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 속에 짓는 집

  홍정선(문학평론가)

 

    1.

이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 필자는 몇 가지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변명이라기보다 필자의 나쁜 버릇에 대한 참회라고 해야 더 올바른 말이 될 것 같다.

차옥혜 시인의 원고를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6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로 출판사로부터 해설 원고를 써줄 것을 부탁 받은 지 4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 엄청난 시간 동안에 필자는 시집 뒤에 붙일 한 토막의 글을 쓰지 못해서 마냥 헤매고 있었다.

원고가 늦어지는 동안 처음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엎치고 겹쳐서 그렇겠거니 하고 시인과 출판사 모두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5공 청산 문제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국민들처럼 양측은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지만 필자의 원고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시인 쪽에서 도리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차옥혜 시인의 바닥 모를 순수함이 낳은 그 같은 불안감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었으며, 문제는 필자 개인에게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 머리 속으로는 끝없이 글을 쓰고 지우고 했지만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좋게 말하면 기독교 문제에 대한 직장에서의 심각한 좌절감이 이 시집을 통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볍게 마주 대할 수 없는 원고에 대해서는 마냥 시간을 끄는 평소의 버릇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즈음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의 말을 빌리면(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들어서 박해자의 대열에 선) 기독교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직장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의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제의적인 기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차옥혜의 시는 필자에게 갈등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차옥혜의 시에 나타나는 기독교와 그녀의 시로부터 우러나오는 품성은, 소설가 정찬의 말을 임의로 이 자리에 잠시 도용한다면, <사랑의 군중을 거느렸고><그럼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생생히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었던> 예수, 앞에서 이야기한 지라르의 예수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상반되는 두 기독교의 모습 앞에서 마냥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필자는 시인으로부터 우송받은 교정쇄를 가방 속에 넣은 채 마냥 들고 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18개월의 기간을 약속하고 10년을 넘게 시간을 끈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상처럼(필자의 글은 감히 그 명작과 비교 될 수 없지만 어쨌건 시간을 끌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 원고는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마치 밀린 원고를 두고 도박에 몰두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순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로댕과 도스또예프스키를 이해하는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필자를 구속하고 있는 기독교적 현실의 언어와 필자가 써야할 해설 속의 기독교적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그 언어들이 이루는 의미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순결함으로 필자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저쪽에서 필자를 부르고 있었다. 

    2

차옥혜의 두 번째 시집 [바람 바람꽃]에 붙인 해설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었다. <차옥혜의 서사시[바람 바람꽃]을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한동안 막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수 있다니---->라고. 필자의 이같은 생각은 이번 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을 읽고 난 후 더 분명하게 굳어진다. 그래서 그녀의 이번 시는 이 세상의 온갖 천박함으로 물들어 있는 필자에겐 두 번째 시집의 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고, <이 세상을 넘어서 피어 있는 바람꽃>이다.

그녀의 시에는 두 번째 시집이 그랬듯이 이번 시집에도,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시는 독특한, 정화된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길을 막고 선

가시나무에

피 흘려도

어서 건너와

당신의 몸

찔린 상처마다

피어난 꽃을 보라는

나는

당신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에서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당신>의 이미지에는 조금도 증오와 원망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또한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항의와 반발을 해보이지도 않는다. 자신의 완벽한 무죄로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집단의 폭력성을 입증해 보인 예수처럼 이 시 속의<당신>은 그렇게 서 있다. 그 당신은 <길을 막고 선/가시나무에/ 피 흘려도><찔린 상처마다/피어난 꽃을 보라는> 그런 당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신의 모습에는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자신의 수난을 증거로 타인에 대해 마찬가지의 수난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세속의 오만함을 이 시 속의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이 시에는 그 대신 오로지 자신의 끝없는 수난으로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입증해 보이는 사람의 자세가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당신>의 경지는 차옥혜 시가 도달하려는 목표이다. 그녀 시의 화자가 목메어 부르는, <내 애간장 다 태우>며 기다리는 그곳에는 언제나<당신(혹은 님)>이 있다. 그 님, 혹은 당신은 비록 호칭이나 시적 진술에 있어서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인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독교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에는 그래서 주()를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항상 들어 있다. 그 자세로 그녀 시의 화자는<당신>과의 합일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며 나아간다. 

 

마침내 꽃잎 지듯

내 살과 뼈 재가 되어

님이 밟을 땅

웅덩이를 메우며 스러져도

이 세상 끝날에도 타고 있을

내 불꽃 넋은

님 속에 집을 지으리니

-[분신]에서 

 

그러면 그녀의 시에서 <내 살과 뼈 재가 되>도록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님 속에 집을 짓>는 것이며 <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 다시 님의 나라로 가는 길

때때로 가시 찔리고

들짐승이 으르렁거리고

강도 만나는 길

그러나 생명인 길

-[제야의 종소리]에서

 

따라서 우리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차옥혜의 이같은 시를 두고 <님 속에 짓는 집>, 혹은 <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옥혜의 시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도대체 어떤 집일까? 그 집은 어떤 모양의 집이기에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하는 것일까? 그 집은 세속의 질서를 벗어난 저 먼 곳의 세계에서 아득히 우리를 손짓하며 오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어떤 집일까? 아니면 세속의 가치와 안락으로 우리를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집일까? 그리로 그 집은 어떻게 지을 수 있는 집일까? 우리는 이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시를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질서 속에 세운 집은 아니지만 세속의 집을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세우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정의로움과 무관한, 초월적 세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녀가 세우려는 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의 현실이라든가 노동의 착취와 같은 온갖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죄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아아 입 다물고

황사 바람에 눈감고 산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분단의 벽은 얼마나 더 높아졌던가

-[소리와 침묵]에서 

 

그녀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부터 벽돌장을 놓아가는 집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삶의 질서, 세속적인 안락의 집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녀가 짓는 집의 초석을 이루고 있다. 이웃의 가난과 이웃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깊이 통회하면서 그녀가 세속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수평적이 삶(정의로운 삶)에 대해 가지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은 이번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집 지하실 단칸방에/노모와 동생들과 함께 세를 살던 노총각은 /공장에서 12시간 노동에/잔업으로 야근까지 하고 돌아온 일요일/불편한 노모를 부축하여/마당가 화장실을 다녀가다/발을 멈추고/라일락꽃에 부서지는 봄볕을/하염없이 바라보다/문득 꽃밭을 손질하고 있는 나에게/어떻게 하면/집을 가질 수 있죠/라고 물었다./부지런히 일하고 근검 절약하면/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어요/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그들은 소리 없이 씁쓰레하게 웃었다./그 순간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히는 /그들의 웃음이여

-[우물 안 개구리] 전문

이렇듯 [내 친구의 십자가는]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친구의 자기 희생적인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웃의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지리산 마을에서 하룻밤]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와 역사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녀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차옥혜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는 이 부끄러움은 그러나 이 글의 첫머리 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회나 집단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곧장 표출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 시에서 화자는 이 부끄러움을 자신의 내면을 향한 죄의식으로 치환시킨다. 윤동주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이 세상의 온갖 모순에 대한 성찰을, 그녀 자신이 그러한 죄 많은 세상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의식으로 치환해서 다시 성찰한다. 그녀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이 사실을 우리 앞에 뚜렷이 증거해 준다. 

 

창 너머 밝아오는 새벽빛을

차마 고개 들고 바라볼 수 없었다

-[아버지]에서

 

나이 사십이 넘고도

제자리에 없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기도]에서 

 

그녀 시의 화자는 <내가 죄인이듯이 당신도 죄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그렇게 사람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그녀가 파악하는 예수의 죽음이 제의화된 기독교가 아니었듯이 그녀 시의 화자는 섣부르게 이 세상을 향해 강압적인 목소리로 회개를 요구하거나 대속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다만 <차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의 죄의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이 죄의식은 순결하다. 거기에는 희생적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이 세상 속에 마련하겠다는 욕망이 전혀 배어들어 있지 않다.

그녀 시의 화자가 드러내 보이는 이와 같은 순결한 죄의식은 그녀의 시를 수평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수직적인 삶의 높이에로 끌어올린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수직으로 치솟아 오른 포풀라나무가 그가 도달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갈망의 표상이었듯이 차옥혜 시에 있어서<당신()>은 그러한 표상이다. 그녀 시 속의 화자는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둥켜안고 <당신()>을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자는 인간들을 향해 속죄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세계를 향해 기도의 자세를 취한다. 

 

채우지 마소서//비어있기에/충만한 평안을/그대로 머물게 하소서//비어있기에 꿈꿀 수 있고/내 안에 /햇빛과 달빛이 쉬어 가고/바람도 노래하다 떠나며/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감사하게 하소서//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 주소서

-[빈 잔] 전문 

이 기도의 자세는 위에서 보듯<당신()>을 향해 있다. 그러나 그녀 시의 화자가 당신을 향해 드리는 이 기도의 내용은 <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기뻐하게> 해달라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을 향해 있다. 모든 것이 제 모습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자세는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의 집을 버리고 <당신>의 나라에 집을 짓고 싶다는 그런 일방적인 수직적 초월의 기도가 아니다. 그 자세는 수평적인 삶이 없이는 수직적인 삶도 없다는 자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는 수평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수직적인 삶에 못지 않게 아끼고 사랑한다. 이 세상 속의 집들과, 그 집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족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여긴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비어 있는 이 세상과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찬탄한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다음 두 편의 시는 그래서 그녀가 <아름다워>라고 써놓지 않았더라도 무척 아름다운 시들이다. 

 

모두 훨훨 벗어버려

다 보이는 겨울 숲이여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낱낱의 작고 가냘픈 어린 나무들이

드러나고

땅에 엎딘 마른 풀들도

환하구나

큰 나무들은

아득한 어린 나무들 앞에서

겸손하구나

이제 보인다

가려 보이지 안던

앞마을과 뒷마을

먼 산과 강과 지평선

그리고 길들이

환히 보이는구나

-[다 벗으니 다 보이는구나]에서 

 

서기 36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키프로스 쿠리온 시 유적터의 한 주택 내부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가 마주 꼭 껴안고 아빠가 엄마의 등 뒤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를 함께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의 완전한 유골이 발견되어 그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공포의 순간을 사랑으로 버티고, 1996년 오늘까지 이 세상의 뼈들 중에 가장 행복하게 남아 있는 이 유골들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워라

-[가족] 전문 

 

그녀 시의 화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이 가족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비록 차옥혜의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세워진 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집이다. 화자의 그러한 의지는 <아름다워라>라는 찬탄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 시의 화자는 가시적인 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집은 쉽게 허물어지고 영속하지 안는다. 그녀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그런 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마음의 집이다. 

 

내가 지은 집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성이었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철근 기둥 세워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콘크리트 지붕 위에 기와를 올리고

높다란 돌담에 철대문도 달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잠깐 왔다가는 세상

바람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성이었습니다

이제는 해와 달이 아무리 넘나들고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부서지지 않을

(중략)

울타리 없는

집을 지으렵니다

-[모래성]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바람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집이 아니라,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부서지지 않을> 집이며 <울타리 없는> 집이다. 이 집은 지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형태를 가진 집이 아니라 차라리 마음 속에 세워진 집이며, 화자의 삶이 끝난 후에<내가 떠난 후에도 내 노래는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집이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만금의 재물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고, 만 권의 책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능히 그것을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오직 덕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이다 라는. 그녀 시의 화자는 이같은 자세로 오직 <당신> 속에서만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는, <당신>의 세계의 흔적을 가진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한다. 그 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이 세계 속에 있다. 

  3

이 시집에 대한 해설을 마치면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늘어놓았던 변명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와 같은 차옥혜 시의 기독교적 세계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과 관계된 것이다.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은 순수한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가지고 완전한 <당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적인 갈등의 흔적이 별로 없다. 이를테면 필자와 같은 경우 <가족>과 같은 시를 읽으면서 신의 완전한 사랑에 필적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과 함께, 그 같은 사랑을 지닌 인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신의 의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차옥혜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번 시집에 수록된<아버지>에 대한 시들에서 엿볼 수 있듯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풍토에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개인적인 소신으로는, 이러한 반발과 회의의 진폭이 진정한 기독교인에게일수록 필요한 것이라 믿고 있다.

                                                      198912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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