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적 절망에서 새 소망의 길 찾기
김종회(문학평론가, 전 경희대 교수)
1. 지금 여기에 이른 차옥혜 시인
차옥혜는 1945년 전주 태생이다. 어렸을 때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나서 주목을 받았고, 여러 차례의 다양한 수상 경력을 보였다. 경희대 영문과에서 수학했으며 부군을 따라 2년간 독일에서 해외 체류 기간을 보냈다. 귀국 후 지천명의 나이로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에 입학하여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시 창작 공부를 했다. 이 모든 생애의 절목(節目)들은, 궁극적으로 그를 시인의 길로 인도하고 좋은 시를 생산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출국 직전 남편이 가스 폭발 사고를 당했을 때, ‘독립된 인격으로 세상에 설 수 있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일상에서 매몰되었던 자아를 되찾으며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자기 문학의 출발점과 그 문맥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경우다.
차옥혜는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왔고, 1986년 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 이래 지금까지 모두 13권의 시집을 상재했다. 38년 세월에 시집 13권이면 참으로 신실하게 시작(詩作) 활동을 수행한 시인이다. 그의 시는 자신의 내면을 반사하는 거울이자 인생 행로의 나침반이었으며, 침식(寢食)에 동행하고 희비애락을 공유하는 오랜 길벗이었다. 시인은 자신의 시를 두고 ‘말의 순례’라는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다. 이제 칠순 중반을 넘긴 시인의 생애에 있어, 시를 제외하고 본다면 다른 보람들조차 일제히 빛을 잃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의 시를 값있게 읽고 시와 더불어 헤쳐온 그의 유난한 삶에 경의를 표한다. 하나의 대상에 몰두하는 이의 실루엣은 아름답다. 항차 그것이 비유와 상징과 압축의 문면(文面)으로 드러나는 시인일 바에야 더 말할 것이 없다.
시집이 많은 만큼 거기에 담긴 시가 많고 또 시 세계도 다양 다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 차옥혜 문학의 정황이다. 그의 시를 뒤따르는 많은 평설이 있어 온 것도 당연한 이치다. 이 글이 그렇게 많은 글의 하나가 아니라, 진정으로 차옥혜의 시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뜻 있는 시 읽기가 되기를 바라는 연유로, 정성을 다해 반복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자니 점진적으로 적층(積層)되어 가는 세월의 연륜이 보였다. 후기로 오면서 더욱 유장해지고 부드러우며, 세상을 관찰하는 시각이 한결 깊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그래서 세상살이의 전 과정을 두고 지속적으로 시를 쓰는 일이 긴요함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느 누군들 그렇지 않으랴만, 그의 시는 무엇과도 비견할 수 없이 뚜렷한 그 인생사의 족적(足跡)이었다.
차옥혜의 시를 평한 논자들은 우선 그의 시가 ‘순수한 영혼의 노래’라는 데 공감한다. 그럴 것이다. 시인은 시집 『숲 거울』에서 기발한 시적 개념을 내세워 다음과 같이 썼다. “어려서부터 나무와 풀을 좋아한 나는 오래전부터 작고 작은 숲 하나 낳아 길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숲이 오히려 나를 기르기 시작했다. 숲은 나에게 때로는 어머니, 스승, 친구, 애인, 자식이 되어주기도 하고 나와 나의 세계를 환히 비추어주기도 한다.” 비단 숲만 그러할 리 없다. 시집 『씨앗의 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자서(自序)가 있다. “이처럼 끝없는 순환으로 영원히 산과 들을 푸르게 하는 것이 식물뿐이랴. 동물이나 사람에게도 죽음을 뛰어넘어 거듭 새 세상 을 끌어오는 영원한 생명의 빛인 씨앗의 노래가 있다.”
이 시집을 읽은 문학평론가 이경수 교수는 “차옥혜의 시는 따뜻하고 섬세하고 단단한 언어로 치유의 노래를 들려준다. 찬란한 생명을 틔울 씨앗처럼 목숨을 살리는 시를 쓰고자 하므로 차옥혜는 어머니의 마음이자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쓴다”고 평가했다. 이 교수는 여기에 “시를 읽으면 조수초목(鳥獸草木)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시의 효용성을 가르친 공자(孔子)를 소환했다. 이와 같은 인용문들이 말하는 것은, 차옥혜의 시가 생명을 사랑하는 근본주의적 심성에서 출발한다는 사실이다. 더불어 사람과 사물을 폭넓게 바라보는 유연한 시선으로, 작고 소박하고 소중한 것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는다는 특징적 성격을 환기한다. 자, 이제 그의 시 속으로 발걸음을 옮길 차례다.
2. ‘호밀’이 상징하는 생명의 노래
시집의 서두 「시인의 말」에서, 시인은 ‘코로나19 감염병’과 ‘기후 재앙’을 탄식하며 ‘내 영혼의 꽃밭에 핀 꽃’ 곧 자신의 시가 이 시대적 사태에 ‘눈물과 아픔’으로 반응함을 언표(言表)한다. 시인의 잘못이 아니지만 그것을 가장 절박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이다. 이 엄혹한 형국에 시인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호밀’이다. 이 이름이 등장하면, 무슨 추억처럼 어릴 때 읽은 제롬 데이비드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떠오른다. 그런데 이제 와 돌이켜보면, 열여섯 살의 홀든 콜필드가 보여주던 성장기의 불안정한 삶은 차라리 목가적이었다. 21세기로 접어든 지 스물두 해가 지난 지금, 온 세상이 재난의 물결에 잠겨 있다.
‘여름 참깨를 추수하고 난 가을밭’에 호밀을 심은 시인은, 겨울 지나 봄이 오자 ‘황홀한 초록빛’으로 출렁이는 호밀을 만난다. 호밀은 이삭을 맺는다.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처럼, 시인에게 찾아온 호밀의 사계(四季)가 ‘초록 사람들’의 힘을 환기하고, 시인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에의 꿈을 발양하게 한다. 이 시집의 1부에 실린 시들은 그러한 만남과 관찰, 의지와 회복에 관한 노래다. 시인이 심은 호밀은 봄날의 파종이 아니라 가을걷이가 끝난 밭에 심은 늦은 농사다. 그러기에 서슬 푸른 ‘눈 감옥’의 한겨울을 지나야 한다. ‘미세한 푸른 핏줄로 서로서로 깨워 온기 나누며’ 지키고 있던 호밀이, 이윽고 만유 소생의 봄을 맞는다.
봄이다
샛바람 분다
살았다 견뎌내었다 이겼다
가을에 눈떠 멋모르고 우쭐대다
폭설에 덮혀 얼음에 갇혀 죽음과 싸우며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 자만이 느끼는
환희의 깊이와 높이를
봄날에 싹터 꽃샘추위에 벌벌 떠는 새순이
매화, 산수유, 수선화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겨우내 떨며 움츠리고 얼면서도
끝내 푸른빛 잃지 않은 작은 몸이
신기하고 대견하며 자랑스러워
제 이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신나고 기쁘고 기뻐서
제 어여쁨 소리죽여 노래한다
괜찮아 괜찮아 그래도 좋아
봄날의 특권 아니냐
스스로 다독이며 힘 모은다
- 「봄 호밀」부분
시인은 ‘혹독한 겨울을 통과한 자만이 느끼는 환희의 깊이와 높이’를 봄 호밀에서 발견한다. 그는 ‘봄날에 싹터 꽃샘추위에 벌벌 떠는 새순’이나 ‘매화, 산수유, 수선화’가 그 환희를 헤아릴 수 없다고 단정적으로 말한다. 그의 호밀은 ‘제 이름을 부르며 소리 없이 운다.’ 시인은 이를 ‘봄날의 특권’이라 명명한다. 이렇게 봄 호밀은 소망(所望)의 상징이다. 소망은 희망과 어감이 비슷하나 의미는 다르다. 목표가 분명한 희망이 소망이다. 성경에서는 소망이라는 어휘를 쓰지 희망은 쓰지 않는다. 시인의 주의 깊고 성실한 관찰은 사월 초의 호밀, 이삭 맺은 호밀을 거쳐 풋거름에 이르는 호밀로 그 생장(生長)의 단계를 따라 이동한다.
지구가 더워진 탓에 빨리 이삭 맺자
농부는 풋거름 깔아 밭을 쉬게 해
내년부터 풍작 거두려고
우리 호밀밭을
이제 막 4월 하순에 접어들었는데
서둘러 예초기로 잘라 눞혔다
잘 익은 씨앗으로 영생하려던
우리의 꿈이 깨져버렸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하지 않는다
삶이 어디 뜻대로만 되든가
희망의 끈으로 마음 칭칭 감아
몸은 쓰러졌어도 마음 꼿꼿이 세워
비 맞고 햇빛에 삭아 푹푹 잘 썩어
내년에 뿌려질 어떤 씨앗에든 스며들어
세세연년 세상 푸르게 하리라
뭇 생명 먹이고 살리리라
생명의 순환 열차를 타고
희망이 밀고 가는 세계! 지구!
암, 나는, 우리는 영원히 꿈을 꾸며
언제나 희망에 사는 호밀 풋거름
- 「풋거름이 된 호밀」 전문
아하! 그런데 이 무슨 처참한 일! 호밀은 열매를 맺었는데 농부는 ‘내년부터 풍작’을 바라고 호밀밭을 예초기로 잘라 눕혔다. 인동(忍冬)의 모진 세월을 이겨온 호밀도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인은 소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만해 한용운이 「알 수 없어요」에서 노래한 것처럼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그 순환의 원리, 황순원이 「탈」에서 보여준 생명 순환의 이치를 시인은 믿고 있는 듯하다. 멸절의 호밀밭이 다시 싱싱한 푸른 생명으로 되살아나듯, 찾아보기로 하면 예쁜 새싹과 꽃과 잎새들이 천지에 널려 있다. 초록 생명과 그 어머니가 되는 ‘흙에 대한 예의’는, 차옥혜가 생명의 한 개체이자 그것을 노래하는 시인으로서 역동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다. 윤오영의 수필 「양잠설」은 양잠가에게서 문장론을 배웠는데, 차옥혜의 호밀 시편은 그에게 인생론을 가르쳤다.
3. 환경 파괴와 감염병에의 대응
누구에게나 청춘의 젊은 날이 있다. 그때는 삶의 전방 지점만 바라보며 좌고우면하지 않고 달려간다. 그러나 연륜의 경과와 더불어 생애 전반을 관조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때가 오면, 어느덧 우리의 구경(究竟)을 형성하게 한 주위의 환경을 성찰하게 된다. 이 시집의 2부에서 차옥혜가 끊임없는 탐색의 눈길과 절절한 탄식으로 제시하는 시편들은, 바로 그와 같은 시적 언어로 구성되고 채워져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는 어느 나라 어느 누구의 전유물이 아니다. 동시에 지구는 모든 나라 모든 사람의 것이다. 지구의 기후와 환경 문제에 대한 인식은, 그러므로 모두의 책임이며 누구든지 이를 보살펴야 할 의무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어쩌나 어쩌나
광대한 내 품 안 무수한 자식 중에서
가장 생명이 넘치고 아름답던
지구가 지르는 비명
어처구니없는 지구의 아수라장
가물어 불타는 숲과 마을
말라버린 호수와 냇물 바닥에
악어, 물고기, 짐승 떼의 백골들
홍수 져 물에 잠긴 도시, 폭설에 묻힌 도시
빙하 녹아 바다에 잠겨가는 나라
코로나19 감염병 2년 넘도록 세계를 휩쓸어
변이바이러스 거듭 생기고 돌파 감염 확산으로
무수한 사람들 시달리며 죽고
토네이도, 지진으로 박살 난 마을
무너진 건물더미에 깔려 울부짖는 사람들
화산 터져 용암과 화산재에 쫓기는 사람들
화산재 덮어쓴 마을과 들
- 「지구의 어머니 우주의 탄식」 부분
광대무변한 우주가 바라보는 지구는 ‘가장 생명이 넘치고 아름답던’ 별이다. 그런데 그 지구가, 지구의 환경이 멸망의 길을 걷고 있다. ‘어머니 우주’의 시각에 의하면 안타깝기 이를 데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회생의 대책을 찾을 수도 없다. ‘아비규환 지구를 살릴 열쇠를 가진 자도 지구 사람들 자신뿐’인데, 이들에게서 개전(改悛)의 정(情)이나 그 기미를 찾기가 어렵다. 이러한 환경의 질곡을 탁월한 시적 정황으로 풀어낸 비유가 ‘탄광 속 카나리아’다. 카나리아는 일산화탄소가 차서 숨 막히는 갱도 밖으로 나가기를 원하지만 아무리 몸부림쳐도 살길이 안 보인다(「카나리아가 운다」). 사정이 비슷하기는 한라산 정상의 돌매화나무도 그렇다(「돌매화나무」). 이 자학적이며 자살적인 인류의 환경 파괴는 마침내 오늘날 코로나19 감염병의 재앙을 가져온다.
구로동 코로나19 감염자 콜센터 직원은 인천에서 출근하며 몸이 아파도 결근 못 하고 업무량이 많아 화장실도 제때 못 가며 일해도 생활비가 모자라 퇴근 후 녹즙을 배달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로 음식점, 옷가게, 노점상들이 문을 닫고, 평소보다 두 배로 많아진 물량에 시달리던 한 택배기사는 엘리베이터 없는 5층 빌라 계단을 오르고 내리다 쓰러져 영영 눈 못뜨고
공장 비행기 멈추고, 학교 호텔 등이 쉬자, 쏟아지는 실직자들
이른 새벽 며칠째 인력시장에 나왔다 허탕 치고 빈손으로 돌아가는 날품팔이 가장의 발걸음
낮은 곳부터 휩쓸고 가는 감염병 홍수
- 「눈물 전염 3 - 홍수」 전문
3부에 실린 ‘눈물 전염’ 연작의 세 번째 시다. 이 시집의 3부는 이와 같이 코로나19 감염병에 대한 참상과 우려로 일관하고 있다. 사람도, 생활 상가도, 이동 수단도, 그리고 공공시설도 모두 손을 접고 속수무책으로 ‘낮은 곳부터 휩쓸고 가는 감염병 홍수’를 바라본다. 나라로 말하면 중국과 인도, 지역으로 말하면 대구와 서울동부구치소가 그렇고 심리적 상태로 말하면 절벽 앞에 선 것이다. “설날 요양병원의 어머니를 찾아온 50대 청소 노동자 아주머니는, 면회를 할 수 없어 건물 밖 땅바닥에 비닐돗자리를 깔고 건물 안 병실 보이지 않는 어머니를 향해 세배”를 한다(「눈물 전염 5 - 절벽」). 참으로 ‘봄물 든 내 몸 그만 다시 겨울’이다(「눈물 전염 6 - 봄물 들었으나」). 이 처참한 팬데믹의 시대는 과연 끝이 있을까. 이를 두고 시인은 무엇이라 말해야 할까. 그 대답은 아마도 이 시집을 관통하여 다 읽은 다음에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4. 시인의 숙명과 새 소망의 발현
일찍이 샤를 보들레르는 “시인은 주는 사람이다”라는 수사(修辭)를 남겼다. 시인이 다른 사람이나 동시대 또는 사회에 무엇인가를 공여한다는 것은, 그가 가진 정신세계의 중핵에 해당하는 무엇인가를 간접적인 방식으로 건넨다는 말이다. 우리의 시인 차옥혜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상살이의 온갖 곡절에 가슴 조이며, 그 여린 감성을 동원하여 온전한 향방을 제기한 것은 바로 이처럼 ‘주는 사람’의 책임에 충실한 사례다. 그런데 이 과정에 있어서 시인이 감당해야 하는 역할은 그야말로 형극(荊棘)의 노정(路程) 위에 있다. 시인의 몸과 마음은 세상의 모든 동통(疼痛)을 짊어진다. 그런데 그것이 시인의 사명이요 숙명일 수밖에 없다.
오른쪽 뒤 허벅지가 느닷없이 기막히게 아파서, 뼈 병원에서 다리와 척추 엑스레이 촬영해도 이상이 없어 진통 소염제 처방받아 먹었으나 통증은 점점 심해져 한밤 집안을 서성대는데 발바닥을 가시 가 찌르는 것 같아 실내화를 들여다보고 양말을 뒤집어 봐도 아무것도 없어 아픈 발 딛고 집안일 하며 연휴 끝나 뼈 병원에 다시 가려던 전날 발바닥 우연히 만지니 우둘투둘 잡히는 것 있어 들여다보니 불그레한 발진들, 피부과 병원에서 대상포진으로 판명
애초 발바닥이 신호를 보냈는데도 나는 왜 거들떠보지도 않고 한사코 무시하며 허벅지와 장딴지만 감싸고 어루만졌을까? 평생 대접 못 받고 제일 밑바닥에서 아파도 걸으라면 걷고 변함없이 나를 떠받친 발바닥!
이제야 나를 살아 있게 한 수고 많은 내 발바닥 들여다보며 미안해하다가 문득 세상 밑바닥에서 사람살이 떠받치는 분들 떠올린다 코로나19 감염병 대 유행으로 일선에서 봉사하는 공무원들 의료진들, 일 년 넘도록 세 어린 자녀들 못 보았다는 중환자실 간호사, 안전장치 없이 산업현장에서 일하다 죽거나 다친 노동자들, 지하 하수도 치우다 독가스로 질식한 분, 손발이 닳도록 사람들의 먹거리를 키우고 기르는 분들··· 헤아릴 수 없는 발바닥의 수고와 눈물 없이는 나도 세상도 없음이여
이제라도 내 발바닥에 세상 발바닥에
꽃을 안겨야 하리
해를 달아줘야 하리
- 「이제야 발바닥을 들여다보다」 전문
4부에 실려 있는 이 시의 시적 화자, 그간의 시적 유로(流路)를 보면 시인 자신일 시 분명한 화자는 ‘오른쪽 뒤 허벅지가 느닷없이 기막히게’ 아프다. 알고 보니 발바닥 대상포진이다. ‘평생 대접 못 받고 제일 밑바닥에서’ 화자를 떠받친 그 발바닥으로부터 고장이 왔다. 시인은 이제라도 ‘내 발바닥에 세상 발바닥에 꽃을 안기고 해를 달아 줘야’ 한다고 깨우친다. 그렇다. 이것이 어찌 발바닥에만 국한된 문제일까. 우리 모두 정작 수고한 손길, 오랫동안 애쓴 발바닥을 잊어버리고 산다. 어쩌면 이와 같은 작은 아픔은 하나의 축복인지도 모른다. 나를 돌아보고 내가 속한 주변을 돌보며 반성의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터이기에. 장미의 가시, 민들레 씨앗 같은 사소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객관적 상관물들이 이윽고 한 시대의 절체절명한 사건들을 올곧게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는 것이기에.
가을이 깊다
화살나무가 활활 불타며
우주를 삼키고 있다
눈부시다 황홀하다
가을 깊은 나는 어느덧
불붙은 화살나무에 빠졌으나
불붙지 못하고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호박 줄기다
겨울이 오기 전 나도
한순간만이라도
화들짝 불타고 싶어라
겨울의 입구에서조차
불타는 화살나무이던
그 사람
찬바람에 맞서가며
허공에 불씨 날려
영원히 세상 울리는
시를 새기던 그 사람
불타는 화살나무야
가을 깊은 나에게
불 좀 붙여다오
- 「불붙은 화살나무에 빠져」 전문
전태일 열사나 대구 10월항쟁 같은 시국의 사건들이, 시인의 섬약한 가슴에 울혈이 되었다가 끈질긴 소망과 당당한 주의 주장으로 일어서는 데 차옥혜 시의 비의(秘義)가 있다. 예로든 5부의 시 「불붙은 화살나무에 빠져」는 이와 같은 시인의 심사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활활 불타며 우주를 삼키는 화살나무의 표상은 ‘불붙지 못하고 여전히 말라비틀어진 호박 줄기’ 같은 나를 불붙이고 일으켜 세울 것이다. 그렇게 그의 시들은 새롭게 내일을 예비한다. 이는 또한 현시점에서 내다보는 차옥혜 시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루하루가 실로 가슴 벅찬 선물’이 되는 날이다(「하루하루가 선물이다」). ‘아프지 마요 힘내요’라고 누군가가 전하는 속삭임이다(「달빛 서린 님의 목소리」). 만약 이러한 소망의 발굴에 이르지 못했다면, 차옥혜 시의 역정(歷程)은 강력한 반탄력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껏 우리가 차옥혜의 시를 논의하면서 주목하지 못하고 빠뜨린 대목이 있다. 그의 시가 가진 여리고 예민한 서정성, 그로부터 발현되는 퇴행 불가의 호소력이다. 거기에는 ‘꽃샘바람에 옷고름과 치마폭을 펄럭이는 매화 같은 어머니’가 있고(「전주역」), 어린 시절 ‘아침 햇살이었을까, 꿈이었을까, 희망이었을까’를 되뇌이게 하는 소년도 있다(「보고 싶다」). 그처럼 숱한 그리움과 기다림, 아픔과 슬픔을 견디는 동안 ‘용기를 주고 희망을 속삭이던 등대’처럼 그의 시는 늘 그의 곁에 머물러 있었다(「등대가 그립다」). 이 순정한 서정성은 연약해 보이지만 기실 가장 완강한 힘이다. 이러한 시적 진실과 더불어 소망 가운데서 세상을 부드럽고 아름답게 바라보는 관점이 오늘의 차옥혜 시인을 추동했다. 그리고 그 힘은 앞으로의 그를 수발(秀拔)하고 존중받는 시인의 자리로 이끌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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