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최후, 환희의 시작?

  박찬일(시인, 평론가)

 

누구나 단 한 번뿐인 경우로 살다가 단 한 번뿐인 경우로 죽는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 여러 단 한 번뿐인 경우들 중에서도- 단 한 번뿐인 경우가 있는 것이다. 단 한 번뿐인 경우 중의 단 한 번뿐인 경우가 있는 것

이다. 예를 들어 한 번 불행을 겪은 자가 그 불행을 겪은 죄로 계속 불행이 반복되는 벌을 받는다면, ‘불행의 영겁회귀라면.

불행의 영겁회귀를 겪는 자가 불행의 영겁회귀를 빠져나가려면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재생만이 통로다. 재생만이 불행의 영겁회귀를 끝장낼 수 있다. 이 불행의 영겁회귀를 감쪽같이지울 수 있다. 다시 불행의 영겁회귀가 시작된다 해도 그것은 다른 질료의 영겁회귀. 다른 불행의 영겁회귀는 괜찮다. 이 불행의 영겁회귀만은 참을 수 없다.

차옥혜 시인이 그렇다. 차옥혜 시인은 재생을 희망한다. 재생을 요구한다. 그는 단 하나 뿐인 경우의 불행 중에서도 단 한 번뿐인 불행을 겪은 자 같으므로 재생을 요구한다. 희망한다. 그럴 자격이 있다. “캄캄하기 전에는/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말할 수 있으랴”(달맞이꽃)라는 말은 캄캄함을 겪은(혹은 겪는) 사람의 말. 다음의 시는 고통의 최후 환희의 시작!’이라며, 고승들이 깨우치고 나서 부르짖는 로 들린다. 

 

그러나 나는 미로 같은 터널을 빠져나가/기필코 다시 태어나리라/다시 흙 깊숙이 뿌리박고/내 몸 구석구석에/반짝이는 물방울 불러오리라/내 몸에 싱싱한 푸른 잎 다시 솟아/하늘에 입 맞추며 꿈꾸며/살리라

무말랭이에게 다시 푸른 잎이 돋게 한 시인! 무말랭이에게 재생을 수여한 시인! 이러한 재생의 요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아무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통의 극단에 오랫동안 처해 있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는 거칠 것이 없다. 그는 자연스럽다.

잃어버린 좋은 일이 다시 반복되기를 바라는 것도 고통의 극단을 경험한 자의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고통의 극단에 오랫동안 처해 있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다. 그는 거칠 것이 없다. 그는 자연스럽다.

잃어버린 좋은 일이 다시 반복되기를 바라는 것도 고통의 극단을 경험한 자의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고통의 극단을 경험한 자만이 행복함이 무엇인지를 안다.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안다. 고통을 겪지 않은 자들이 어찌 알랴. 행복함이 무엇인지를, 행복했던 때가 언제였는지를. 사형수가 사형장까지의 길을 걸을 때 사형수에게는 가장 행복했던 장면이 떠오를 것이다(저절로!). 혹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저절로!). 사형장까지의 길을 걸을 때, 최후의 최고의 고통을 겪을 때 비로소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는지를 안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를 안다.

시인은 고통의 절정을 경험한 자 같으므로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 행복이 다시 재현되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누구인들 떠난 연인이 똑같은 모습으로/다시 돌아오기를 바라 지 않으랴

-부활 

생명이 다시 태어나기를 희망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생명이 태어나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생명이 다시 이어지는 것만큼 기쁜 일이 있을까. 황홀한 일이 있을까. 

 

어릴 때 뺑소니차에 머리를 다치고/치료를 못 받는 영호가 [……] 아 지랑이 아른대는 개나리 꽃길 따라/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가버렸다./영 호네 어머니는 [……] 옆집 강아지를 보고/아들 왔다고 울다/새가 날아가자/영호가 간다고 이름 부르며/나비가 되어 훨훨 따라간다.

-나비가 된 아들과 어머니

 

늙고 병든 부모님도 다시 철쭉꽃 얼굴로/하늘빛 받을 수 있을까/처녀 같은 어머니가 다시 와/다홍치마 펄럭이며/아장거리는 나를 걸음마 시킬 수 있을까/청년 아버지가 돌아와 어린 나에게/단단한 세상의 문 열어줄 수 있을까

-11월 철쭉밭에 철쭉꽃 피어

 

시인의 시편들에는 고통을 겪은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달관의 세계 또한 나타난다. 

 

나 쓸쓸하고 텅 비어/비로소 자유 가운데 있으니/이제는 나 여기 있다 고/말하지 않으리

-고목이 내게로 왔을 때

 

고통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넘어 죽음까지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닌가. 기꺼이 몰락해주려는 자의 자세가 아닌가. 죽음을 자유로 파악하는 경지가 아닌가.

그래서 시인의 시편들을 관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형체 없는 것에 대한 염두이다. 서시 햇빛의 몸을 보았다의 가운데 시행은 올 사람들의 영혼이 그러할까이다. 문맥상 이것은 올 사람들의 영혼이 형체가 없지 않을까라고 읽힌다. 미래의 인간은 지금의 인간과 다르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는 것. “떠난 사람들의 넋처럼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것. 시인은 뒤이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떠난 사람들의 넋이 그러할까/무엇에게도 구속되지 않고/모든 것과 함 께 하면서/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는/햇빛을 닮으면/내 몸도 무기개가 될 까/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이 될까/내 노트 안에서 쉬고 있는 햇빛의 맨 몸이/손가락 하나 안 대고/나를 사로잡는다 

바로 다음의 절편 눈사람에서도 이러한 정조는 유지된다. 시인은 마음도 없손도 발도 없는 눈사람 같은 것을 그리워한다. 심지어 

 

나는 무엇을 보며 위로 받고 사는가.

나는 누구의 눈사람인가.

눈부신 하얀 허물을 벗으면

시커먼 산성 물인 것 알면서도

눈사람 없이는

겨울 길을 걸어갈 수 없구나. 

 

라고 읊는다. ‘겨울 길이라는 것은 고통의 길에 대한 은유이다. 차옥혜 시인에게 삶은 고통의 길이다. 고통의 길에 눈사람과 동행할 수 없다면 그 고통의 길마저 걸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고통의 길에 실체가 없는(혹은 형체가 없는) 에 대한 염두가 없다면 그 고통의 길마저 걸어갈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실체가 없는 눈사람이 없다면 무엇을 보며 위로 받고 사는가, 라고 한 것 아닌가. 그 고통의 길이 대체 어떤 고통의 길에!? 살아있으면서 실체 없는 삶과 동행해야 하는가. 그럴 수도 있는가.

담배 한 갑에는 스무 개피의 자유가 들어 있다. 스무 번을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차옥혜 시인은 이러한 자유를 연필에서 본다. 만년필과 볼펜은 지워도 흔적이 남아 족쇄가 되”(연필)지만 연필은 열 번이고 백 번이고/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까. 연필은 끊임없이 키를 낮춤으로써 소멸에서도 당당하다. “당당하게 소멸한다. 낮추는 자는 당당하게 소멸한다? 다시 시작할 줄 아는 자만이, 자유할 수 있는 자만이 당당하게 소멸한다?

 

<시와시학 2001년 여름호, 261-265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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