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미가 운다

시인의 눈물 벌건 슬픔에 대한 다정한 공감

                                                                     박부민(시인)

시인이여 울어라

 

우렁우렁 산을 무너뜨리고 있는
굴삭기와 싸우며
매미가 운다

매미는 울어
곤두박질치는 나무에게
겁에 질린 풀잎에게
무너지는 흙더미에게
다가간다 함께한다

매미는 울어
굴삭기에 맞서
굴삭기 소리에 떠서
굴삭기 소리를 치받는다

매미가 운다
뙤약볕을 흔들며
굴삭기 소리를 깨뜨리며
굴삭기 소리에 혼절한 새들을 깨우며
매미가 운다

우는 매미여 시인이여

                               -차옥혜.매미가 운다엔솔로지 생명문학작가 제1』                     
                                                     (2023. 생명과문학사) 전문

  누군가 내가 하고픈 말을 가감 없이 대신해 줄 때 속 시원한 카타르시스를 누리며 마음속 맞장구를 치게 되는가. 차옥혜 시인의 매미가 운다는 그런 강력한 치유의 시이다. 언뜻 보이듯, 과감한 행동을 부추기는 선동이 아니다. 그런데 힘이 난다. 감히 매미 따위가 굴삭기랑 싸운다. 날개나 그 무슨 독이나 무기가 아니라 집요한 울음소리로 한 판 붙는다. 이게 땡볕 벌건 여름에 벌어지는 싸움이다.
  매미가 항상 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알다시피 한 철이다. 그렇게 오래 준비했으면 매미는 반드시 울어야 한다. 상대가 질리도록, 귀에 못박이고 무딘 양심이 덜덜 떨리도록, 무지막지한 굴삭기가 넌더리를 치며 뒤로 물러나도록 울어야 한다. 떼로 울어야 한다. 어느 하나 두들겨 맞아도 전체로는 끝내 패배하지 않고 끊이지 않는 울음을 울어야 한다.
  굴삭기 소리는 무엇인가? ‘산을 무너뜨리고 있는 소리이다. 산이 은유하는 것은 절대 무너질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견고하고 육중한 늘 그대로여야 한 어떤 존재이다. 그것은 우리의 버젓한 역사이기도 하고 상식에 기초한 법적 질서이기도 하다. 근본적 가치이기도 하며 지켜야 할 천륜, 인륜, 인권이나 생명, 사회적 약속이기도 하다. 그것이 무너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데 무법적 굴삭기에 무너지고 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세상이 되어 기상 이변만큼이나 전대미문의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벌건 대낮에 무지막지한 굴삭기가 용을 쓰며 망나니처럼 그 짓을 하고 있다.
  이럴 때 매미는 울어야 한다. 매미가 울지 않으면 이 무더위에 누가 우나. 뙤약볕을 흔들고 굴삭기 소리까지 깨뜨리는 힘이 매미의 울음에 있다. 굴삭기 때문에 곤두박질치는 나무들’, ‘겁에 질린 풀잎들’, ‘무너지는 흙더미에게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다가가 위로하고 돕고 함께 우는 것이 매미이다.
  차옥혜 시인은 시인이야말로 바로 그 우는 매미라고 직설한다. 산이 무너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다들 겁에 질리거나 무관심하거나 그런 고통을 나물라라 하고 마땅한 공감과 감정이입 없이 객관적 화법에 길들여지는 시절이다. 이때 시인의 울움은 굴삭기 소리에 혼절한 새들도 깨운다’. 새들은 하늘의 자유 활동자이지만 산이 없으면 새들은 어디에서 지내나. 그 들은 산에 보금자리를 두고 있다. 그 산이 무너지고 있으니 새들도 터전이 없어지는 거고 존재 이유를 상실하게 된다. 혼절밖에 더 하겠는가. 상처도 한두 번이지 거듭되면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런데 매미라고 안 울면 어떡하냐.
  굴삭기는 문명을, 도덕을, 정의를, 역사를 공공연하게 무너뜨리고 있는 누군가이거나 어떤 세력 혹은 시대적 조류이다. 이 시는 가히 군사정권 때 발표되었다면 애송시가 되었을 시이다. 그런데 지금도 이 시는 큰 매미 울음으로 들린다. 시대착오적인 황당한 거대 굴삭질이 자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반문명이든 부정이든 부도덕이든 전 영역에서 이런 일이 벌어진다.
  당대 시인이 할 일은 무엇일까? 우는 것이다. 몸살 나도록 죽도록 우는 것이다.
  그렇다고 매미가 무작정 고래고래 우는 건 아니다. 율격과 미학이 있다. 일정한 품격과 문학성을 갖추고 이 시대의 착오적 정신과 뒤틀린 가치와 윤리에 대해 시인은 운다. 맴맴 울든 찌찌찌찌찌찌찌 울든 찌리리리리리 울든 삐쪼시삐쪼시 울든 거칠게 울든 부드럽게 울든 어떤 식으로든 울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매미가 운다는 응원가이자 우리 시대 모든 다정한 시인들이 합창해야 할 시이다.

시인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중국의 량치차오(1873-1929)방관자를 꾸짖는다는 글에서 세상사에 무관심, 무지, 무념으로 살아가는 자, 나라가 망해도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자, 비판과 핑계와 탄식만 늘어놓고 책임을 포기하는 자, 기회주의자들을 비열한 방관자로 규정한다. 이런 공감 불능 방관자의 눈에는 눈물이 없다. 자기중심의 방과만이 있을 뿐이다. 부조리한 세상의 슬픔에 대한 공감력이 전혀 없다.
  고대 시칠리아의 팔라리스 왕은 거대한 놋쇠 왕소에 정적들을 집어넣었다. 그 밑에 불을 때면 고통의 울부짖음이 황소 목구멍을 통해 소 울음처럼 들렸다. 왕과 귀족들은 그것을 즐겼다. 억울한 죽음이 있어도 눈물은커녕 이의 제기도 없었다. 끔찍하고 병적인 무감각이었다. 불의와 부조리가 초래한 희생과 비극에 방관자, 구경꾼으로 지낸다면 우리 또한 놋쇠 황소를 즐기는 반문명적 잔인한 군상일 것이다.
  민영 시인의 대조롱 터뜨리기라는 시를 보면 운동회 날 아이들은 대조롱을 터뜨리고 비둘기가 날아오르는 모습에 즐거워한다. ‘전 날밤, 그 속에 갇힌 비둘기의 불안은 헤아리지도 못한것이다. 시인은 네 기쁨은 내 아픔 위에 세워진다고 시를 맺는다. 이렇게 남의 고통이 나의 행복인 황당한 사회에서는 눈물 어린 공감력이 절실하다. 이웃과 사회를 향한 넘치는 눈물이 필요하다.
  극도의 이기주의자와 방관자에게는 다정한 공감의 눈물이 없다. 성경에서도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곡하여도 울지 아니하는세태를 책망한다(누가복음7:32). 그래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고 했다. 이는 예수가 이 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라”(19:19)고 한 말에 다름 아니다. 곡을 해도 울지 않고, 우는 자와 함께 울지도 않는 세상은 그야말로 사랑이 없는 해괴하고 추한 공감 불능의 딴 세상이다. 이 공감과 사랑의 눈물마저 마른다면 우리는 어떤 반문명, 반 생명, 비상식의 세상을 더 살아가야 하나, 시인은 벌건 대낮의 슬픔을 방관, 외면하지 않고 울어야 한다. 시인의 눈물은 마르지 않는다, 과공감이라 해도 눈물을 아낄 수는 없다. 이런 눈물을 가진 시인들의 깊은 활동을 적잖이 지속적으로 보는 것은 우리를 안도케 한다.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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