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 정서의 객관화
전원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보는 방법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을 이해타산으로 보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대부분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경우가 가장 많고, 유심히 보더라도 나와의 이해상관 속에서 득실을 따져 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는 경우가 일상적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느낌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새롭게 볼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주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시는 대상을 일상적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중심이 된다. 습관적이거나 의례적인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그리고 돌발적인 견지에서 인식하여 이를 엉뚱한 문맥 속에 넣음으로써 그 것을 낯설게 만든다. 대상을 낯설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지녀온 상투적 의미를 벗어나 아주 새로운 의미로 바꿔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한 대상에 대한 습관적․일상적․기계적 반응을 와해시키고 참신한 개성의 아름다움을 얻는 일이 된다. 그래서 시작 행위는 대상을 낯선 문맥에서 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유형을 흔히 네 가지로 나눠 객관화와 주관화, 주관 대상의 객과화와 주관화로 말하기도 한다. 이는 객관대상이나 주관 대상을 수용․인식하는 태도에 의해서 나눈 것이다. 주체인 시인이 객관대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심정등 주관을 표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제시하는냐 아니면 주관으로 변형시켜 의미의 변용을 가하느냐에 따라 객관대상의 객관화, 객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된다. 또 주체인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표출되는 영상이나 개인적 상념인 주관대상을 현상 그대로 제시하고 마는가 아니면 주관적인 재구성을 하느냐에 따라 주관대상의 객관화, 주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하고 있다.
어떤 유형의 시가 됐든 시는 주체적인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요, 그 표현되는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 주체의 정서는 어떤 오브제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표출되든 전달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그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공감될 수 없는 시는 시라 할 수가 없다. 객관대상을 객관화하여 독자에게 맡기든지, 주관화하여 새롭게 의미화하든지 거기에는 독특한 시적 구조가 갖춰져야 미감을 획득하여 전달될 수가 있다. 또한 주관대상을 그대로 피력하거나 아니면 다시 해석구조로 변용시키든 그것도 독자에게 공감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시로서의 구실을 가게 된다.
시가 아무리 주관적인 예술이지만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시로 표현되었을 때 최소한의 전달 기능을 갖추지 않으면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곧 주관적 정서가 감동이라는 객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좋은 시란 개인의 정서가 잘 담긴 정서적 반응이면서 독자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공유가 곧 객관성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이 정서의 객관화를 위해서는 내적인 표현의 적절성과 외적인 문법의 정확성이 따라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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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잘 용해된 주관적 정서이지만 독자의 것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차옥혜ㆍ김운식ㆍ위상진의 시를 들 수가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이사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 집 에 불이 켜졌다/ 어머니의 외로움이 불붙어/ 어머니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 돌아오라 손짓하는/ 어머니의 불붙은 손/ 그 불 꺼드리지 못 하면/ 밤새도록/ 어머니 불덩이일 것 알면서도/ 불켜진 어머니 집 등지 고/ 나는 간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밖엔/ 불켜진 어머니 집 이 천 개 만 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
―차옥혜「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전문(『시문학․5』)
‘어머니의 외로움’을 ‘불’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이 되고, 어머니의 불붙은 손, 불덩이인 어머니, 그 불을 꺼드리지 못한 채 등지고 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한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켜진 어머니의 집은 천 개 만 개가 되어 앞서게 된다. 차마 어머니를 쓸쓸하게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픔을 ‘천 개 만개의 불’로 해석하고 있다는데 이 불의 이미지는 매우 의외적이고 새로운 것이며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 직감은 쉽게 전달되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문학 2002년 5월호 159-16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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