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

                    - 차옥혜의 시세계 -

임헌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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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1986)에서 차옥혜는 종소리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진동시키며 멀리멀리 아름답게 울려퍼지려면 먼저 종이 좋아야겠지요.”라고 말한다. 차옥혜 시의 종소리는 마치 비 내리는 축축한 황무지에서 젖은 몸으로 대지를 호미질하는 수도녀의 육성처럼 깊고 멀리 울린다. 이 시인은 황무지에서도 풍요를 수확할 수 있는 예지와 투지를 함께 지닌 채 고통스러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음을/감사하겠습니다.//어두운 소리들이 허우적이는 시궁창에/내 귀도 빠지게 하소서/그리하여 함께 썩고 썩어 /발효하여/가스로 훨훨 날아가/하늘이 되게 하소서//괴로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3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 1990, 수록,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전문)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이 모든 존재에 대하여 귀를 열고 있는 건 곧 우리 현실에 대하여 어떤 편견이나 기득권도 버린 채 객관적인 위치를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그것이 냉철한 비판적인 자세이기보다는 따스한 모성애를 바탕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는 열린 귀뿐이 아니라 마음 전체가 그러함을 아래 시는 보여준다.

 

기쁨만 아니라/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희망만 아니라/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가진 것만 아니라/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승리만 아니라/ 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건강만 아니라/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

―『깊고 먼 그 이름수록, 기도 2전문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고 도전적이기까지 한 자세를 차옥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육화시킨 것이 아니가 싶을 만큼 비로 오는 그 사람에 실린 아버지두 편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런 대담성은 제2시집 서사시 바람 바람꽃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에서 감지되는 차옥혜의 신앙적 감성이나 우리 시대의 한 전범처럼 맺어진 부부의 인연 맺기와 이를 바탕한 가정생활의 영향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너는 부른다./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깊고 먼 그 이름수록,서시개구리전문)이라는 소망을 가득 담은 이 울음이야말로 차옥혜의 은은한 쇠북의 종소리일 것이며, 그 소리는 햇살 따스한 인생의 봄날보다는 음습한 역사의 계절인 가을에 더욱 멀리 울려퍼질 것이다.

이 시인의 소우주에는 깊고 먼 그 이름겨울보리비 내리는 날연작이나, 비로 오는 그 사람, 아름다운 물, 비를 기다리는등에서처럼 황무지를 적셔줄 생명의 원천인 수분을 갈구하는 기원과 투지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설사 대지가 아무리 메말라도 겨울보리처럼 그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뿌리의 생명력은 충분히 성장에 필요한 수분을 흡수하고야 만다는 악착스러움이 차옥혜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은 제4시집 발 아래 있는 하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2

초기 시집이 지녔던 사변성이 일상적인 삶 속으로 융해된 채 보다 보람된 생활과 인생의 본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로 바뀐 제4시집은 이 시인이 그간 고뇌를 거듭한 끝에 다다른 황무지로부터의 탈출, 혹은 황무지에서의 풍년제의 소망을 담아낸다.

내 가슴이 비좁아/숨막혀 못 살겠다고/네가 홀연히 떠나/종적을 감추자/나는 황무지가 되었다./우러르는 하늘마저/나를 외면하고/종일 모래바람만 분다.”(전문), 1988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시가 추방당한 시대에 황야를 개간하는 이 시인의 끗끗한 겨울 나무 같은 의지와 섬세함이 공존한다. 시인은 시가 없어서만 황야가 아니라 설사 시를 부활시킨대도 우리 현실은 황야임을 전제로 하면서 그 북바친 하소연을 이렇게 토론한다. 

 

머리채는 하늘에 잡히고

발목은 땅에 묶여

빛과 어둠의 채찍을 번갈아 맞으며

둥둥둥 울고 있는 북아

뿌리쳐라

하늘과 땅을 뿌리쳐

네 뜻대로 굴러

네 울음 울어라

―「전문 

 

앞의 시집들이 종소리였다면 이제 제4시집은 끝내 북소리로 바뀌었는데, 종소리가 높든 낮든 안온한 화평과 여유를 동반하는데 비하여 북소리는 급박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시 형태나 기교에서는 약간 풀어진 느낌을 지녔으면서도 역시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차옥혜의 느긋함 속에 감춰진 황야에서의 씨뿌리기 작업의 긴박성이 내비친다.

현실과 삶 그 차체가 어둠이고, 어둠이 보기 싫어서/벽을 쌓다 보니/내가 그만 어둠이 된다는 이 시인은 피를 흘리고/하루를 잃을지라도/내가 흘리는 눈물만이/어둠을 씻어내리니/내 체온만이 어둠을 녹여내리니”(어둠)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이 시인이 오늘의 삶을 어둠이라고 진단 내리는데는 하류층과 상류층 여인의 하루 생활을 대비시킨 두 여인의 하루나 방직회사 여공의 소박한 꿈을 그린 김성희와 같은 현실인식의 측면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원초적으로 갈등과 모순의 반복으로 보는 이 시인에게는 산다는 것은/먼지가 쌓이는 일이다./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산다는 것은)로 풀이된다. 그래서 차옥혜에게는 삶의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이 인생의 참다움에로의 승화이며 그것은 황무지에 풍년제를 올리는 환희에 해당된다. 그 과정에서 이 시인은 때로는 종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다급하면 북을 치기도 한다. 그 북치기 작업은 이 시인에게 생존경쟁을 위한 싸움이자 그 싸움을 중단시키려는 평화의 호소이기도 하다. 

    3

모든 아룸다움 중에 으뜸은/생명이니/생명을 지키기 위하여/싸움 아닌 것이 있느냐”(눈이 오는 날엔)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지닌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리로 으르렁대는 현실진단을 간과함과 동시에 바로 그 뒷구절에 이어지는 눈이 오는 날엔/우리의 상처마저/아름답구나에서 다툼을 멈추게 하려는 시인의 평화에의 기원을 전달 받는다.

생명체란 떠나야/사는/불붙은 맨발”(바람)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은 황야에 선 겨울고목이라도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그 존재의 보람을 과시함을 보여준다. 

 

겨울고목은 사상을 한다.

엄숙하고 깊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겨울고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목은 엄청난 사상의 힘으로

하늘을 빨아들이고

나를 삼킨다

그러자 나도 애닯고 장엄한 고목이 되어

사상의 힘으로

언 땅을 뚫고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대지를 빨아들인다

수맥을 마신다

아 모처럼 배가 부르다

―「겨울고목전문 

 

갈등과 모순에 찬 삶, 즉 황야에 내던져진 그 각박하고 척박한 조건에서도 뿌리가 있음으로써 나무는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배를 불릴 수 있다는 진단은 바로 이 시인이 자주 등장시키는 움직임, 바람의 이미지와 물, , , 바다의 의미와 상통한다.

이 시인은 생명의 투지력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위에 든겨울고목과 는 달리, 수세미 줄기를 잘라 그 수액을 먹는 사람을 향하여 내 피를 마시니 좋으냐고 빈정거린다./하기야 저희들끼리도 약한 자의 피땀에/빨대를 대고 사는 족속들인데 라며 조롱한다.”(잘린 수세미꽃이)는 것은 생명력의 경쟁이나 잔인성 혹은 비인간화를 상징한다. 바로 이런 생명력, 잡식성 지배욕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경고를 위하여 이 시인은 노동자농민의 핍박스런 현장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에 도식적으로 집착하지는 않으나 인간주의적인 애정을 보내는 입장에서 차옥혜는 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를 추구한다. 

 

황토흙을 받아/텃밭에 깔아주고/땅을 뒤집어/헌 흙과 새 흙을 뒤썪는다/헌 흙은 텃세도 하지 않고/새 흙을 받아들여/금새 한 몸이 된다/어디 저희끼리 만이랴/그래서 하늘을 날던 새들도/땅 위를 헤매던 짐승들도/종내는 흙에게 안기는 것이리라”(흙은 흙을 거부하지 않는다전문) 

우주 만상의 존재 일체가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태, 상대를 거부하지 않고 평화로이 수용하는 상태를 이 시인은 발 아래 있는 하늘로 상징화한다. “가지와 잎과 꽃이 한 그루 나무이듯이/발 아래 있는 하늘과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하나이고/그 하늘과 나와 당신이/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발 아래 있는 하늘)는 깨달음은 가깝고도 멀며, 쉬우면서도 어려울 수 있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이 경지에 이르러 인간과 삼라만상은 명실상부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으며 시인은 좌절과 슬픔보다 환희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체화와 조화는 신명풀이의 만남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단을 이 시인은 내려준다. 연작들이 제시하는 세계는 갈등과 증오가 뒤엉킨 만물들이 사랑의 매개로 만나서 화해와 일체화에로 승화하는 과도기 모습이다.

목숨의 허물을 벗었어도/떠나지 않아라/뜨겁고 괴로웠던 황무지에/사랑 있어/춤으로 살며/거듭거듭/물이 되는 넋이여”(3)라는 환희의 순간은 만남 사랑의 절차를 요구한다. 

 

천년 화석으로

마주본들 무엇하리

석불로 나란히 서서

눈비 맞은들 무엇하리

 

멀리 있어도

얼굴을 몰라도

마음이 만나야

만남인 것을

벌거벗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얼음 안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불이 된다네

―「만남전문 

 

황무지를 만나가 내리는 땅으로 바꾸려는 꿈은 시인의 영원한 작업이며, 그 노정에 차옥혜 시인도 동참한다. 이 시인은 모든 존재의 만남을 사랑이란 의전절차를 거칠 것을 강조하며, 이점 역시 많은 시인들과 닮았다. 그런데 차옥혜는 그 만나는 장소를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닌 발 아래의 하늘로 잡았다는 점에서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생명력의 영원한 원천인 대지를 상징하며, 이런 시인의 의도는 흙을 향한 노래연작에 여실히 드러난다.

대지에 뿌리 내려 사랑으로 만난다는 것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가차없는 항의와 비판이자 바람직스럽지 못한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그렇다. 차옥혜의 시는 하늘과 땅이 만나 사랑하는 관계로 이어주고, 그 사랑을 대지 깊숙이 묻어 생명력을 번창하게 만드는 종소리이자 북소리이다. 울려 퍼져라, 대지를 향한 복음이여.

 

<임헌영 문학평론집 우리 시대의 시읽기290-297쪽에 재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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