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정원사
차옥혜
해가 벌써 돌아와서 나팔꽃 분꽃 채송화 원추리 능소화 해바라기 봉숭아 금송 꽃향나무 은행나무 주목 감나무……들과 장난치고 있다 정원사는, 잠꾸러기 꽃과 나무를 깨우러 다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들거리며 밤새도록 앓다가 이제 겨우 잠든 난쟁이 백일홍 곁을 지나며 행여 옷깃이 스칠까 봐 이슬 젖은 바지자락을 살짝 들어올린다 몇 발짝 지나가다 다시 돌아와 조심스럽게 호미로 백일홍에 주변의 흙 이불을 끌어당겨 덮어준다
정원사의 아내는 시방 집에서 척추장애로 누워 지내며 천식까지 앓고 있는 아들의 대소변을 요 위에서 받아내고 얼굴과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양치질을 시킨 뒤 이 쪽 저쪽으로 아들의 몸을 젖혀가며 운동을 시킨 후 아침밥을 떠먹이고 있을 것이다
웃자란 나뭇가지는 팍팍 쳐내고 시들거리는 풀꽃은 쑥쑥 잡아 뽑아버려야 싱싱한 아름다운 정원이 된다고 주인은 잔소리를 해대지만, 정원사는 멋대로 자란 나뭇가지들을 자연스럽다고 쳐내지 못하고, 사람이나 다람쥐나 두더지나 멧돼지에 짓밟혀 허리 부러진 풀꽃들이나 벌레 먹어 구멍이 난 풀잎들을 어쩌지 못하고, 조금만 더 기다리면 예쁜 모습이 될 것이라고 농약 뿌리지 않아도 자생력을 키워주면 더 좋은 꽃과 열매를 맺을 거라고 말한다 정원사는 언제 해고될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더 열심히 병들고 상처 나고 시들거리는 나무들을 보살피며 울컥울컥 치솟는 슬픔을 꾹꾹 누른다
<정신과표현, 2006.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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