내 만난 너는 적극적인 자세와 노력으로 의식화한 자기 원형의 활성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아름답고 눈부신 하얀 자작나무 숲은 일종의 역전 현상은, 의식의 일방성이나 경직성이 극도에 달할 때 나타나는 전혀 반대되는 현상인 에난티오드로미(Enantiodromie)와 관계되어 있다. 싫든 좋든 그 자체의 목적에 의해 주어진 전생명력을 불태우도록 하는 자기 원형상이 천사들의 마을또는 평화의 나라. 자아의 오만을 버리고 자신의 내면의 소리에 경건하게 귀를 기울일 때 출현하는 것이 성자들의 사원이다.

넘치는 사랑으로 온몸에 하얀 꽃이 핀, 하늘마저도 기대는 자작나무 나라, 그러나 어떤 초월적인 세계가 아니다. 바로 다른 사람이 아닌 내 안의 나”, 바로 로 하여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가리킨다. 온갖 고초와 아픔을 동반하는 과정을 통해 힘들게 자기와의 일치를 통해 도달한 자기원형상을 상징하는 게 한 그루 자작나무.

 

씨앗이 밀고 가는 세상

씨앗이 먹이는 세상

씨앗이 키우는 세상

씨앗은 생명이다 목숨이다 넋이다

씨앗은 아버지다 어머니다 나다 자식이다

— 「씨앗의 노래부분 

 

앞에서 잠깐 아니무스와 연관시켜 살펴본 바 있는 시 씨앗의 노래는 일단 씨앗을 지키기 위해 식음을 전폐한 시아버지의 숭고한 희생과 그 뜻을 이어받은 며느리 영희의 미담을 보여주기 위한 시로 다가온다. 하지만 그 씨앗은 단지 식물학적인 연속성과 영속성을 보장하는 곡식이나 채소의 씨를 의미하지 않는다. 자기 원형의 관점에서 볼 때, 씨앗를 능가하는 내 안의 어떤 것, 곧 그 자체로서 나와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완전한 타자를 나타낸다. 한 인간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가능성으로 로 하여금 자신이 되게 하는 그 어떤 것을 상징한다.

달리 말해, “를 이끌어가는 것은 나의 의지나 의식이 아니다. 본인도 모르게 나 자신을 밀고 나가, 먹이고 키우는 하나의 객체정신(Objektsyche)으로서 씨앗이다. 자신조차 미처 의식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마음의 세계가 진정한 생명이자 모든 목숨과 넋의 근원이다. 그리고 인간 마음의 심층에 자리한 채 언제나 그 사람으로 하여금 전체(Ganzheit)로 살도록 하는 원동력으로서 씨앗, 바로 그런 의미에서 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혹은 자식이다. 무엇보다도 씨앗은 의식과 무의식을 포괄하면서 그 자신의 전부가 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다름 아닌 자신을 가리킨다.

그 가운데 바람밤낮 쉴 새 없이그런 또는 씨앗뿌리고 다니는 영적 운반자다. 또한 동시에 초현세의 풀과 나무를 키우고 냇물이나 강물에 숲을 이루도록 한다. 특히 그 여름바람은 자신이 지나간 땅엔” “새로 태어난 초록 벌판이/신생 초록별처럼 반짝이게 하는 부지런하며 솜씨 좋고 재주 많은/농부나 원예사”(여름바람이 짓는 초록 세상). 하지만 그 바람이 항상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세상 모두가 제 땅이고/제가 경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아집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바람에/백기를/기보다 맞서 뚫고 나가야 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다. “수시로 농부의 밭에 온갖 잡초들을 옮겨놓기도 하는 바람이 곧 모든 생명을 보존하고 퍼뜨리는 영의 힘을 나타내는 까닭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의 모순 또는 역설에 대한 차옥혜의 시인의 무한 연민과 지극한 감응은 이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예컨대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 날에 하필 눈밝은 새에 들켜버눈도 못 떠본 채 새의 부리 속으로 사라애벌레”(세상)벚꽃만발하고 눈부신” “봄날에 하필 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은 친구”(꽃이 모두에게 꽃이 아니구나)에 대한 가뭇없는 연민과 슬픔은, 단지 한 개인 차원의 감정 발로가 아니다. 본래에의 자기에로 재귀를 촉구하는 양심의 부름에 응한 결과이자 누구든 피해갈 수 없는 자기원형의 움직임이 가져다준 원초적인 도덕성의 발현이다.

차옥혜 시인의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나 고향에로 회귀의식이 대표적이다. 한마디로 너는 내 눈동자속에서 반짝이고 또 나는 네 눈동자속에서 빛나는 것을 의미하는 눈부처상태는, 상대방을 만나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가까이 가서 눈을 마주치며 하나가 되고자 할 때 가능하다. 나와 다르고 약한 타자와 자연을 기꺼이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사랑의 마음이 서로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되비추는 눈부처 현상이 발생한다. 모든 인간 존재의 가장 강력하고 피할 수 없는 충동이자 자연스런 본능으로서 자기실현의 욕구가 어머니와 고향에 대한 더할 수 없는 그리움을 부른다. 

 

어머니는

언제나 그립고 사무치는 옛살비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위험할 때

작아지고 가벼워져 바스라지려 할 때

저절로 튀어나오는 소리

마음의 근원 옛살비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옛살비 옛살비 옛살비

부르면 눈물이 나고 목이 메는

부르면 따뜻해지고 힘이 솟는

어머니는 옛살비

옛살비는 어머니

— 「어머니는 옛살비부분 

 

그런 만큼 차옥혜 시인이 노경(老境)에 간절하게 부르는 어머니는 단지 생물학적인 어머니에 대한 회고나 추억의 결과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모성과의 유대관계가 아직 제대로 해결되지 않은 경우 발생하는 모성콤플렉스에 붙잡혀 있기 때문이 아니다. 우선 그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원만만 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어머니와의 결별해야 했던, 언제나 그립고 사무치는 어머니 자궁으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특히 세상의 온갖 기쁨이나 슬픔, 그리고 위험에 처했을 때 저절로 간절히 부르곤 했던 원초적인 어머니에 대한 가뭇없는 그리움과 회귀의식은, 정작 그 어디서도 대체할 만한 것을 찾지 못한 생명의 원리와 법칙으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의 하나다.

차옥혜 시인은 지금 부르면 부를수록 눈물이 쏟아지고 목이 메는 어머니. 하지만 어느새 따스해지고 힘이 솟는 무의식의 심연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이제 더욱 작아지고 가벼워져 바스라질 듯한 몸과 영혼의 천진함과 무구함으로 모든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자 정신운동의 근원지인 마음의 근원으로서 옛살비로 귀향해 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바로 차옥혜 시인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했을 숭고한 지혜와 정신을 나타내는 어머니. 한 아이를 자애로 돌보고, 성장시키고, 영양을 공급하며 기꺼이 더 높은 영적인 삶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키워내고 이끌어낸 모성적 원형과 대면하고 있는 중이라 할 것이다.

* 임동확

1959년 광주 출생. 전남대 국문학과 및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서강대 국문학과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시집 매장시편을 펴내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시집 살아있는 날들의 비망록』 『운주사 가는 길』 『벽을 문으로』 『처음 사랑을 느꼈다』 『나는 오래전에도 여기 있었다』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 『길은 한사코 길을 그리워한다, 시론집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이유등을 펴냈다. 현재 한신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푸른사상 2019년 여름호>

※ 옛살비:  '고향'의 순우리말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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