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는 날까지 시인으로 살겠다는 팔순의 시인

                              -차옥혜 시인의 시집풀잎으로 만나요 꽃으로 만나요를 읽고

                                                                                        안준철(시인)

, 이웃, 세계, 우주 품고
잠 못 이루고 아파하며
쓴 나의 시들이
순간 몇몇 가슴에
아니 내 안에서만
피었다 진 꽃일지라도
오늘의 내가
억년 지구의 산물이듯
내 시가
쓰레기로 썩어
억 년 후 한순간
어느 계곡 환하게 핀 꽃의
밑거름이나 될지라도
아니 송두리째 부질없어도
나 죽는 날까지 시인으로 살리

                                                        -<나의 시가 쓰레기 되어도> 전문

  “누님, 그 몇몇 가슴 중에 이 부족한 아우도 있답니다.”
  시집 뒤쪽에 실린 시를 읽고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차옥혜 시인은 내가 유일하게 '누님'이라고 호칭하는 시인이다. 내가 54년 생이고 옥혜 누님은 45년 생이니 아홉 살 터울이다. 내가 이십 대였을 때 누님은 삼십 대였던 거다. 내가 삼십 대였을 때는 사십 대. 그땐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나도 벌써 칠십이 넘어 이삼 년 뒤면 칠십 중반이나 누님 시인은 팔십 중반이신 거다. 아래 시를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다.

하늘나라 광활한 눈 꽃밭에/ 무더기로 피었던/ 눈꽃이 지네 지네// 눈 꽃잎 눈 꽃잎/ 떼를 지어 지상 무덤으로/ 초연히 우아하고 아름답게/ 하늘하늘 춤추며 가네// 지고 있는 나도/ 나를 바라보는/ 님의 눈동자에/ 사랑과 그리움 아롱지는/ 눈 꽃잎이었으면/ 눈 꽃잎이었으면
                                                            -<눈 꽃잎> 전문

  지난 일요일(16), 장성 백양사로 단풍 나들이 가는 길에 차옥혜 시인의 열다섯 번째 시집 풀잎으로 만나요 꽃으로 만나요를 배낭에 넣어 갔다. 기차를 환승하며 익산역 대합실에서, 백양사역 앞 돌의자에 앉아 시를 읽었다. 누군가 옆에서 나를 보았다면 시집을 읽고 있는 석상을 연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나는 시에 깊이 빠져들었다.
  허형만 시인은 시집 해설에서
  "등단 40년을 지나온 차옥혜 시인의 제15 시집 풀잎으로 만나요 꽃으로 만나요는 분단국가에 사는 시인의 평화와 통일 염원, 기후 위기와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의 아픔, 시대적 역사 인식과 민중성,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생명으로 가득하다.”
  고 말한다.
  얼마나 절박했으면 총 5부로 되어 있는 시집 1부에서 4부까지 온통 이웃과 세계와 지구와 우주 걱정으로만 가득할까. 시집을 펼치기가 무섭게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들은 말씀이란 제목의 시가 눈에 들어온다. 노시인은
 「난생처음 가본 철원 평화전망대에서/ 사월 연초록 아기 잎새들 출렁이는/(...) /남과 북으로 가로지른 분계선을 보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를 거울삼아 평화를/ 심고 가꾸고 만수무강하여라/ 다시 전쟁 나면 모두 전멸이다라는 다급한 경고의 말씀을 듣기도 한다.
  나 또한 시집을 읽으면서
  “왜 아우님은 분단국가에 사는 시인으로서의 고민이 없느냐, 기후 위기와 환경파괴로 인한 지구의 아픔에 한 번이라도 잠 못 든 적이 있느냐
  는 준엄한 꾸짖음을 듣는 듯하였다. 나는 죽비를 맞듯이 아프게 아프게 시를 읽었다.

대지가 비명을 지릅니다/ 하늘이 통곡합니다/ 탱크가 지나간 자리/ 미사일이 날아와 터진 곳/ 불타고 부서진 건물 틈에/ 끼이고 묻히고 떨어진 사람시체들/ 21세기 문명 문화 지성 시대에/ 무슨 전쟁이라니요/ 안 돼요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멈춰요 멈춰요 즉각 멈춰요/ 사람들 무더기로 죽어요/ 지구 부서져요/ 당장 무기 내려놓고/ 풀잎으로 만나요 꽃으로 만나요 

                                                               -풀잎으로 만나요 꽃으로 만나요부분

  이번 시집의 표제시로 마치 순수한 영혼을 가진 문학소녀 시절로 돌아가서 쓴 듯하다. 아니, 차옥혜 시인은 지금도 그런 순수한 생명력을 지니고 살고 있으며, 그 순수의 샘에서 시를 길어 올리고 있다. 한때 문학판에서는 참여와 순수 논쟁이 있었다. 평화에 대한 갈망이 잘 드러난 이 시를 읽으면서 그런 논쟁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때아닌 눈보라에 떨고 있는 매화에/ 우크라이나 전쟁이 겹친다”(눈보라에 떨고 있는 매화)라고 쓴 시인은 짓밟히지 않는 세상은 어디에라는 시에서는 미사일로 순간 한 도시 한 나라가 박살이 나는 통에 무너진 건물 더미에 묻혀버린 사람들/ , 전기, , , 가족 사라져/ 폐허 더미에 울고 있는/ 피투성이 어린이들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고 있다.
  차옥혜 시인의 세계에 대한 현실 인식과 참여 정신은 기후 변화에 따른 지구의 위기와 환경파괴에 대한 염려에서도 여실하게 드러난다. “지구가 병들고 너무 아파서 쏟은/ 집중 눈물 폭포로 순식간에/ 신림동 반지하 13살 어린 딸 끼인/ 장애인 가족 3”(지구가 너무 아파서)이 수몰된 참혹한 현장을 고발하기도 하고 기후변화 가뭄으로/ 아프리카 6억 명 인구/ 생존 위험에 놓여 있는”(아프리카 6억 명 생존 위험) 것을 다급하게 경고하기도 한다.
  차옥혜 시인을 누님으로 호칭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암 투병 중에 서울로 병원 왕래가 잦았던 그 무렵이었다. 그때만 해도 누님 시인은 밭에 나가 농사를 짓고 자신만의 숲도 가꾸고 계셨다. 그 후 나는 암 완치판정을 받았지만 누님의 병세는 더욱 악화일로에 있었다. 누님은 무릎 연골이 찢어지고 호미를 들 수 없는 지경에 이르신 뒤에야 30년 넘게 벗하며 살아온 숲을 떠나셨다. 그때의 심정이 오죽했을까 싶은데 병은 당신을 담금질한 도반이라고 시를 읊으셨다.

중학교 2학년 때 한밤중 맹장 수술/ 마취에서 깨자 들리던 새벽 종소리/ 살았다 안심하며 눈 뜨니/ 밤새 손잡고 머리 쓰다듬으며/ 나를 굽어보는 어머니/(...)/ 되돌아보면 병 때문에 나는/ 하늘, , 바다 더 오래 쳐다보고/ 보이지 않는 세상 찾아 헤매어/ 문학소녀였고 시인이 되지 않았을까/ 삶이 절박하고 너무 간절하여/ 만물을 끌어안고 울고 울어/ 모란, 장미, 수국은 아니어도/ 풀꽃 같은 시 몇 편이라도 짓지 않았을까/ 실로 병은 나를 평생 담금질한 도반이다

                                                                      -병은 나의 도반부분

  시인은 겸손하게 말씀하셨지만, 그리고 풀꽃만큼 예쁘고 아름다운 꽃도 없지만 이번 시집에서 나는 불꽃을 보았다.
  “늑막염, 안면마비, 대상포진/ 모두 내 몸 왼쪽으로 왔다/ 감기도 언제나/ 왼쪽 코에서 시작한다”(나는 왼쪽이 약하다)고 토로하면서도
  “오른쪽 몸이 한사코 왼쪽 몸 사랑하여 응원하듯 고통에 찬 세상을 향한 사랑의 관심을 놓지 않고 뜨거운 시집을 펴내신 누님 시인의 불꽃 같은 사랑이 못난 아우 시인에게도 옮아 붙기만 바랄 뿐이다. 노력하리라. 그것이 부질없을지라도. 빛을 소망하며.

시는 사랑이다.
내 넋에 솟은 풀잎과 꽃을 들고
아픈 세상을, 지구를, 행성을 만난다.
부질없을지라도.
안녕, 빛을 소망하며.

                                                            -<시인의 말> 중에서

  시집 제5부에서 시인은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 코앞 냇물 속에서 한사코/나를 보고 있는 당신이 그리워/ 가지를 아래로만 뻗으며 산/ 나는 늙은 수양버들입니다”(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고백이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물음을 던지는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아로새기게 된다. 팔순 누님 시인이 주신 값진 선물이다.

  1984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한 차옥예 시인은 깊고 먼 그 이름, 흙바람 속으로, 호밀의 노래, 15권의 시집과 연기 오르는 마을에서3권의 시선집을 출간했다. 경희문학상, 경기펜문학대상, 산림문학상, 현대시인상, 이충이문학상 등을 수상하기도 했다. 옥혜 누님의 시집 출간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누님의 건강을 두 손 모아 기도드린다.

                                                    (2025년 10월 18일 오마이뉴스 게제)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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