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함께 점령하라
차옥혜
맑고 환한 시월 먼 길들이 세상의 나무들이
불러대 뛰쳐나가려는데
느닷없이 대상포진이 나를 점령했다.
육십년 동안이나 기회를 노린 수두 바이러스가
내 왼쪽 몸 1%도 안 되는 곳에 거점을 잡고
내 왼쪽 몸만 이 곳 저 곳 창으로 찔러대도
내 오른 쪽 몸까지 함께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데
미국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월가를 점령하라”고 벌리던 시위가 번져
2011년 10월 15일 전 세계 82개국 1500여개 도시에서
“다 함께 점령하라”
세계 99% 사람들을 빈곤에 허덕이게 하는
세계 1% 사람들이 독점한
“탐욕의 금융자본을 다 함께 점령하라”
지구의 생명과 안녕을 위협하는
“탐욕의 원전을 다 함께 점령하라”
“빈곤을 철폐하라”, “비정규직을 철폐하라”
고 외치며 동시에 벌어진 시위가 내 가슴을 친다.
나도 아파서 쩔쩔 매며 신음하고 절망한
내 몸 99%를 향해 내 몸 1%도 안 되는 대상포진을
“다 함께 점령하라” “다 함께 점령하라”
고 애타게 호소하며 부추기니
내 입에 새싹이 돋는다. 하늘이 보인다.
<PEN 문학 2012년 1ㆍ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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