칡의 이성과 본성
차옥혜
칡은 가을이 되어서야 정신이 든다
도토리나무를 칭칭 감아 올라 말려죽이고
산등성이 풀들과 작은 나무들을
덩굴로 덮어버려 질식시킨
여름날의 제 탐욕을 둘러보며
부끄러워 잎이 노래진다
토도리를 줍지 못한 다람쥐가 죽어간다
미안해서 뒤늦게 잎을 다 털어내자
드러난 거미줄 같이 얽힌 제 욕망의 줄기들이
사방 밥이란 밥은 다 긁어댄 거대한 갈고리다
눈꽃이 핀 칡의 마른 줄기를
하늘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본다
잘못했습니다
이제 제 이파리 보다 작은 땅에서도
주변 나무들과 함께 햇빛을 나누고
바람에 흔들리며 꽃을 피우는
작은 풀이 되겠습니다
다시 봄이 왔다
여기 저기 새싹이 돋는다
혹독한 반성의 계절을 보낸 칡도
새순이 돋고 촉수가 근질거린다
나는 물렁뼈 식물이라
어쩔 수 없이 뼈 있는 나무들을
기대고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야
겨우내 잘라낸 본성이 다시 살아난다
어느덧 칡의 덩굴이 나무 위로 뻗는다
다른 풀과 나무를 살피며 부드럽게 가라
칡은 제 덩굴을 잡아당기며 타이른다
덩굴은 칡의 말을 무시하고
땅속 깊이 박힌 뿌리를 흔들어대며
물 더 열심히 퍼 올려
소리치며 사방으로 돌진한다
<월간문학 2017년 2월호>
'시 -3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붉은 닭의 해를 맞아 (0) | 2017.03.08 |
---|---|
촛불 꽃 마음 꽃 (0) | 2017.03.08 |
이름 모를 풀꽃에 (0) | 2017.01.08 |
라이프치히에서 한반도 통일을 그리다 (0) | 2017.01.08 |
아버지 목소리 (0) | 2016.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