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에 뿌리를 둔 생명체들
박이도(시인ㆍ경희대 교수)
1
시인이 노래하는 것은 무엇일까
오늘에 와선 노래하는 차원보다는 생각하는 차원의 작품이 많이 나온다. 시의 형식도 주정(主情)의 방법보다는 주지(主知)의 방법이 압도하는 시대이다. 문명화된, 즉 지식, 과학, 산업화의 다원적 사회에서 현대인의 정서의식은 단조롭고 여유 있는 전원풍의 것은 아니다. 도시의 그늘에서 굉음에 시달리고 범죄의 소굴에서 잠시도 벗어날 수 없는 피해의식과 경계의 긴장감에 싸여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긴장 속에서 인간이 꿈꿀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상황에서의 탈출이요, 해방의 기대뿐이다. 시는 현대인의 이런 기대를 어느 정도 충족시킬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차옥혜의 『흙바람 속으로』는 이에 좋은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시인 차옥혜는 <삶의 모태인 흙의 근원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흙과 흙의 분신인 흙사람들을 순례>하기 위해 찾아 나선 것이다. 이것은 이 시집의 시적 대상과 그 대상에 대한 접근 자세가 분명하다. 그 접근 방법은 두 가지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흙을 바탕으로 한 자연, 고향 내지 모든 생명체의 순환 원리인 원형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또 하나는 그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살아가는 흙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그 삶의 애환을 체험하는 것이다.
2
길을 가며
민들레와 씀바귀와 노루귀와 앵초와
이야기한다
활활거리는 나비와 껑충대는 여치와
발발거리는 개미와 파르륵대는 딱정벌레와
노래한다
물방개와 모래무지와 물옥잠과 물총새와
인사한다
-「흙사람 1」 부분
이 작품은 시의 형식이나 기교의 묘미를 벗어나 사실에 충실한 독백의 서술이다. 소위 무기교의 기교성이 돋보인다. 여기서 돋보인다는 차원은 작품 전체가 특정상황이 순연하게 드러나 그것으로 인한 새삼스런 사실들을 자각하고 혹은 추억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불러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향수성에 대한 각성인 것이다.
흙 속에 뿌리박은 민들레에서부터 하늘을 날으는 나비와 기타 곤충들 그리고 물 속에 서식하는 물방개 따위의 이름대로 하나하나 기억해 떠올릴 수 있는가. 작품을 읽는 자에겐 옛 유년의 추억을 떠올리며 사뭇 긴장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 나열된 이름들은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한국인이라면 모두 친근한 이름이다.
흙이 몸이 되고 물이 핏줄이 되는 자연의 일원으로 이 이름들은 사람과 함께 살아온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현대인의 삶에선 누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 시골에서 농사짓는 농부들까지도 농기구와 그 이름을 잃어버렸고 또 잃어버린 것이 많은 오늘날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면 농경 사회에 뿌리를 두었던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볼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리 가리려 해도 다 드러나버리는
훵하게 뚫린 못 생긴 가슴만 남았습니다.
… (중략) …
그 동안 내가 기댄 것은
바람벽이 아니라
당신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나를 버리고
나마저 나를 버리고서야
나는 돌아갑니다
당신에게.
나는 껴안습니다
아무것도 아니 듯하면서 무엇인
침묵이면서 소리인
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
당신을.
-「고목-편지․1」 부분
참깨를 뿌리고
고추를 모종하려고
삽을 들고
등을 활처럼 휘어
밭고랑을 만들며
땀을 비 오듯 흘릴 때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 (중략) …
당신의 피가 내게 흐르고
당신의 심장이 내게서 뜁니다.
내 몸에서 새싹 돋아납니다.
-「땀을 흘릴 때 - 편지․5」 부분
「흙사람」 연작시에서 잊혔던 많은 이름을 되살릴 수 있다면 「편지」 연작에서는 생명의 근원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삶이 어떤 삶인지, 그리움이 어떤 것이고, 농사짓기와 그 풍습이 어떠했는지를 떠올릴 수 있다.
「고목 - 편지․1」은 질베르 뒤랑이 말한 <상징적 상상력>이 잘 드러나는 보기가 된다. 상징적 상상력이란 인간 영혼 자체의 변증법적인 활동을 구성하는 것을 뜻한다.
부제가 고목(古木)이다. 고목을 대상화하고 이중적(二重的)인 상징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 하나는 생물학적인 역할을 하는 고목의 죽음이다. 그 고목의 죽음을 두고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죽음과 시간의 재생적 기능을 창출해 낸다.
<아무리 가리려해도~못 생긴 가슴만 남아>있다는 부분의 죽은 고목은 죽음과 죽은 시간, 즉 정지된 정(靜)사진으로서의 무의미한 풍경이 들어올 뿐이다. 이 풍경을 통해 발동하는 상상의 끝은 그 고목이 푸른 잎을 거느리고 싱싱하게 살아 있던 지난 시간, 즉 죽은 시간에의 풍부한 재생이다.
이 같은 재생의 상상력은 동시에 시의 화자와 고목 사이에 무언의 교감을 나눈다. 이 무언의 교감은 심리학적인 교감에 해당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면서 무엇인/침묵이면서 소리인/죽음인 듯하면서 생명이고 삶인/당신을>이라고 하는 대목은 고도의 심리사회학적인 균형의 회복을 의미한다. 이 작품을 통해 죽은 고목과의 교감을 이루어 내는 상상력의 가능성을 읽게 된다.
「땀을 흘릴 때 - 편지․5」에선 설화적인 알레고리를 볼 수 있다. 알레고리란 대개 설화나 종교적인 담론에서 비롯된 것인데 문학에서도 설화화(說話化)된 알레고리 양식으로 정착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흙이 터가된, 농경의 역사를 통해 <당신의 얼굴을 보았습니다>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선언한다. 여기서 <얼굴>은<당신의 피가 내게 흐르고~내 몸에서 새싹 돋아납니다>고 알레고리화되고 있다. 즉, 농사짓기의 과정이 시간적 변화에 따라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 동화(同化) - 관계가 <내 몸에서 새싹 돋아>난다로 전환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인용한 두 편의 작품은 흙의 문명사와 그 문화의 주역인 인간의 순수성을 상상하고 의식하기에 충분한 것이다.
「시월벼 - 편지․9」에서는 벼가 화자가 되어 벼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풀어간다.
허공을 휘어잡고
바람을 끌어안고
따가운 햇살에도 소낙비에도
노여움에 불타는 얼굴 뻣뻣이 쳐들고
하늘로 훨훨 날아가고 싶어
초록잎새 끝없이 푸덕였습니다.
―「시월벼 ― 편지․9」부분
순연히 벼를 의인화시켜 생각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혹은 신에 대한 인간적인 겸허이다. <뿌리치고 싶던 당신이/정작 내가 이르고 싶던 하늘이었음을>이나 <당신에게 다가가고 싶어/날마다 더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고 고백하고 있지 않는가. <시월벼>와 우리 인간의 삶과 생각에 차이도 없음을 절감해 보게 되는 것이다.
바다가 허리까지 차는 비탈에도
저녁을 준비하는 마을이 있다 ― (가)
목선들이 그물을 거두어 돌아오고
헤엄쳐도 헤엄쳐도 땅 끝에 닿지 못한
슬픈 섬들이 노을 속에서
신비한 광채를 뿜는다. ― (나)
낮은 집들은 불을 밝히고
섬마을들은 별이 된다. ― (다)
한없이 바람에 귀를 씻기며
아침을 기다리는 마을이 있다. ―(라)
― 「땅끝」부분
개나리꽃 진달래꽃 방긋대는데
떠나간 아들은 돌아오지 않고
앞산에서 뻐꾸기만 운다.
감자 꽃 밤꽃 흐드러지는데
떠나간 딸은 소식 없고
무너진 싸리 울타리 너머 종달새만 운다.
채송화 봉숭아 한창인데
떠나간 친구는 돌아오지 않고
비 내리는 하늘에 제비 떼만 바쁘다.
들국화 갈꽃 피는데
떠나간 님은 캄캄하고
벼락맞은 고목에서 까치만 운다.
청솔 가지에 눈꽃이 눈부신데
빈 집 뜨락엔
청둥오리 그림자만 지나간다.
― 「그 마을」 부분
「땅끝」과 「그 마을」은 시적 구성상 모두 마을이 배경이 되어 있다.
「땅끝」에서 (가)에 나오는 〈마을〉을 사람으로 바꾸고, (나)의 〈목선들〉을 역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다면 어떻게 됐을까. 보다 구체적인 인정의 끈을 붙잡아 낼 수 있었겠지만 이 작품에선 의도적으로 개인이 화자가 되는 것을 피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들간에 짜여지는 인정, 고향이라는 정황, 쉽게 다다를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 등으로서 개인보다는 집합적 정황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의도적인 구성으로 보인다. (가)에서 〈저녁을 준비하는 마을〉이나 (라)의 〈아침을 기다리는 마을〉 등은 강렬한 계시적(繼時的) 암시를 하고 있다. 마치 조병화의 「의자․7」에서 보는 〈먼 옛날 어느 분이/내게 물려 주듯이〉,〈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그분을 위하여/묵은 의자를 비워드리겠습니다〉등등의 대목이 연상되기도 한다.
시에서는 생략과 비약이 구성의 중요한 역할을 해낸다. 「땅끝」은 계시성에 의해 작품의 상상력을 제고시키는 매력을 지녔다.
(가)와 (라)에서는 시제가 객관화되어 기대심리를 유도한다. 정서상 밝고 긍정적이어서 기대감이 크다. (나)에서는 〈~광채를 뿜는다〉고 하여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선 〈슬픈 섬들〉에 대한 안부(安否)와 과거지향적인 어둠과 부정의 서정을 떠올리게 된다. (다)에서는 과거시제로 이미 성취된 기대치로 정적(靜的)인 안정을 누리게 된다. 이 작품은 연을 구별하지 않고 시제상의 변화로 상상력에 활력을 주고 있다.
「그 마을」은 떠나간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을 분명한 계절의 변화로 드러낸다. 그러니까 헤어짐에서 오는 아쉬움과 그리움의 정서가 계절에 실림으로써 유유히 흐르는 강물처럼 장구한 세월의 경험이 새 시기처럼 순환되어 오는 것이다.
이 작품은 연에 따라 봄, 초여름, 여름, 가을, 겨울의 주기를 돌아가고 있다. 마지막 연에서는 떠나간 이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전지적 시점으로 화자(話者)가 빠져 버린다. 화자마저 떠나버린 빈 마을을 떠올리게 된다.
3
차옥혜는 흙에 묻혀 사는 사람들, 고향 사람들, 혹은 과거지향적인 추억의 주인공들을 하나하나 시의 마당으로 이끌어 내고 있다.
「당산나무」의 권영일씨, 「춘봉이」,「도시에서 온 편지」속의 정순이, 「양계장의 닭」의 정숙이네 어머니, 「코스모스 꽃잎을 띄우며」의 철수네 엄마 등에서는 도시와 농촌, 빈․부, 정신적 허세와 주눅, 또는 문명의 개방성과 폐쇄성 등에 얽힌 인간 탐구의 시편들이다.
서울서 사장이 된 사람도 있다는데
공부는 잘 했다면서
자식들 높은 학교도 못 보내고
비 새는 지붕은 비닐로 덮어 돌로 눌러놓고
반듯한 양복 한 벌 구두 한 켤레 없이
온천구경 한 번 못하고
요모양 요꼴로 사는 게 무엇이람
―「당산나무」부분
까치설날 중학교 동창생 분순이가
가죽잠바 남편이 몰고 온 자가용 타고
초등학교 다니는 두 아들과 함께
동네 어구로 들어선다
두엄지게 지고 길옆으로 비켜선
노총각 춘봉이
반가워 꾸벅 인사를 하자
멋쟁이 분순이 외면하고 지나가
친정 집 대문 안으로 들어간다
… (중략) …
한 번 더 두엄을 나르려고
분순이네 친정 집 앞을 지나가는
춘봉이의 지게엔
땅거미만 가득하다
-「춘봉이」부분
인용한 작품들은 이야기식으로 산만하게 이어져 시적 구성의 묘미는 부족하다.
그러나 이 시집의 서문에서 지적하고 있는 바 〈흙과 흙의 분신인 흙사람들을 순례〉하는 의도의 일환으로 볼 때 이 작품 하나하나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갈등을 읽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과학문명의 그늘에서 한국적인 특수성이랄 수 있는 단기간에 이뤄진 산업사회로의 전환 과정에서 일어나는 사람들의 갈등 요소들이 드러난다. 도시와 농촌의 빈․부의 격차나 여기에서 비롯되는 여러 가지 정신적 갈등 요인들을 우리의 농촌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일까.
「당산나무」의 권영일씨나 「춘봉이」의 춘봉이가 겪는 갈등, 그들이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의 벽 따위가 작품을 읽는 이로 하여금 안쓰럽고 또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참 예쁘죠 오삭오삭 맛도 좋아요
우리를 화나게 하는 것은 들이 아니잖아요
죽을 때까지 버텨 볼 거예요“
라고 말하며
고된 농사와 세상살이가 어쩌지 못한
맑고 고운 눈으로 활짝 웃는다
―「덕봉리 아주머니」부분
어두운 현실, 절망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는 자기 삶을 긍정하고 순응하는 소박한 심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우리 아들 상수 장가 좀 보내 줘/이젠 버스 운전기사가 되었으니 농사꾼 아니야〉라고 애원하는 〈상수네 어머니〉나
보리밥이 별미라고
땀 뚝뚝 흘리며 먹는 동안
엊그제 물꼬 때문에 멱살 잡고 싸운 사람들
어느덧 형님 아우 부르며 소곤거리고
함께 나누어 먹는 밥그릇 안으로
넓은 세상이 모여들어
까르륵 까르륵 웃음소리 저녁놀에 번진다
―「복날 보리밥」
등에서 흙에 묻혀 사는 농부의 소박한 인정을 발견하게 된다.
아흔네 살 박실 영감님
능소화 울밑에서
낫을 간다
쉰 넘은 손자가
산소에 풀 베고 온 지 열흘도 안 됐는데
며칠 더 있다 가십시다
애걸해도
베고 돌아서면 솟는 게 여름풀인데
네 할아버지들 풀 속에 빠져 답답할 거야
막무가내로 낫을 간다.
―「박실 영감님」부분
한 세상을 다 사신 아흔네 살의 박실 영감님의 이야기에서 사실적인 서술이 실제감으로 다가온다. 조상들의 인정, 특히 유교적 효(孝)의 일상적 인정이 가까이 와 닿는다. 마치 할아버지가 숫돌에 물을 얹어 낫을 가는 정경과 그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에 살거나 농촌에 살거나 꼭 같이 흙에 대한 고마움, 고향에의 그리움 혹은 실향감에서 오는 소외감 따위를 잃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옥혜는 이런 의문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해동문학 1998년 여름호 286면-294쪽에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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