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내 마음 속의 시                     

                                                                나기철 (시인)

모랫벌   

                                                        차옥혜

바위산이 무너져 누웠다.

차돌멩이 나도
자갈인 너도
부서져 부서져
조개와 게들이 집을 짓고
소라가 소리치고
물새가 알을 묻는 모랫벌 되자

밀물과 썰물에 씻기고 닦여
밤하늘 은하수에 별로 뜨리니

부서지고 깨어져
알몸으로 체온을 나누며
밟으면 패여서 발등을 덮어 주고
딩굴면 밀리는 듯 안아 주고
바람 불면 더 큰 하늘 더 큰 바다의
비둘기 떼 되는
할머니 할아버지 발 닿고 싶어하던
모랫벌 되자  

   1986430일 발행이라 쓰여 있다. 차옥혜의 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뒤쪽에. 그 무렵은 전국이 연일 화염병과 최루탄으로 들끓고 있었다. 박종철 군 고문 사건, 강경대, 이한열 군 사망 사건이 줄을 이었다. 비정통의 군사 정권에 대한 저항은 거셌다. 그런 통제적 상황은 학교에도 예외 없이 작용하고 있었다. 교육은 유신 때처럼 정권에 예속돼 있었고 자유롭게 학생들을 가르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땅 아래선 교육 민주화 운동의 용트림도 있었는데 군데군데서 어쩔 수 없이 용출하기도 했다.  
  30대 초반, 나도 자유롭지 못했다. 여린 내 영혼은 얼어붙은 사회와 입시 위주의 교육과 아직 정착되지 않은 집 분위기로 힘겨웠다, 마인드 컨트롤이니 요가니 단전호흡이니 하는 델 기웃거리고 각종 영성, 명상 서적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몸과 마음의 평화를 찿아. 그 두 해 전 아내와 같이 가톨릭의 영세도 받았다. 이곳의 문우들과 동인지 경작지대를 결성하여 한 해 한 번 동인지를 내었다. 그게 큰 위안이었다. 교무실 내 책상에 앉아 그 신경성의 시인을 생각하며 문학과 지성사 간 큰 책 '보오들레르를 읽기도 했다.
  시집이 무수히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가히 시의 시대였다. 그런 와중이었을 것이다. 차옥혜란 시인의 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이 있었다. 시집 앞엔 고은 시인의 극찬에 가까운 발문이 실려 있었다. 나는 오로지 고은 시인의 이 글을 통해 이 시인의 시를 읽게 된 셈이었다. 단시가 많았다. ‘나는 이 시집 깊고 먼 그 이름에서 내가 무던히 좋아하는 시가 20편도 더 넘는 사실에 놀란다. 큰 수확이다. 이 시집은 집념을 가진 사람에 의해 모색된 세계의 여러 형태가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봄 가을 겨울 따위의 상투적인 계절 감각과 함께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구사로 하여금 시 하나 하나의 고유성을 약화시키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집에서 20편 이상의 빛나는 결실이 그것을 읽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일이란 신인의 성과로는 드물기만 하다.’ 이 시집의 시들은 그녀가 서독에서 병상에 있을 때 쓴 것들이라 한다. 어찌 어찌 고은 시인에게 원고가 전해진 것을 그가 한참 만에 읽고 세상에 소개한 것 같았다.
   모랫벌을 보자. ‘바위산이 무너져 누웠다. 너도 나도 부서져 모랫벌 되자는 이 도저한 상상력, 자신을 극단으로까지 몰고 가 보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경지이다. 그녀는 아마도 이런 극단의 허무와 절망 속으로 자신을 내동댕이쳐 보았을 것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 때 나는 학교 도서실 창가에서, 짓눌려오는 머리와 그 혼미함을 안고 한라산을 자주 바라보았다. 언제나 어질어질했다. 벽에 머리를 부딪혀 보기도 했다. ‘몇 년 동안이나 힘써 넘으려 했던/ 저 푸른 산/ 이제는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 그냥 받아들이기만 하겠습니다/ 로 넘지 못하더라도/ 그 너머 아름다운 들판 있다 해도/ 무쇠비 오더라도/ 넘으려 허우적거리지 않겠습니다/ 조용히 바라보기만 하겠습니다’(졸시. ‘푸른 산전문)   이 시집 앞에는 시집의 표제 시 서시-개구리가 실려 있다. ‘불 붙은 목으로/ 사무쳐 부르는 이름/ 부르는 이름에/ 신이 들려서/ 밤새도록/ 너를 부른다./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그 이름은 아마도 우리 모두가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는 민주주의가 아니었을까.

* 차옥혜(1945-) 전북 전주 출생. 전주여고, 경희대 영문과 졸. 1984한국문학신인상 당선. 시집 깊고 먼 그 이름’(1986) .

                                                                                      <2002년 제주국제정보원 사이트>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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