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인식의 뜨거움과 두 가지 표현방법
심상운
1. 들어가는 말
차옥혜 시인의 시집「허공에서 싹 트다」의 시편들은 한국 현대시의 두 가지 방법론-자신의 관념 또는 종교와 철학적 사유로부터 얻은 관념을 시의 형식을 통해서 표현하는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방법과 실제의 사물(사건)을 통해서 자신의 관념을 드러내는 선사물 후관념(先事物 後觀念)의 방법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이는 그의 시가 어떤 방법론이나 시론에 얽매지 않고 자유스럽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시작방법보다는 삶의 현실에 더 치중하면서 마음의 눈을 통하여 숨어있는 생명의 진실을 포착하고 생명감을 드러내고자 한다. 따라서 그의 시에 담겨있는 현실인식과 관념, 낭만적인 긍정의 세계는 그의 진지한 문제의식에 의해 시적 감동과 생명의식에 접근한다.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조감(鳥瞰)해 보면, 시집 1,2부에는 사람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마음이 시의 중심이 되고 있다. 따라서 다양한 내용의 시편들은 이웃들에게 펼치는 마음의 무지개로 빛을 발한다. 그 무지개 속에는 아름다운 빛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픔과 괴로움, 눈물과 욕망, 존재의 비밀과 영혼의 모습이 프리즘을 통과한 빛과 같은 언어로 표현되어 있다. 3부에는 연작시「밥」15편을 통해서 사실적인 서술 속에 삶의 냉엄한 현실과 생명에 대한 감동을 파노라마처럼 펼치고 있으며, 4부에는 자신에 대한 응시와 가까운 인연들에 대한 강물 같은 사랑의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시인의 말>에서 자신의 시를 첫눈에 비유하면서 “아! 저 첫눈! 금시 나를 환하게 하고 나를 설레게 하는 저 첫눈은, 사실 따지고 보면 대기의 온도 차로 하늘에 떠 있던 물방울들이 눈이 되어 내려오는 것인데, 녹으면 단지 시커먼 산성물에 물과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신선함과 새로움과 불가사의한 힘을 지닌다. 첫눈은 분명 차가운 것인데도 마치 내 애인처럼 나를 손가락 하나 안 대고도 나를 뜨겁게 달군다. 문학은! 시는! 나에겐 바로 이 첫눈 같은 존재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기 시에 대한 그의 이런 설렘과 진솔한 정열이 그의 시를 뜨거운 생명의식의 시로 만든 원천이라고 생각된다.
필자는 이런 관점에서 그의 시를 이해하면서 현대시의 두 가지 표현방법이 그의 시에서 어떤 시적 효과를 나타내고 있는지 나름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시편들 들여다보기
시집 1부 첫 장에 실려 있는「꽃보다 눈부신 사람」은 이 시집의 서시序詩에 해당하는 시로서 대상에 대한 관념적인 인식 방법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을 보여주고 있다.
꽃을 보기 위하여/ 먼 길가는 이여/ 오래 아파하는 이여/ 꽃을 위하여/ 오래 울고 있는 이여/ 꽃을 지키기 위하여/ 긴 세월 시달리는 이여/꽃을 보고 꽃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간이지만 언제나 아쉽지만/ 때로는 끝내 못 만나기도 하지만/ 꽃을 위하여/ 모두를 바치는 당신의 삶은/ 꽃보다 더욱 아름답다 순결하다./ 꽃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당신은/ 꽃보다 더욱 눈부시다.//
―「꽃보다 눈부신 사람」전문
이 시에서 ‘꽃’은 실제의 어떤 특정한 꽃이 아니라 관념의 비유적인 표상으로서의 꽃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꽃’이 무엇을 의미하고 상징하는가도 중요하지만 꽃을 통해서 ‘언어의 빈자리(허상)’를 생각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다. 관념의 표상으로서의 꽃은 수학의 기호 X와 다르지 않다. 이 X는 미지수 즉 빈자리의 수다. 그래서 X에는 꽃만이 아닌 신, 사랑, 생명, 희망, 꿈 등 관념어가 들어가도 되고, 하늘, 별, 나무, 바다, 산, 숲, 들 등 사물어가 들어가도 의미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언어의 기호성과도 연관이 되지만 여기서는 비유(譬喩)의 언어로 채워지는 관념공간이다. 순수한 기호로서의 언어와 관념의 비유로서의 언어는 배후에 숨어있는 의미가 있고 없음에 의해서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꽃’은 차옥혜 시인이 지향하는 관념과 사유가 표상되어 있는 상징적인 언어다.
그는 이 시에서 꽃보다 눈부신 존재는 꽃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는 당신이라고, 이상(idea)에 대한 추구와 헌신을 인간의 높은 가치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런 그의 형이상의 정신은 언어의 감각적인 영역을 거침없이 초월하는 에너지가 된다. 이런 그의 이상지향의 시에서 화자(話者)는 이미 정해진 가치와 관념의 눈을 통해서 세상과 인생의 삶을 인식하고 판단한다.「산다는 것은〮․ 2」를 읽어보자.
(앞부분 2연 생략) / 산다는 것은/ 제 안에/ 동굴 나날이 길어져 아파도/ 껴안고 쓰다듬으며/ 제 밖에/ 조팝나무 가시나무 칡 인동/ 노루귀 씀바귀 솜다리 질경이/ 산돼지 다람쥐 여우 늑대/ 여치 소쩍새 땅강아지 부엉이/ 미워도 고와도 찾아온 생명이면 무엇이든/ 품어 기르는/산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2,3연
이 시에서도 언어의 빈자리(허상)가 보인다. 조팝나무 가시나무 칡 인동 등 열거한 언어들은 모두 비유의 언어로서 실제의 조팝나무나 가시나무나 칡 인동 등과는 관련이 없다. 이 단어들 대신 다른 나무이름이나 풀이름이 들어가도 모두 허용된다. 시인은 조팝나무나 가시나무를 말하고 있지 않다. 산에 사는 생명들의 이름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고 시인은 산을 시의 대상으로 한 것도 아니다. 이 시에서 산은 비유의 대상일 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 시의 대상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관념이고 이 시는 그 관념에 대한 시인의 대답이다. 시인은 자신의 인생경험을 통하여 인식하고 사유한 것을 시의 밖에서 비유를 통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런 시에서 독자들이 감지하는 것은 비유의 언어와 시인이 들려주는 교훈적인 깨달음이다.
이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어법은 선불교에서 스님들이 화두로 사용하는 어법과 매우 유사하다. 선禪의 화두로 유명한 조주 스님의 “뜰 앞의 잣나무(庭前栢樹)”라는 말도 진리(부처)가 무엇이냐고 묻는데 대한 대답이다. 여기서 “뜰 앞의 잣나무”라고 하지 않고 “시냇가의 버드나무”라고 해도 그 답이 틀린 답이 되지 않는 이치 속에 진리가 들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잣나무도 버드나무도 언어의 빈자리가 되는 것이다. 이 어법은 이미 어떤 관념을 설정해 놓고 그 관념을 드러내는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교훈적인 깨달음을 시의 목적으로 삼을 때에도 시인의 역할이 중요하다. 시인은 무대 위의 배우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 속에 시인이 들어있지 않은 경우와 시 속에서 시인이 캐릭터의 역할을 하면서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과는 시적 감각과 효과에서 차이가 생긴다.「아마존이 나를 낚다」를 읽어보자.
지구의 자궁 브라질 마나우스 아마존 강에서 평생처음 던져본 낚시에 사람이 빠지면 금시 뼈만 남긴다는 식인 물고기 삐라냐를 오 분만에 두 마리나 잡고 탄성을 지르는데 아마존이 갑자기 나를 낚는다.
나는 아마존의 낚싯줄에 끌려, 흙색 강물과 붉은 강이 만나 나란히 흘러가며 이루는 신기한 삼색 강을 따라가다가, 아마존 강이 출산한 광활한 밀림과 생전 처음 보는 숲평선에 넋을 잃다가, 아마존 강의 엄청난 생산 능력에 놀라다가, 통나무배를 타고 밀림에서 밀림으로 재빠르게 이동하는 인디오 소녀를 따라가다가, 고요한 수로를 따라 울창한 밀림 속으로 들어간다. (중략) 아마존의 낚시에 나는 피한방울 흘리지 않았고 평안하다. 나는 끝없이 길어 나를 마음껏 자유롭게 하는 사랑의 끈 아마존의 낚싯줄을 끌고, 아마존 강을 지구의 강을 헤엄치며 아마존과 한 몸이 되어 저녁노을에 반짝이기 시작하며 노래를 부른다. (뒷부분 생략)
―「아마존이 나를 낚다」부분
이 시에는 시인의 체험이 들어있다. 그래서 시어들은 관념이 아닌 사물성의 체취를 풍기고 있으며 이미지가 생동한다. 선관념 후사물(先觀念 後事物)의 시와는 각도가 180도 다른 선사물 후관념(先事物 後觀念)의 세계다. 이 시의 언어들은 비유로 쓰인 것이 아니고 언어가 의미하는 실제의 사물 그대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시 속의 화자는 관념 속에 들어가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사물(자연) 속에 들어가서 말하고 있다. 따라서 독자들의 시선도 시 속의 시인을 따라서 이동하게 되고 시 속의 장면을 상상하면서 공감하게 된다. 이 시에서 시인은 아마존의 밀림을 영화의 화면처럼 보여줄 뿐만 아니라 대자연에 동화되어서 무한한 평화와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현대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런 선사물 후관념의 시에는 시인과 독자의 상상력이 들어갈 수 있는 무한한 공간이 열린다. 그리고 상상이 펼치는 세계는 또 다른 실제의 세계(가상현실)가 된다. 그래서 선사물 후관념은 21세기 디지털 세계의 감각을 표현하는 유효한 방법으로 활용된다.
차옥혜 시인은 이 시집의 제목으로 선정된 시「허공에서 싹 트다」에서 이 문제의 해답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여름 가을 겨울/ 처마 끝에 매달려 대롱거리던/마늘이/ 허공에서 싹 트다// 파릇파릇 마늘 싹이/ 허공에서/ 초록 눈을 반짝이며/ 세상을 구경한다/ 쪼글쪼글한 마늘이/ 말라바틀어지는 마늘이/ 제 몸의 수분을 한 방울이라도 더 짜서/ 새싹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올리려고/ 몸부림친다/ 마늘 싹이/ 허공을 깬다//
―「허공에서 싹 트다」전문
광부들이 땅 속에서 금맥을 찾아내 듯 평범한 사실 속에서 새롭고 귀하고 빛나는 생명의 모습을 찾아서 보여주는 것이 시인의 참모습이라고 할 때, 시인이 그런 장면을 관찰하여 포착하고 시로 형상화하는 정신과 감각은 시인의 두뇌 속에 간직된 관념 속에서 솟아나는 정신현상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시가 관념의 비유나 상징이 아닌 스스로 하나의 사실(사건이나 사물)로 존재해야 시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시론은 뒤집히지 않는다. 이 시는 시의 그런 독자적인 모습 즉 사물성(事物性)을 보여주고 있다.
처마에 매달려서도 싹이 트는 마늘의 모양은 시골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이 사실이다. 그런 하잘것없어 보이는 풍경에서 차옥혜 시인의 눈은 생명의 본질을 포착하여 하나의 독립된 시적 현실(이미지의 세계)을 창조해내고 있다. 그것은 시인의 뜨거운 생명의식이 이루어낸 귀한 성과다. 특히 끝 연 <마늘 싹이/ 허공을 깬다>는 구절은 절망과 허무를 극복하는 생명의 힘을 보여주고 있어서 경이로움을 준다. 그것은 과학의 물리적 경계를 넘어서는 시적 진실이다. 따라서 이 시는 선사물 후관념(先事物 後觀念)의 사실적인 표현이 시를 단단한 사물로 만들고 있음을 감지하게 한다. 이런 사물성의 사실주의는 이 시집의 3부 연작시「밥」에서도 보인다.「밥․1-굶주린 소녀와 독수리」를 읽어보자.
세 살쯤 되었을까/뼈만 남은 아프리카 어린아이가/흙집들 모여 앉은 죽은 듯 고요한 마을 앞/성긴 풀잎 삐쭉거리며/돌멩이와 지푸라기 드문드문한 황량한 들에/어른들은 어디로 가고 홀로/배가 고파 쓰러져 땅에 머리 박고 엎드려 있는데/검은 독수리가/그 어린아이의 등 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어린아이의 검은 눈동자를 노리고 있다/앞으로 쑥내민 날카롭고 무지막지한/독수리의 흰 부리가/막 그 어린아이의 등을 쫄 것 같다//나에게 창을 던지는/그러나 도망 갈 수 없는/「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의/퓰리처상 수상 사진//
―「밥․1-굶주린 소녀와 독수리」전문
이 시는 사실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시적 효과와 힘을 느끼게 한다. 시인은「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을 보고 그 사진의 장면을 사진을 찍 듯 묘사하여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이 보여주기(Showing)는 객관화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더 충격을 주고 언어의 긴장감 속에서 현실의 무서움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시인은 자신의 감정을 최소화하여, 둘 째 연에서 <나에게 창을 던지는/그러나 도망 갈 수 없는>이라고만 드러냄으로써 사실적인 이미지가 주는 충격을 잘 유지하고 있다. 만약 이 시에 시인의 정서나 관념이 더 들어갔다면 이 시의 사실성과 긴장감은 그만큼 흐려졌을 것이다. 이 시는 한 컷의 사진이지만, 사진 속의 절박한 상황이 안고 있는 긴장감과 시인의 연민의 마음이 정서가 되어 흐른다. 그는 그 ‘마음을 도망갈 수 없는’ 마음 즉 양심이라고 한다. 연작시「밥․2-자본의 불랙홀」에서도 신문 기사화 같은 사실적인 표현으로 아프리카 아이들이 21세기 노예가 되어 팔려가는 현실을 고발의 메시지로 전하고 있다.
250명의 어린이를 태운/ 아프리카 어린이 노예 밀수선이/ 입항이 거부되자 체포가 두려워 교신을 끓고/ 2001년 4월 16일 바다를 떠돌고 있다//
―「밥․2-자본의 불랙홀」1연
이 시는 시의 형식에 구애를 받지 않고 간결한 경제적인 언어로 사실의 전달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미적형식에서 벗어나 자신의 시적 진실을 인류의 양심 속으로 확장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의 밑바닥엔 용암같이 뜨거운 시인의 마음이 들어있다.
이 밖에도 서사형식(敍事形式) 속에 담겨있는 6,25의 기억- 어린 시절 시골 친척집에서 보낸 1950년대 시골 여름밤의 풍경이 아늑하게 느껴지는「밥․3-기억 속 행복한 풍경」이나, 소년병으로 지원하면 가족들에게 쌀 한 가마 준다는 말에 얼어터진 발로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눈길을 떠나간 열두 살 소년의 이야기(밥」․5-열두 살 오빠의 호두나무와 쌀 한 가마) 등은 과거의 시간 속에 들어 있는 사건이지만 생생한 사실성과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체험의 기억(사실성)이 존재의 바탕이 되기 때문이다.
3. 나가는 말
시집「허공에서 싹 트다」에 실린 대부분의 시편들은 생명에 대한 희망과 긍정적인 이미지, 인간적인 삶에 대한 진지한 문제의식과 생명추구의 의지로 가득하다. 따라서 현실에 대한 고발성의 메시지 시에도, 관념을 앞세운 정신지향의 시에도,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발견한 사물성의 시에도, 어린 시절의 기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나는 시에도 생명의 푸른빛이 묻어난다. 그 빛은 허무를 극복하는 그의 정신세계의 에너지이며 잠재의식 속에 들어 있는 낭만성의 발산이라고 생각된다.
차옥혜 시인은 그 낭만성을 자신만의 주관적 정서 속에 가두어 두지 않고 ‘생명지향’라는 넓고 높은 정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언어의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의식의 세계 속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시는 그만의 독특한 시 형식이 구축되지 않아서 일반적인 서정시들과 크게 구별되지 않는다. 이것은 그의 시에 개성적인 형식의 구축이라는 과제를 안겨준다. 그래서 이 과제를 염두에 두고 그의 시의 구조를 살펴 볼 때, 그의 시에서 연역적 형식 즉 선관념으로 의미의 한계가 결정지어진 시어보다 귀납적 형식인 선사물의 시에서 더 언어의 생동감과 시적 상상력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 관찰된다. 그리고 그런 시가 안고 있는 시적 생명력을 감지하게 된다. 그것은 선관념의 시와 선사물의 시 중에서 어떤 시가 더 사과나 배처럼 싱싱하게 감촉되는 생명감(시의 존재성)을 갖게 되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을 준다.
필자는 이 시집 속에 들어 있는 차옥혜 시인의 뜨거운 눈물과 연민, 치열한 생명추구의식을 귀하게 평가하면서, 그의 시가 드러내고 있는 시의 형식적인 면에 시선을 두어보았다. 그리고 그의 시를 포함하여 ‘한국 현대시의 지향점’을 생각해본다.
<시문학 2008년 8월호 138-145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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