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통찰과 상상력

정순진

 

시와 다른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보다 매재가 다르다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언어의 핵심기능을 시의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에서 아무리 운율이 중요해도, 아무리 이미지가 중요해도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고 혹은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예술에서보다 시에서 높은 정신세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명명한 철학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삼라만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더라도 그 통찰을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좋은 시란 시인의 통찰력이 결합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중략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시인인 것을 알았네.

문자로 남긴 시는 한 줄도 없지만

벌판에 산에 강에 바다에

길에 집에 마을에 도시에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네.

나만 볼 수 있는 시

내가 번역해야만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의 시를 읽네.

-차옥혜의 우리 어머니는 시인에서

 

이 시는 내가 시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시인이었다는 깨달음이 시의 핵심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글 다루는 사람을 존중해 글 쓰는 사람은 우대하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 하거나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일거에 깨고 시 한 줄 쓰지 않은 어머니를 시인으로 명명하는 것은 감동적이다.

어머니의 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읽을 수 있다. 몸이 곧 텍스트인 경우 그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다는 표현은 염념처처念念處處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며 절실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다. 또한 3연은 글로 쓰는 시와 몸으로 쓰는 시를 대비시키면서 구두선에 그치기 쉬운 글쟁이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의 시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시를 읊는 글로 된 이 시는 다소 수다수러워 감정이 떠버렸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웃어버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웃기 어렵다. 텍스트를 읽을거리는 확보했지만 어머니의 몸이 곧 택스트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해 차분하게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확보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문학 20067월호 142-145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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