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예수 -그 희망과 절망의 높이-
홍정선(문학평론가/ 한신대 교수)
1.
차옥혜의 서사시 [바람 바람꽃]을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한동안 막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수 있다니 …
[바람 바람꽃]은 제목 그대로 필자에겐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었고 이 세상을 넘어서 피어 있는 바람꽃이었다. 이 세상은 이 시집으로 말미암아 인간으로서 도달해야 할 어떤 높이를 가지게 된 것 같다는 생각과 한층 더 아득하게 멀어 보인다는 생각 사이에서 필자는 막막해 있었다. [바람 바람꽃]에서 예수는 인간의 모습으로 가난한 사람들과 밑바닥에서부터 삶을 함께 하고 있었지만, 그가 가진 신념의 두께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 펼쳐 보일 수 있는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한 믿음을 너무나 확고하게, 그러나 조금도 모나지 않는 부드러움으로 가지고 있어서, 우리 인간에겐 그가 같은 인간이었다는 측면에서 가능성의 희망이면서도 절망의 높이였다.
아시나요
바람이 쌓고 있는 산을
바람이 기르는 벌판을
바람이 끌고 가는 강줄기를
아시나요
바람의 가시 박힌 맨살을
바람의 부서진 뼈를
이 모두가 당신과 나에게 미친
사랑 때문임을
아시나요
당신도 나도
그 산과 벌판과 강줄기로 돌아갈
바람인 것을
필자는 이처럼 필자를 향해 던져지는 “아시나요”라는 질문 앞에서, 또는 우리 모두가 예수가 이룬 “그 산과 벌판과 강줄기로 돌아갈 바람”이라는 대답 앞에서 다시 한번 어쩔 줄 모르는 막막함을 느낀다. 당신의 시대에 당신이 겪었던 사랑의 고통은 왜 똑같은 모습으로 지금 여전히 반복되어야 하나요? 틸리히의 설교 제목을 내 멋대로 사용하는 것이 허용된다면 당신이 살았던 그 어려운 시대는 왜 지금도 “영원한 지금”으로 계속되어야 하나요? 불의와 탐욕과 수탈은 여전히 계속되고, 그럼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이름은 더욱 명예로와지며 당신에 대한 갈구는 더욱 절실해진다는 건 얼마나 역설적인 건가요? 그것은 “이 모두가 당신과 나에게 미친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필자는 평소 이런 질문들을 ‘사람의 아들’(예수)에게 던지고 있었고, 이런 질문을 가진 심리적 기반 때문에 [바람 바람꽃]을 덮으며 필자는 막막해 했었다. 아직 나에게는 이문열 소설의 ‘아하스 페르츠’적인 사고가 종식되지 않은 까닭일까, 아니면 [바람 바람꽃]에서 가리옷 유다에 대해 시인만큼이나 내가 애정을 가진 탓일까 등의 자문자답을 하면서 필자는 이제 이 글을 인간으로서의 예수가 보여준 ‘가능성의 희망’ 아니‘절망의 높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탐구로 써보고자 한다.
2.
예수와 예수를 둘러싼 주변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 해석으로 재미있게 기억되는 소설에 백도기의 [가리옷 유다에 대한 증언]이 있다. 이 소설에서 백도기는 유다의 입을 빌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었다. “스승은 너무 순진해, 세상의 악이 얼마나 견고하고 교활하고 뿌리깊은 것인지를 모르고 있네. 나는 스승을 그 악과 직접 대결시켜 보고 싶었네”라고. 그리고 또 그는 직접 “나는 가리옷 유다에게서 수많은 전형을 본다. 사상적 혹은 행동적인 테러리스트들과 맑시스트, 본질적으로 인간의 힘만으로 이 세계의 구원을 성취하려는 자들”의 모습이 바로 그런 전형들이라고 고백한 적도 있었다.
이 세상에서 되풀이되는 불의와 탐욕과 수탈의 여러 형태들은 유다적인 행동주의에 대한 매력을 낳는다. 억압과 수탈은 저항의 당위성을 확보해 주며, 윤리의 부재는 물리적인 힘과 힘의 대결을 정당화시킨다. 유다에게서 백도기가 읽어낸 행동적 민족주의자로의 면모는 이처럼 시대상황이 그러한 해석을 정당화해 주는 분위기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면서도 백도기는 사람의 법과 경쟁하지 않는 예수를 통해 유다의 한계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시대적인 의미를 부정하는 또 다른 가치의 척도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즉 이 세상의 의미를 상대화시키는 ‘저 높은 곳’의 가치 척도를 인간의 행동양태에 적용함으로써, 힘에 의한 정의의 단명함을 지적하고 있는 셈인 것이다.
백도기는 결국 틸리히의 다음과 같은 말, “사랑을 정의 할 수 있는 더 높은 원리란 없다.”는 말을 수용하면서 현실정치를 강조하는 유다의 입장을 비판한다. 그렇다면 예수가 보여주는 사랑의 원리는 과연 현실정치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현실적인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송상일이 나인홀드 니버의 “왜 기독교의 도덕주의는 정의의 문제에 대해 미약한 공헌밖에 하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을 빌어 “기독교 윤리의 가장 곤란한 문제”는 사랑과 정의 사이의 딜레머라고 지적한 것처럼 앞의 문제에 대한 대답은 간단치 않다. 유다가 강조해 보인 정치현실의 중요성은 사랑의 원리에 의해 대치 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부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다. 이 땅에서 불의와 탐욕과 수탈을 종식시키고 정의를 회복하려는 모든 노력은 언제나 물리적인 힘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 점은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해진 수많은 전쟁들에 의해서도 충분히 입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옥혜는 [바람 바람꽃]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 곤란한 문제에 접근하고 있는 것일까. 차옥혜가 형상화해 낸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와 가리옷 유다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생각들을 대변하는 인물들일까.
차옥혜의 [바람 바람꽃]은 하나님의 죽음과 이 세계의 정신적 불안이라는 기독교 문학의 일반적 주제에서 약간 벗어나 있다. 이 땅 위에서 고통받는 인간 현실을 목도하면서 조건 없이 “하나님 없이도 성자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차옥혜는 그러한 질문마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까뮈 식의 “만일 우리 시대가 허무주의로 인해 고통을 받는다면, 우리가 필요로 하는 원리를 찾아낼 수 있는 것도 허무주의를 무시하고서는 이루어지지 안는다”는 철저한 대결의식을 차옥혜의 시에서 읽어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대신 이 땅을 지배하는 고통스런 현실과 이 현실에 대응하는 참된 종교인의 자세에 대한 고뇌 어린 모색을 우리는 이 시집에서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로 대변되는 진정한 사랑의 본질 문제를 현실정치와 관련하여 따져 볼 수 있게 된다.
차옥혜의 [바람 바람꽃]은 예수 생존시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시대의 현실적 상황을 염두에 두고 씌어진 작품임이 분명하다. 그 근거는 예컨대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 충분히 입증된다.
말하지 않으면 평생 풀려나지 못해
병사들은 채찍질을 하고
무릎 사이에 방망이를 끼우고 앉혀
양끝에서 방망이를 밟아대네
몰라요 몰라요 정말 몰라요
병사들은 막달라 마리아의 옷을 벗긴 후
첫눈 쌓인 순백의 처녀림
아직 다람쥐 발자국도 없는
순수의 숲인 벌거숭이 처녀를
수갑채우고 족쇄채워
주무르고 비비고 쥐어뜯네
위에서 부분적으로 보았듯이 로마 병사들에 의한 막달라 마리아의 연행, 고문 재판과정에는 우리의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연상케 하는 장면들이 삽입되어 있으며, 이러한 장면의 등장은 분명히 현실적 상황을 기반으로 한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것이다. 또한 의식적이건 의식적이지 않건간에 마리아의 오빠 시몬과 가리옷 유다의 모습 속에는 지금 우리 사회의 운동권 혹은 반체제 단체를 연상시키는 측면이 들어 있다.
바다에서 평안히 그물질을 하기 위해선
먼저 하늘과 땅에 그물을 드리우고
잡아야 할 것들이 있었네
고통받는 사람들을 건져야 했네
희망과 독립과 자유 속으로
이스라엘을 건져야 했네
막달라 마리아의 오빠는
제로테가 되어
이스라엘 남쪽 광야로 떠나버린 후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네
차옥혜는 앞에서 본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연상시키는 고통스런 현실을 막달라 마리아의 수난과 로마와 헤롯의 압제와 제사장들의 투쟁과 예수의 사랑의 투쟁에서 찾는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유다와 예수의 논리 속에 잠긴 이 땅의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먼저 유다는 엄격한 금욕주의자이며 청교도적인 정신자세를 가진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엄격하게 절제함으로써 혁명에의 열정을 불태운다. 그가 이 땅의 가난을 물리치는 방법은 예컨대 예수의 발에 발라주는 향유를 보면서 내뱉는 “그 비싼 향유를 팔았다면/삼백 데나리온은 받았을 거요/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도울 수 있었을 텐데/이 무슨 허식의 향연이요?”라는 말 속에 들어있다. 유다는 현실주의자이며, 상대방을 높임으로써 자신도 높임을 받는 정신적인 충족감을 납득하지 못한다. 따라서 그는 예수의 현실 대처 방식을 “정면으로 문제를/해결하지 안고 회피”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반면에 예수는 “한 영혼의 값은/삼백 데나리온”보다 훨씬 크다고 말하면서 “모든 사람에게 영원하기 위한” 사랑의 길을 추호도 흔들림 없이 걸어간다. 유다가 예수에게 정면으로 대어드는 다음 장면은 오늘의 세계질서를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예수의 사랑을 통한 정신혁명에 유다가 구체적 현실을 들어 맞서는 모습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로마는 세계 평화를 위하여
자유를 위하여
헌신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스라엘 땅에 와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일한 땀의 결실을
매일 본국으로 수송하고
우리를 다그치며 가난과 궁핍으로 몰아넣습니다
우리에게서 인간을 발견하려는 시선은
추호도 없습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는 어떤 구체성 있는 대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막달라 마리아을 통해 제시되는 대답은 “진리는 낯설고”두렵다는 것이며“영원한 생명”이라는 종교적 추상을 띤 이야기일 따름이다. 예컨대 마리아가 변호하는 예수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보이는 것만 보고
들리는 것만 듣는
캄캄한 사람들이여
어둠을 어둠으로 부수지 않고
빛으로 끌어내려는
죽음을 죽음으로 두지 않고
생명으로 깨우려는
깊고 깊은 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는
자갈들이여
마리아의 목소리를 통해 제시되는 예수는 “어둠을 어둠으로 부수지 않는 사람”이며 “죽음을 죽음으로 두지 않는”사람이다. 그의 논리는 칼에는 칼, 이에는 이로 맞서는 힘의 논리가 아니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고/로마를 무너뜨리는” 바람(사랑)의 논리이다. 일견 보기에 현실적인 정치적 자유가 아니라 자유의 본질 그 자체를, 일생의 복락이 아니라 복락의 본질 그 차제를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예수의 이같은 형태는 그러면 얼마나 구체적으로 이 땅의 괴로움을 치유해 줄 수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현실적인 정의와 예수의 사랑을 얼마나 합치될 수 있는 것일까.
차옥혜는 분명히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분신인 사람들이 이 척박한 땅에서 사람답게 살게 하려고” 시도한다. 그는 그것이 예수의 보편적 사랑, 다시 말해 민족애와 같은 특수한 형태가 아닌 사랑의 본질 그 자체를 통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이 시집에서 바로 되풀이해 반복하는 “바람이고, 생명의 영원성이며, 진실의 힘”이다. 그녀는 이 바람을 통해 비로소 “우리가 사는 땅은 한 걸음씩 낙원으로 접근해 가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은 이 시집에서 막달라 마리아의 믿음이자 차옥혜의 믿음이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선이 확장하는 영역만큼이나 악의 영역도 확장되어 왔으며, 공의가 확립되는 만큼이나 악도 강대해져 왔다. 정의를 직접 만져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깊고 깊은 님의 사랑을 헤아릴 수 없는 /자갈들”로 남겨 두는 한, 악의 세력은 언제나 현실적인 세력으로 남아 있다. 사랑의 원리는 최상의 원리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며, 추상적인 한 이땅의 고통은 언제나 그것과 거리를 가지기 마련인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차옥혜가 제시하는 사람의 아들 예수는 유다처럼 이 땅의 문제와 관련된 구체성의 면모보다, 성경의 해석에 근거한 보편성의 면모가 더욱 강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성경의 사건들 속에 여전히 갇혀 있으며, 이 땅의 현실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는 유다의 구체성에 정면으로 대응하지 않는다. 그는 상당부분에서 성경기록과 다른 역사적 현실의 주인공이 되고 있지만 그 것이 그의 생애에 직접적인 좌절을 가져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집에서 예수의 사랑은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며, 이 세상을 넘어서 있는 바람이다. 그래서 그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신음하는 바람이고자 하지만 언제나 이 영역을 넘어서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 속에도 역시 부정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모습이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은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정의롭지 못함의 구체성으로 신음하며 하나님을 체험한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아들 역시 그렇게 우리 속에 있을 것이다. 유다의 가슴 속에 부정과 긍정의 변증법을 거쳐 예수가 각인되듯이.
필자는 이제 마지막으로 서사시의 화자 문제와 관련하여 이 시집에 대해 몇 마디를 첨가하고 싶다. 이 시집은 거의 전부가 막달라 마리아의 목소리를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유다나 예수가 직접적으로 화자가 되는 경우는 좀체로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이 긴 서사시를 어떻게 단조롭지 않은 목소리로 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옥혜는 마리아의 목소리에 의해 전개되는 부분과 시인의 목소리에 의해 전개되는 부분, 그리고 인물의 목소리를 마리아의 목소리가 격자구조로 감싸안으며 전개되는 부분을 적당히 교차시키고 있다.
1) 이 막달라 마을에
마리아라는 이름의 처녀가 있네
사람들은 마리아가
귀신들린여자
미친 여자라고 말하네
2) 천대받고 손가락질 받던 나를
사람이라고 목숨이라고
이 세상 년년이 번영케 하는
창조의 몸인 존귀한 여자라고
말씀하신 이여
3) 모든 사람에게 영원하기 위하여
나는 이제 곧 무서운 전쟁을
홀로 치르어야 하리
막달라 마리아는
소리 없는 님의 말을
다 듣고 있네
위에서 1) 부분은 시인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으며. 2) 부분은 마리아의 목소리를 보여주고 있고, 3) 부분은 앞의 예수의 목소리를 마리아의 목소리가 격자구조로 감싸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이 시집은 그러나 묘사체의 “-네”라는 서술어를 지나치게 사용함으로 말미암아 화자의 구분에 대한 혼란과 함께 단조롭다는 느낌도 주고 있다. 예컨대 “진리는 미래네/진리는 낯서네”라고 말하는 것과 “진리는 미래다/진리는 낯설다”하고 말하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어감 차이가 있는 것이다. “-네”는 “-다”보다 부드럽고 경어체에 가깝지만 묘사하는 대상을 풍문처럼 들리게 만든다는 문제도 있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무릎을 끓고
님의 옷깃을 잡아 흔드네
막달라 마리아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님은
막달라 마리아를 남겨둔 채
광야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네
그리고 화자구분 문제의 경우 위에 인용된 구절은 그 앞에 놓여 있었던 예수의 이야기를 마리아의 입을 통해 이야기된 것으로 만들어 주면서 동시에 시인이 마리아의 행동을 묘사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이런 부분은 그러한 이중적인 효과에 동반하여 그 앞에 있었던 예수의 이야기를 시인의 입을 통해 말해진 것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에 화자인 마리아의 입장을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혼란도 초래한다.
3
이 글을 끝맺으면서 필자는 이 시집에서 가장 중요한 시어인 ‘바람’과 ‘바람꽃’에 대해 소홀했음을 느낀다. 이 시집의 1장에서‘바람’으로 불어와서 4장에서 ‘바람꽃’으로 결실하는 이들 시어는 반드시 주목해 읽어야 할 언어이다. 차옥혜는 정치적․경제적 문제들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서늘한 바람을 선사하면서, 그 바람에 의한 어떤 결실을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와 유다와 민중들이 그 바람 앞에서 비로소 올바르게 편안해졌듯이.
차옥혜가 ‘바람’에서 ‘바람꽃’으로 정화를 통해 보여주려 한 역사성(현실성)과 초월성(기독교)의 동시적 결합은 우리의 영원한 숙제인 사랑과 정의 사이의 갈등에 대한 한 의미 있는 모색이다. 우리 모두가 지금 ‘당장’ 그리고 또 ‘영원히’ 행복해지기를 원하는 한 이 시집의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시집의 해설,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바람 속으로』 해설 - 박이도 (0) | 2006.02.28 |
---|---|
『발 아래 있는 하늘』 서평 - 서홍관 (0) | 2006.01.26 |
『발 아래 있는 하늘』 해설 - 임헌영 (0) | 2006.01.25 |
『비로 오는 그 사람』 해설 - 홍정선 (0) | 2006.01.23 |
『깊고 먼 그 이름』해설 - 고은 (0) | 200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