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눈 같은 시인의 영혼집
이보숙(시인)
차옥혜 시인은 성급한 겨울을 이끌며 오는 차가운 첫눈이 시인의 마음을 오히려 뜨겁게 달구듯이 옷 벗은 거리의 나무들의 맨몸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낙엽을, 늦은 밤 귀가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시이기를 마음으로 기원하며 시를 쓰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첫눈은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함과 새로움과 희망을 느끼게 하는 불가사의함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시인의 말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차옥혜 시인은 1984년에 『한국문학』 으로 등단한 후 1995년 〈경희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매우 부지런히 시를 써온 시인이다. 이번에 상재한 시집『허공에서 싹트다』가 그의 여덟번째 시집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은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몹시 사랑하고 아끼며 사물 하나하나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안에 존재하는 신으로부터 오는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달리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간절하기 그지없고 인간의 불행한 모습에 눈물겨워하는 모습이 시집에 가득 담겨있다.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탓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꽃을 보기 위하여
먼 길 걸어가는 이여
오래 아파하는 이여
꽃을 위하여
오래 울고 있는 이여
꽃을 지키기 위하여
긴 세월 시달리는 이여
꽃을 보고 꽃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간이지만 언제나 아쉽지만
때로는 끝내 못 만나기도 하지만
꽃을 위하여
모두를 바치는 당신의 삶은
꽃보다 더욱 아름답다 순결하다
꽃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당신은
꽃보다 더욱 눈부시다.
-「꽃보다 눈부신 사람」 전문
시인들은 모두 저마다의 꽃을 위하여 날마다 가시밭길을 마다않고 가고 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우려고 피를 흘리며 가슴을 조이며 밤잠을 설치며 때로는 기가 죽어 이마에 주름마저 깊어진다.
영국의 대 시인 워즈워드가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라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의 시는 차 시인이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등댓불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어두운 등대지기여
내 밤바다 등댓불을 끄십시요
나도 어두어져
당신의 어둠과 하나 되어
당신의 밤바다 등대지기가 되겠습니다
당신의 밤바다에 내가 등댓불을 지피고
내 밤바다에 당신이 등댓불을 지피면
당신과 나에게 밤은 없으리
세상에 어둠은 없으리
-「등대지기」부분
차 시인은 또 삶에 대해서도 매우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싫든 좋든 해롭든 이롭든 삶은 우리 인생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며 묵묵히 받아드려야 할 과정인 것이다. 그는 묵묵히 생을 지고가며 깊고 큰 산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제안에
동굴 나날이 길어져 아파도
껴안고 쓰담으며
제 밖에
조팝나무 가시나무 칡 인동
노루귀 씀바귀 솜다리 질경이
산돼지 다람쥐 여우 늑대
여치 소쩍새 땅강아지 부엉이
미워도 고와도 찾아온 생명이면 무엇이든
품어 기르는
산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2」부분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인의 목적은 이익이나 교훈을 주는 일, 또는 기쁨을 주는 일과 인생에 어떤 유익한 교훈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또는 작은 농장을 운영해 보기 위해 서울에서 좀 떨어진 농원에 집을 짓고 종종 내려가 농사일도 하고 정원도 가꾸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그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시를 쓰곤 할 것이다. 그는 작은 것에서도 진리와 기쁨 그리고 슬픔도 간과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쪼글쪼글한 마늘이
말라비틀어지는 마늘이
제 몸의 수분을 한 방울이라도 더 짜서
새싹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올리려고
몸부림친다
마늘싹이
허공을 깬다
-「허공에서 싹 트다」부분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몸속의 모든 영양분으로 만들어진 젖을 먹여 아이를 길러내며 자신은 점점 쪼글어드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시인은 글을 통하여 종종 구도자의 역할을 한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슴을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 시는 하나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세상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려
세상 집을 잃은 이여
오라 숲으로
각시붓꽃 할미꽃 제비꽃 패랭이꽃 초롱꽃
어느덧 너의 부서진 집 다시 지어놓아
너를 편히 쉬게 하며
너도 이 꽃 저 꽃으로 피어나
네가 어여쁘다 속삭인다
세상 비에 젖어
꿈을 잊은 이여
오라 숲으로
별개미취 더덕 도라지 송이버섯 쑥
어느덧 땅 속 깊은 열기 퍼 올려
너를 보송보송 말려
새처럼 나비처럼
꿈을 물고 날아오르게 한다
-「오라 숲으로」 부분
시인은 또한 매우 인도주의적인 시인이다. 그는 세상 구석구석 어두운 곳에 등불을 비추고 싶어한다.
세 살쯤 되었을까
뼈만 남은 아프리카 어린아이가
흙집들 모여 앉은 죽은 듯 고요한 마을 앞
성긴 풀잎 삐쭉거리며
돌멩이와 지푸라기 드문드문한 황량한 들에
어른들은 어디 가고 홀로
배가 고파 쓰러져 땅에 머리 박고 엎드려 있는데
검은 독수리가
그 어린아이의 등 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어린아이의 검은 등을 노리고 있다
앞으로 쑥 내민 날카롭고 무지막지한
독수리의 흰 부리가
막 그 어린아이의 등을 쫄 것 같다
나에게 창을 던지는
그러나 도망갈 수 없는
「수단의 굶주린 소녀」 라는 제목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
-「밥. 1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부분
차옥혜 시인의 기억 속에는 네다섯 살적 한국 전쟁이 각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집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불행의 단면을 빼 놓을 수 없다. 또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 시절은 지금은 별미가 되어있는 꽁보리밥, 그 한 숟갈 얻어먹기도 어려웠던 배고프고 굶주렸던 때였다.
두 살 난 아기 등에 업고
임신한 몸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팔
빨래비누 머리에 이고
논둑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 야단맞고 발 동동거리며
싸리대문 앞에서 울고 있는 다섯 살배기 내가 가엾어
여치와 메뚜기가 발등을 간질이는지도 모르고
뜸북뜸북 뜸부기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아니면 어머니 눈에
붉은 맨드라미 가득 피어 쓰라렸을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아름다운 서른세 살 어머니가
내 마음 논둑을 아프게 걸어가고 있다.
-「밥. 4 ―서른세 살 우리 어머니」부분
차옥혜 시인의 시는 참으로 읽기 쉽고 편안하다. 그는 시에서 철학을 논하려고 하지 않고 미사여구를 쓰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깊은 감정의 골을 느낄 수 있고 아픔과 희열의 강물이 넘쳐남을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부담 없이 그의 시는 읽혀진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시가 가볍거나 무게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서정적인 미술작품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어 그의 시 앞에 머리가 숙여 진다. 차옥혜 시인의 가슴에 넘치는 시심이 많은 독자를 계속 울려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문학과 창작 2008년 가을호 213-219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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