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이 되어 길을 찾다
이보숙(시인)
2009년 차옥혜시집 「허공에서 싹트다」의 리뷰를 쓴 것이 어제 일 같은데 그새 시인은 아홉 번째 시집을 또다시 상재했다. 참으로 부지런한 시인이다.
차옥혜 시인은 1945년 전주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영문과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후 7권의 서정시집과 1권의 서사시집, 1권의 시선집을 출간한바 있고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여 년 전 시인은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사는 것보다 흙냄새를 맡으며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풀과 냇물과 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유기농법으로 나무와 화초와 야채를 기르느라 육체가 삭아 들어가는 각고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 삽자루와 호미를 던져버리고 그 곳을 떠나고 싶은 갈등을 수없이 겪은듯하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뿌리고 심은 식물들이 푸릇푸릇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며 감격과 환희를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식물의 주인 행세를 하였으나 차츰 그들의 어머니 형제 또는 자식이 되는 것을 느끼며 식물의 마음을 지니게 되면서 식물자체가 되어버렸다고 시인은 서문에 쓰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시인은 문득 식물은 신이 인간에게 읽히고 싶어 흙에 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밭과 정원은 시인이 식물글자로 세상을 향해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시를 쓴 황토밭 원고지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황토밭 원고지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야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후에도 보살피지 않으면
제멋대로거나 사라지지만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이다
언제나 설레고 아름답고 편안한
숨 쉬는 생명시이다
옷은 황톳물과 풀물로 얼룩지고
호미 들고 동동거려 팔다리가 쑤셔
볼품없이 늙고 여위어도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것이 즐겁다
어느 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 지 어언 20년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지금 내 몸과 영혼의 집이 어여쁘다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전문
시인은 밭과 들에서 식물을 재배하면서 자연스레 시를 쓰게 되고 들녘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소리를 듣는다.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평안을 느끼며 우주를 안은 듯한 희열에 잠긴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을 바라본 시인은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에 추수하는 식물들을 임신한 여인이 10 달 만에 귀한 아이를 얻는 산모에 비유하고 있다. 당당한 승리자가 되어 영생과 안식의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실제로 두 아들을 낳아 훌륭히 키워놓은 시인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시인의 종교철학이 배어있는 시를 읽어보자.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멀리서 베토벤의 「제9번 교향곡」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을걷이 끝난 들녘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들린다
누렇게 마른
콩대, 깻대, 도라지 꽃대, 더덕 줄기, 토란대
호박 줄기, 고춧대, 참취, 벌개미취, 해바라기, 볏짚
새 생명을 낳은 산모들이
영원으로 대지로 우주로 귀향하며
기쁨에 넘쳐 부르는 노래 노래
마음과 영혼으로 듣는
소리 없는 합창
한여름 힘겨운 임신과
몸서리치는 산고는 옛 이야기
가벼워진 몸으로 당당한 승리자의 눈빛으로
영생과 안식의 집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세상을 이어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들의 소리 없는 노래
가을 벌판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듣는다
-「마른 껍질들의 합창」 전문
시인은 또한 식물에서 인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을 본다. 삶의 고뇌와 번뇌를 겪어내지 않고는 인생을 이해할 수 없고 삶의 강물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맨몸으로 눈보라를 견디고 가물에 목말라본 나무는 모든 시련을 이겨낸 사람 또는 시인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픈 가슴을 훑어내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서러움을 토해내는 시인만이 아름다운 훈장을 받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 년에 200일 이상 비가 와
일 년 내내
몸이 자라고 나뭇잎이 노래하는
적도 부근에 사는 나무들은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는
백팔번뇌를 겪은 나무에게
맨몸으로 눈보라를 견디고
가물에 목발라본 나무에게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아는 나무에게
하늘이 주는 훈장이다
내 몸에서
나이테를 찾아보는 가을 날
자꾸만 눈이 시리다
-「나이테」전문
시인은 애쓰고 힘써서 일하면 신은 열 배 백 배 보상해 준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그녀는 시에서 신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시의 여백에 그런 철학이 담겨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시인은 식물에 대한 사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식물 속에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진실함에 기뻐하고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편지까지 그들에게서 받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인의 세계에 필자도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풀과 나무만 보면 설레고 좋아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어대니
새, 다람쥐, 여치, 매미가 와서 살고
꽃은 나비와 벌을 데리고 줄지어 찾아와
저절로 한 세상이 열렸다
나무나라 지키려 하루에 땀 한 말 쏟으니
평화는 서 말로 오고 사랑은 다섯 말로 솟아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다움뿐이다
나무와 풀이 나를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제 몸에 벌레를 잡아 달라 하고
웃자란 머리칼을 예쁘게 깎아 달라 한다
나무와 풀은 저희들을 돌보느라
애면글면 일하는 내가 안쓰러워
어머니 드세요 하며
싱싱한 열매와 잎을 듬뿍 내밀고
나에게 우주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쓴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 봐」전문
시인은 동식물에 대한 사랑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 어린이나 여인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 흘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시인은 보금자리 잃고 우는 짐승의 모습에서 아메리카 신대륙 원주민들의 애환을 떠올리고 슬퍼하며 달동네 철거민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차옥혜시인은 시집에서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모습 외에도 병들어가는 지구의 문제, 남성과 대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의 문제, 그늘에서 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 등 많은 것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차시인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쉬운 필체로 어려운 문제들을 열심히 웨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함께 고민 해볼 일이라 생각 된다. 차옥혜 시인이 더 아름답고 강인한 시집을 곧 또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열심히 식물을 재배하며 추수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시인이 더욱 건강키를 기원한다.
<문학과 창작 2010년 여름호, 262〜267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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