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아카란에게로 가는 길

오철수(시인/평론가)

 

 

에디아카란에게로 가는 길

                                    차옥혜

 

 

땅에 생명체가 없었던 육억 년 전

바다에는

머리도 꼬리도 입도 내장도 없는

아무것도 잡아먹지 않고도

햇빛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영양분만으로

오천만 년이나 평화롭게 산

에디아카란이라는 광합성 동물이 있었다.

 

에디아카란은

맑은 바다에서 오직 가슴으로 온몸으로

꿈꾸고 사랑만 하며

살았다!

뛰고 싸우고 땀 흘리지 않고도

깨물거나 씹거나 물어뜯거나 삼키지 않고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고도

살았다!

평생 동안 제 몸뚱이 외엔

쓰레기 한줌 만들어내지 않고

오직 산소를 내뿜어

땅위에 생명의 도래를 예비했다.

 

나를 불질러

한 그루 나무에 스며들까.

나를 후벼

내 안에 나무를 심을까.

에디아카란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다.

시집아름다운 독(민음사)

 

지구 역사의 필름을 거꾸로 돌립니다(거꾸로 돌린 필름은 물론 필연의 역사입니다). 인류 역사라고 믿어지는 B.C. 12천년 그 이전(에이브러햄은 그 이전 시대를 카오스 시대라고 부른다)으로부터도 한없이 거슬러 올라가 6억 년 전의 광막한 바다에 이릅니다. 그 심해에 어떤 생명물질이 있는데, 그 존재는 "머리도 꼬리도 입도 내장도 없는/ 아무것도 잡아먹지 않고도/ 햇빛과 바닷물 속에 녹아 있는 영양분만으로/ 오천만 년이나 평화롭게 산/ 에디아카란이라는 광합성" 물질입니다.

 

머리도

꼬리도

입도

내장도 없이

오천만 년이나 평화롭게 산 에디아카란, 그리고

머리도

입도

내장도 있이

6천년 동안이나 전쟁으로 살아온 인간.

 

시인이 그 생명 물질의 삶의 형태에 배어있는 지성(知性)에 대해 말합니다. "에디아카란은/ 맑은 바다에서 오직 가슴으로 온몸으로/ 꿈꾸고 사랑만 하며/ 살았다!/ 뛰고 싸우고 땀 흘리지 않고도/ 깨물거나 씹거나 물어뜯거나 삼키지 않고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고도/ 살았다!/ 평생 동안 제 몸뚱이 외엔/ 쓰레기 한줌 만들어내지 않고/ 오직 산소를 내뿜어/ 땅 위에 생명의 도래를 예비했다." 이 말 속엔, 말이 되지 않았던 에디아카란의 삶이 인간의 언어로 기술되면서(인간에 비추어 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겨나는 묘한 중첩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중으로 현상(現像)된 사진을 보는 것과 같아서, "살았다!"는 강조가 원망(願望)의 소리로 들립니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인간의 삶의 모습이 비추어집니다. 그래서 '오직'이라는 말이 더욱 엄청난 파문을 일으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단 하나의 길, "땅위에 생명의 도래"를 가져오는 필연의 길밖에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그들은 존재했고, 그 아득한 역사에 닿아있는 우리도 그것으로만 존재해야 한다는 그 '오직'!

 

바로 그 '오직'이라는 말로 인하여 아주 극적인 서정 토로가 마련됩니다.

"나를 불질러/ 한 그루 나무에 스며들까./ 나를 후벼/ 내 안에 나무를 심을까."

이처럼 오직 생명의 그물을 살찌우는 방향으로의 삶의 전환, 그것이 바로 "에디아카란에게로 가는 길을 찾는다"입니다. 그러나 그게 그렇게 까마득한 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의 몸 어딘가에 바로 그와 같은 꿈과 사랑의 삶이 '에디아카란적인 유전정보'로 남아 있을 것이고, 지금 시인도 그 서정을 노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황폐해지면 황폐해질수록 다시 돌아오는(物極則反: 모든 사물은 그 극에 달하면 다시 원위치로 돌아온다) 에디아카란의 꿈과 희망이여!

 

<오철수 홈폐이지 2001년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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