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면탐색의 키워드
유한근 (문학평론가ㆍ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교수)
1.
시인은 자연이나 사물에 자아를 의탁한다. 그것은 보편적인 시작법이다. 누구도 알 수 있는 결과물을 도출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의 내면 깊숙이 내밀하게 은폐되어 있는 정서나 의식을 탐색해 낸다는 것은 민감한 일이며 주관적 판단일 수밖에는 없다. 특히 자연친화상상력에 의존해서 형상성을 구축하는 시인에게는 그러하다.
차옥혜 시인의 시세계를 탐색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시인의 다양한 시각과 광범한 상상력 때문이다. 하지만 시인의 시를 이해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시 〈사막에 없으나 있는 것〉에서 탐색해 볼 수 있다.
볼 것 없는
민둥산과 황막한 빈들에서
나는 보네
내 마음에 흘러드는
강물을
내 마음에 들어차는
밀림을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쓸쓸한 허공에서
나는 듣네
내 마음을 적시는
풀잎 말을
없으나 있는
내 마음 계곡 물에서 목을 축인
한 마리 작은 새가
사막을 건너가네
-시 〈사막에 없으나 있는 것〉 전문
이 시의 키워드는 ‘없으나 있는 것’과 ‘사막을 건너가는 작은 새’이다. 이 키워드가 차옥혜 시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인지는 아직 나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키워드와 모든 시들이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을 것이라는 기대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시 〈사막에 없으나 있는 것〉에서 “없지만 있는 것”은 시인의 마음에서 목을 축이고 가는 ‘작은 새’이다. 그렇다면 이 ‘작은 새’의 정체는 무엇인가?
이 시의 경우, 1연은 시각적 상상력으로 시인은 황막한 민둥산과 빈들에서 자신의 마음에 흐르는 강물과 밀림을 본다. 그리고 2연에서는 청각적 상상력으로 쓸쓸한 허공에서 시인의 마음을 적시는 풀잎의 말을 듣는다. 그렇다면 시인이 보고 들은 것을 탐색해낼 때, 우리는 차옥혜 시인의 시를 이해하게 되고 그 마음의 비밀, 그 열쇠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없을 것으로 짐작하고, 알고 있으나 있는 것, 그것의 정체를 파악해야 한다.
시인도 철학가처럼 인간의 삶을 파악하는 방식을 존재양식과 관계양식으로 한다. 존재양식은 자아성찰이나 언어 혹은 사물의 본체 규명을 할 때 차용하게 되고, 관계양식은 살아가는 방법론과 인간과 관련된 여타의 것과의 관계를 통해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해명하기 위해 차용하게 된다. 전자는 언어 인식이나 철학적 혹은 종교적 상상력으로, 후자는 사회역사적 상상력 등으로 탐색하게 된다. 차옥혜 시인의 위의 시의 키워드인 ‘작은 새’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는 내 마음 속에서 보고 듣고 목을 축이고 사막을 건너간다는 이미지를 통해 존재양식을 통해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작은 새와 사막, 작은 새와 민둥산과 빈들, 그리고 강물과 밀림과의 관계양식 또한 고려해야할 국면이다. 시인은 “내 마음 속 계곡 물”을 “없으나 있는”것으로 인식한다. 그것을, 목을 축이고 사막을 건너가는 작은 새로 혹은 어떤 존재로 인식한다. 그 존재는 시인 자신일 수도 있고 다른 무엇일 수도 있다.
또 다른 한편의 시를 보고 이해해 보자.
나무는
해바라기이면서도
평생 해를 등지고 있는
제 그림자가 아프다
나무는
제 발 밑에서만 서성이며
끝내 말 한 마디 못 하는
제 그림자가 안타깝다
나무는
한 번도 일어서지 못 하고
꽃 한 번 못 피우고
땅에 납작 엎디어 사는
제 그림자가 안쓰럽다
나무는
어둠뿐인 제 그림자가
종내는 제 모습 같아 서럽다
-시 〈나무와 그림자〉 전문
이 시에서의 시적 자아는 ‘나무’이다. 시인은 나무가 되어서 “제 그림자”를 탐색한다. ‘해바라기’라 제 그림자가 안타깝고, 안쓰럽고, 아프고, 서러운 나무. 그 나무라는 사물을 자기화해 제 그림자의 정체를 파악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나무라는 존재를 인식하려는 시가 이 시다. 그림자를 시인은 “끝내 말 한 마디 못 하는” “한 번도 일어서지 못 하고/꽃 한 번 못 피우고/땅에 납작 엎디어 사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렇게 은유적 표현 구조로 된 존재는 어떤 시각으로 보는가에 따라 변별적으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시 〈나무와 그림자〉에서의 ‘그림자’는 시인 자신의 다른 모습,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점은 자명하다. ‘사막을 건너가는 작은 새’와 같이 시인은 또 다른 존재로 설정되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들의 존재는 무엇일까?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내 책상에 펼쳐놓은 노트에서 옷을 벗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
일곱 가지 색깔이 나란히 사이좋게 반짝이는
색동 몸이다
햇빛의 아름다운 몸을 가만히 어루만지니
어느덧 햇빛이 부피도 무게도 없이
내 손등 위에 있다
세상에 가득하면서도
제 자리나 집이 없다
올 사람들의 영혼이 그러할까
떠난 사람들의 넋이 그러할까
무엇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과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는
햇빛을 닮으면
내 몸도 무지개가 될까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이 될까
내 노트 위에서 쉬고 있는 햇빛의 맨 몸이
손가락 하나 안 대고
나를 사로잡는다
-시〈햇빛의 몸을 보았다〉 전문
시 〈햇빛의 몸을 보았다〉는 햇빛의 정체를 알았다는 의미의 제목이다. 햇빛의 몸은 햇빛의 본질, 본체를 의미한다. 햇빛의 무지개 빛의 아름다운 몸. 부피도 무게도 없는 햇빛.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과 함께 하며, 자유로운 햇빛. “제 자리나 집이 없”지만 세상에 가득한 햇빛. 그 햇빛을 닮으면 자신의 몸도 무지개가 되고,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이 되기를 희구하는 시인. 그 시인의 노트 위에서 맨 몸으로 쉬고 있는 햇빛. 그 햇빛의 정체는 무엇일까? 시인을 사로잡는 그것은 어떤 존재일까? “올 사람들의 영혼” 혹은 “떠난 사람들의 넋”이 그러할까를 의혹하는 햇빛이라는 존재. 그 존재 또한 많은 답이 가능하다.
영국 비평가 엠프슨(William Empson)은 ‘ambiguity 이론’을 전개한다. 그에 의하면, 시는 ‘ambiguity’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는 방법론까지도 그는 소개한다. ‘ambiguity’는 애매모호성으로 번역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번역되든 그 의미는 시어의 다의성, 시 문장의 애매성, 은유와 상징의 표현구조, 그리고 시의 비의秘意성까지를 포함한 의미로 수용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에서 의혹해하고 있는 ‘작은 새’ ‘그림자’ ‘햇빛’이라는 키워드는 다의성을 지니게 하는 은유적인 언어구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밤바다에 환히 불 밝힌 오징어잡이 배는/제 불빛 안이 세상이지/제 불빛보고 치달려와/그물에 걸리는/오징어 떼만 생각하지/제 불빛 밖/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것/모르지/어둠 속에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모르지/어둠 속에서도/길을 가고/제 집 제 사랑을 잘도 찾아가는/마음의 빛을 /모르지/밤바다 오징어잡이 배는/제 환한 불빛으로/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것/보지 못하지//밝아서 눈 먼/오징어잡이 배/나 그리고 너
-시 〈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 전문
시 〈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의 시적 자아는 ‘오징어 배’이다. 불 밝힌 오징어 배이다. 제 불빛 안이 세상인 오징어 배는 오징어 떼만 생각한다. 다른 것은 모른다. “제 불빛 밖/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것”을 모른다. “어둠 속에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까만 눈동자를”, “어둠 속에서도/길을 가고/제 집 제 사랑을 잘도 찾아가는/마음의 빛을” 모른다. 그리고 “제 환한 불빛으로/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음의 빛”과 “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 것”을 보지 못한다는 부분이다. 이 또한 다의적이다. 다분히 불교적인 인식이다. 그것은 지혜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고, 어둠과 밝음이 하나라는 “명암일여明暗一如”의 사상일 수 있다. 어둠 속에는 빛이 있고, 빛 속에는 어둠이 있다는 역설적인 논리가 이 시 속에 깔려 있다. 이러한 역설인 시는 〈나는 모르겠다 2〉에서도 볼 수 있다. “그 겨울나무를 나무라고/돌을 돌이라고/말하면서/왜 그의 음성이 떨렸는지” 그리고 “왜 나는 감격했는지/나는 모르겠”으며 “칠흑의 밤이/새벽을 품고 있다는 것을/왜 믿게 되었는지” “나는 모르겠”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의 백미는 마지막 연 “나무를 나무라고/돌을 돌이라고 하는 말/가만히 되뇌어 보면/내 가슴에서/왜 새소리가 나는지/나는 모르겠”다는 토로가 그것이다. 여기에서도 ‘새소리’가 의미하는 바 그 정체가 모호하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서, 시 〈어둠에서 어둠으로 빛나는〉에서의 ‘오징어 배’의 정체는 시인은 “나 그리고 너”라고 인식한다. 우리 모두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의혹하는 ‘작은 새’ ‘그림자’ ‘햇빛’ 그리고 ‘새소리’도 그렇게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2.
시인은 자연친화의 시선에서 인간에게 눈을 돌릴 수 없다. 자연친화적 상상력의 은유적 표현구조가 모호하기 때문이지만, 문학의 본령이 인간과 삶의 본체 혹은 본질을 드러내는 창작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차옥혜 시인은 내면 탐색을 위해 인간에게 시선을 돌린다.
사람이 절망이다//시간이 가고 날이 가고 해가 가도/무성한 나뭇잎으로도 가려지지 않는/장대비로도 씻기지 않는/바람으로도 날아가지 않는/겹겹 쌓인 해골에 서린 공포//부모 앞에서/야자나무 몸통 송곳처럼 솟은 마른 잎줄기에/아기 두 발을 잡고 죽을 때까지 쾅쾅 쳐서 던졌다는/아내를 세워 묶어놓고 남편의 행방을 말하라고 /전기 드릴로 뒷머리를 후볐다는 /캄보디아 킬링필드//세계 곳곳 킬링필드//사람이 절망이다
-시 〈킬링필드〉 전문
시 〈킬링필드〉는 굳이 설명할 여지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캄보디아 폴 포트의 급진 공산주의 정권 크메르루주가 1975∼79년 동안 양민 200만 명을 학살한 20세기 최악의 참혹한 사건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역사적 사건의 비극성을 킬링필드에 한정시키지 않고 “세계 곳곳”으로 확대 이해하며. “사람이 절망이다”는 인식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시 〈흙을 향한 노래―산당화〉에서는 시대적인 모티프에 따라 한국의 구로 공단으로 가져온다.
구로 공단에 취직한 딸이/기계에 손가락이 잘려/영등포 어느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전화를 받고/점례네 엄마는/마당에 쓰러져/어서 가야 하는데 어서 가야 하는데/정신없이 중얼거리기만 해/용길이네 할아버지가 경운기에 태워/버스길까지 데려다 줬는데/몇 발짝 사이로/한 시간에 한 번 읍내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길섶에 주저앉아/어쩔거나 어쩔거나 신음소리 내며/애꿎은 당신만 두 손으로 탕탕 치다/산당화가 되었습니다.
-시 〈흙을 향한 노래―산당화〉 전문
위의 시의 시간적 배경은 킬링필드와 같은 동시대인 70년대이다. 그리고 정치적인 상황에서 경제적인 상황으로 변용한다. 공간적 배경은 캄보디아에서 구로공단으로 이행된다. 또한 다른 점은 〈킬링필드〉에서는 “사람이 절망이다”라는 인식에서 “산당화가 되었”다는 인식으로 바뀐다. 미당의 선운사 동백꽃이 한 많은 아낙의 육자배기 소리에 의해서 피듯이 공순이인 딸과 점례네 엄마, 그리고 용길이네 할아버지의 신음소리와 한탄이 산당화로 피었다는 시적 변용으로 계승한다. 산당화는 일명 명자나무라 불린다. 그 꽃은 화사하고 아름답다. 향기 또한 은은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밝고 편안하게 해준다고 한다. 그리고 달콤한 향기는 방향제로서 가치가 있으며 약용과 식용으로도 사용한다. 이 시는 그리 절망적이지만은 않다. 희망적이다. 시 제목인 〈흙을 향한 노래〉가 의미하는 바, 만물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땅, 흙을 향한 산당화의 노래인 만큼 민중들의 신음과 한탄이 헛되지 않다는 의식을 갖게 한다.
껍질만 남아 있던 사랑마저도 떠나고/뒤틀린 등과 저승꽃 핀 얼굴과/아무리 가리려 해도 다 드러나는/휑하게 뚫린 못 생긴 가슴만 남았습니다./젊은 날 아름답던 그림자를 두고 온/그 언덕과 해변과 거리를/되새김질할 위장도 헐어버렸습니다./온몸이 얼음덩이입니다./나는 무엇을 보며 살아왔습니까./이제 의지할 것은 내게 걷어채고 짓밟히면서도/ 내 불거진 뿌리를 꼭 잡고 버틴/당신뿐입니다./그동안 내가 기댄 것은/바람벽이 아니라/당신뿐이었습니다./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나마저 나를 버리고서야/나는 돌아갑니다/당신에게/나는 껴안습니다/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엇인/침묵이면서 소리인/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 당신을.
-시 〈고목 ―편지ㆍ1〉 전문
시 〈고목-편지‧1〉의 시적 화자는 ‘나’인 고목이다. 시인은 고목을 자기화하여 ‘당신’에게 편지를 쓴다. 이 시에서 ‘당신’은 “바람벽”이 아닌 “내 불거진 뿌리를 꼭 잡고 버틴”, 그리고 내가 돌아가야 할 ‘땅’ 혹은 ‘흙’이다. 이 시에서는 ‘당신’의 존재를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엇인/침묵이면서 소리인/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 존재로 인식한다. 침묵과 소리가 하나인 존재. 죽음이고 생명인 존재. 흙이라는 이미지를 이렇게 인식한다. 이것도 다분히 불교적이다.
바슐라르는 《대지와 휴식의 몽상》에서 “우리가 추억의 집에서 살려고 하면 현실세계는 단숨에 사라져 버린다. 우리가 고향집을, 절대적인 내밀성內密性의 집을, 그리고 우리가 내밀성에 눈을 떴던 집을 머릿속에 떠올리게 된다면 큰길가의 집들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고향집은 꿈의 집이며, 우리의 몽상의 집이다”라고 말한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고향집과 관련된 중요 이미지들인 배, 동굴을 살핀다. 나무에게 있어 고향집은 대지이다. 흙이다. 오두막집이 우주의 중심인 것처럼 고목의 집은 흙이다. “불거진 뿌리를 꼭 잡고 버틴” 흙이다. 안식 혹은 휴식할 수 있는 흙이다. “죽음 인듯하면서 생명”인 흙이다. 저승꽃 핀 얼굴, 휑하게 뚫린 가슴, 헐어버린 위장, 얼음덩이 몸으로 돌아가 “아무것도 아닌 듯” 침묵할 수 있는 곳은 흙이다. 그 흙 혹은 대지에게 고목이 보내는 편지투의 시가 위의 시이다.
고통을 거치지 않은
평화는 없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영생은 없을까
어둠을 찢고 나오지 않은
빛은 없을까
어머니의 눈물 먹어야
피가 도는 지구여
-시 〈피에타∙1〉 전문
시 〈피에타∙1〉도 ‘대지와 휴식과 몽상’과 관련이 있다. ‘피에타’란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성모 마리아가 죽은 그리스도를 안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말하는 것으로 이탈리아어로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뜻이다. 이 조각상은 기독교의 표상이지만 죽음과 부활, 그리고 대지와 휴식과 무관하지가 않다. 위의 시의 키워드인 ‘평화’ ‘영생’과 ‘빛’과 깊은 유기적 연관성이 있다. 그것을 차옥혜 시인은 이 시의 마지막연 “어머니의 눈물 먹어야/피가 도는 지구여”로 형상화한다. 대지를 어머니, 나아가서는 ‘어머니의 눈물’로 그리고 “피가 도는 지구로”로 역동적인 생명으로 은유한다. 그리고 시〈밥 ․ 3-행복한 풍경〉에서는 어머니를 시골집으로 혹은 생명을 표상하는 ‘밥’으로 인식한다.
한 편, 시 〈길을 내시며 길을 가시는 아버지〉에서는 아버지의 삶을 ‘대지’ ‘흙’의 다른 물질적 상상력으로 표현한다.
자주 홍수가 나던 황야/길 없는 벌판에 길을 내시며/헤매는 이들의 손목을 잡고/길을 가시는 아버지//삶의 굽이굽이 가시밭 길목마다/아버지의 상처에서 피어난 꽃들이/내 넋을 깨우고/나를 향기롭게 하고/내 마음을 열어/뒤 뜰 풀 한 포기의 한숨소리를/바위 틈 다람쥐의 흐느낌을/듣게 하며/발아래 있는 하늘도 보게 하여/내가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게 합니다.//낮은 데로 낮은 데로 흘러/마른 나무들의 뿌리를 적시는/아버지의 강물이/가문 내 마음 밭에/완두콩도 열리고/감자 꽃도 들깨 꽃도 피게 합니다.//언제나 아침이신 아버지/저녁에도 아침같이/세상을 살라 하십니다.//나는 아직도 아버지의 집으로/돌아갈 줄 모르는/모래바람 속을 헤매는 철부지 탕아지만/아버지께서 언제나 대문에 켜놓으신/초롱불 빛 보고/동서남북 방향을 헤아립니다.//오늘도 길 없는 황야에 길을 내시며/길을 가시는 아버지/아버지의 길은 내 가슴 벌판에 환하고/끝내는 나도 가야 할 길입니다.//백발이 나부껴도/오늘도 정정한 걸음으로/길 없는 벌판에 길을 내시며/길을 가시는 아버지.
-시 〈길을 내시며 길을 가시는 아버지〉 전문
이 시에서 ‘아버지’는 “내 넋을 깨우고/나를 향기롭게 하고” “내가 삶을 노래하는 시인이게”한다. 또한 “아버지의 강물이/가문 내 마음 밭에/완두콩도 열리고/감자 꽃도 들깨 꽃도 피게”하고, “저녁에도 아침같이/세상을 살라 하”는 ‘아침’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집으로/돌아갈 줄 모르는/모래바람 속을 헤매는 철부지 탕아지만/아버지께서 언제나 대문에 켜놓으신/초롱불 빛 보고/동서남북 방향을 헤아”리게 한다. 바슐라르의 집이 표상하는 바, 대지에 길을 내시는 존재로 시인은 아버지를 인식한다. 아버지를 이렇게 표현한 시를 나는 여태 본 적이 없다. 아버지의 길은 나에게 있어 나침반이었으며, 시인이 가야하는 길임을 인식하게 해주는 존재인 셈이다. 휴식의 공간인 대지로 가는 길을 내시는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생명의 끝이고 생명의 시작인 셈이다.
3.
나는 이 글의 서두에서 ‘없으나 있는 것’과 ‘사막을 건너가는 작은 새’라는 키워드를 화두처럼 던졌다. 그리고 그것이 차옥혜 시 전편을 관통할 것인가에 의혹을 가졌다. ‘없으나 있는 것’이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불교적 상상력으로 조야하지만 설명이 있었으나, ‘작은 새’라는 키워드에 대해서는 유보했다. 이제 그것에 대해 집중해야 할 차례다.
새 한 마리 빠르게 날아와
거실 큰 유리창에 부딪쳐
순간 땅에 떨어져 죽었다
오라, 오라! 손짓한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을 향해
기쁨으로 전 속력을 다해 질주했는데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고 선
보이지 않는 유리창
유리창에 반사 된 허상의 유혹에
목숨을 잃어버린 새
죽은 새 위로
유리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날아가는
또 한 마리의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
갑자기 나는 더듬대고 머뭇거린다
-시 〈새와 유리창〉 전문
차옥혜 시인은 거실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 한 마리를 보게 된다. 이것이 이 시〈새와 유리창〉의 발상 모티프다. 그 새는 손짓하는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을 향해/기쁨으로 전 속력을 다해 질주”한다. 유리창에 반사된 허상들의 유혹에 목숨을 잃게 된 것이다. 시인은 유리창을 비켜 날아가는 또 다른 한 마리의 새에 대한 행방을 궁금해 하며, 자신의 길을 되새긴다. “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 “더듬대고 머뭇거린다”. 여기에서 달리던 환한 길은 아버지가 길을 내고 밝혀놓은 길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머뭇거리는 것은 허상을 쫓다가 죽은 새 때문일 것이다. 시인은 “이 벌판 가녀린 풀잎으로/흔들리는 것이 서러워/흐느끼는 풀에게/네가 바로 하늘이”(시 〈바람 바람꽃-서시〉에서)라고 말할 줄 아는 시인이다. “어제 죽고 오늘 죽은 풀들/내일 다시 태어나고/눈보라에 떠난 풀들/봄날에 다시 돌아”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풀은 “죽지 않는 생명”이며, 자신은 “영원히 이 벌판을 지키”는 바람임을 아는 시인이다.(시 〈바람 바람꽃-서시〉에서)
‘사막을 건너가는 작은 새’는 허상을 쫓다가 유리창에 부딪쳐 죽은 새인지도 모른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꿈을 좇는 새이다. 사막을 건너야 하는 작은 새. 그 새는 인간 군상들이다. 시인 자신만을 이야기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차옥혜 시인이 내면 탐색을 위해 설정한 키워드는 새인지도 모른다. 그 작은 새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존재에 대해 우리가 부단히 탐색해야 할 모티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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