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씨앗, 혁명의 씨앗

이경수(李京洙: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1. 

자연에서 서정을 발견하는 우리의 현대시 독법은 오랫동안 편향되어왔다. 생명의 순환과 지속성은 한편으로는 죽음을 이겨내고 새 생명을 불러오는 혁명적인 자리이기도 한데, 생각해 보면 우리의 전통 서정시에서는 변혁의 힘을 제거하거나 은폐한 채 인간사에 대한 유비로 자연을 읽어내거나 생명을 찬양하거나 신비화하는 데 치우쳐 있었던 것도 같다. 차옥혜 시인의 열두 번째 시집을 읽으면서 처음 들었던 생각은 이런 것이었다. 이 시집이 그리고 있는 자연 서정의 힘은 씨앗의 생명력이 지닌 아름다움과 온기에도 있지만, 그것이 지닌 변혁의 힘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데도 있었다. 자연의 위의와 아름다움에 감탄의 눈길을 주면서도 이 시집이 생활 현실의 고단함과 신산함을 놓치지 않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어쩌면 차옥혜의 시는 신동엽의 시가 지니고 있었던 대지의 생명력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계승하고 있는 시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씨앗의 존재론이라고 부를 만한 이번 시집에서 차옥혜의 시는 따뜻하고 섬세하고 단단한 언어로 치유의 노래를 들려준다. 찬란한 생명을 틔울 씨앗처럼 목숨을 살리는 시를 쓰고자 하므로 차옥혜는 어머니의 마음이자 농부의 마음으로 시를 쓴다. 씨를 뿌리고 생명을 기르는 마음으로 존엄한 생명에 경이로운 눈길을 주며 공들여 쓰는 차옥혜의 시를 읽다 보면 서정시가 지닌 가능성을 문득 믿고 싶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숙주를 찾아 식탁을 차려대는 세상에서/지금 살아 반짝이고 있는 당신은.얼마나 신비하고 경이로운 존재인지, “평생 생명의 존엄을 지킨 당신은/얼마나 복된 삶”(살아 반짝이는 당신은 경이로운 존재)인지 아는 시인은 생명을 귀히 여기는 마음으로 이번 시집을 묶었을 것이다. 지진이 났다에서도 드러나듯이 생명과 자연 생태계를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은 때론 지진을 두려워 할 줄 아는 마음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자연을 두려워할 줄 안다는 것은 그만큼 생명을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2.

차옥혜의 이번 시집에서 우선 눈에 띄는 시는 자연을 노래한 시들이다. 온갖 꽃과 나무와 풀 이름이 등장하는 차옥혜의 시를 읽다 보면, 시를 읽으면 조수초목의 이름을 알 수 있다고 시의 효용성을 제자들에게 역설했던 공자의 말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차옥혜의 시는 꽃 이름, 나무 이름, 풀 이름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여전히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배울 것이 적지 않음을 일러준다.

자연은 시인에게 여전히 경이의 대상이다. “개나리 덤불이/노란 꽃 기차를 몰고 가노랑나비/너울너울 춤을 추며 따라가는 봄 풍경은 시의 주체의 몸과 마음을 덩달아 움직이게 한다. “나도/노랑 꽃물 들어 둥둥 함께 가”(봄길)는 모습에서 봄 풍경과 하나 되어 어울리는 시의 주체의 합일의 경지를 읽을 수 있다. 벌써 일흔두 번째나 봄에 빠졌음에도 네 눈동자를 바라보며/네 심장 소리를 듣고 있으면/나는 여전히 만년 소녀”(일흔두 번째 봄)라고 시의 주체는 수줍게 고백한다.

 

붓꽃, 마거리트, 난초, 능소화, 작약,

하늘나리꽃, 백합, 빈카마이너, 장미……

꽃가마 타고 유월이 왔다

, 호두, 은행 나무들 아기 열매를 품고

소나무 새순들 하늘 향해 키를 키운다

논에는 어린 모들이 연둣빛 물결인 양 넘실대고

밭에는 당근, 가지, 풋고추, 상추, , 쑥갓

얼갈이, 케일, 아욱, 호박잎, 고구마순……

쑥쑥 자라 흙을 빈틈없이 덮어버린다

콩밭엔 서리태 모종들이 세상을 기웃거리고

, 녹두는 떡잎을 내민다

모든 풀과 나무들이

태양의 달 칠팔월을 꿈꾸며

설레는 유월

산자락 무덤도 새 잔디에 둘러싸여

쓰레기 더미조차 새 풀잎에 덮여

빛나는 아름다운 유월

어느 사람인들

초록빛으로 물들어 반짝이며

저 들녘에

희망 하나쯤 심지 않았으리

제 가슴에

희망 하나쯤 품지 않으리

-초록 물들어 희망을 심는 유월전문

 

여름 초입으로 들어서는 유월에도 생각보다 많은 꽃이 핀다. , 마거리트, 난초, 능소화, 작약, 하늘나리꽃, 백합, 빈카마이너, 장미 등등. 색깔도 다양하고 화려하다. 과연 꽃가마 타고 유월이 왔다고 할 만하다. “, 호두, 은행 나무들아기 열매를 품고다가올 가을 준비를 하고 소나무 새순들 하늘 향해 키를 키운다”. 논과 밭에는 어린 모의 연둣빛 물결과 당근, 가지, 풋고추, 상추, , 쑥갓등 각종 채소가 쑥쑥 자라 흙을 빈틈없이 덮어버린다”. 콩밭에도 서리태 모종과 팥, 녹두가 떡잎을 내민다. 푸릇푸릇 녹색의 풀과 나무들이/태양의 달 칠팔월을 꿈꾸며/설레는 유월이다. 생명을 지닌 식물들이 온 천지를 푸르게 뒤덮어버릴 것을 꿈꾸는 계절. 시의 주체는 쓰레기 더미조차 새 풀잎에 덮여/빛나는 아름다운 유월이라고 노래한다. 그의 말마따나 초록빛으로 물들어 반짝이저 들녘을 보며 희망 하나쯤 가슴에 품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생명을 지닌 존재들이 살아보겠다고 키를 키우고 자라는 유월을 시의 주체는 초록의 계절로, 희망을 심는 계절로 아름답게 그려낸다.

 

삼월에 사다 심은

대추나무 묘목 여섯 그루

사월 중순에 새싹 돋았는데

그중 한 그루는

지하수 퍼주어도 잠만 잔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가도

다른 묘목들은 꽃이 피는데

기척이 없다

 

긴 가뭄 끝에 삼 일간 장마 진 후

죽은 줄 안 대추 묘목에서 솟는 새순!

비가 살린 대추나무!

칠월 한여름에야 돋은 새싹!

반갑다 고맙다 신기하다

비야 감사하다 신비하다

 

목마른 초목들에 단비야 내려라

 

그동안 너무 일찍 포기한

목숨은 없었나

―「비가 살리는 초목전문

 

나무를 가꾸고 농사를 짓다 보면 자연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배우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다. “삼월에 사다 심은/대추나무 묘목 여섯 그루중 다섯 그루에 사월 중순쯤 새싹이 돋았는데 유독 한 그루는/지하수 퍼주어도 잠만잘 뿐 반응이 없었다. “오월이 가고 유월이 가도/다른 묘목들은 꽃이 피는데/기척이 없어서 사실상 시의 주체는 한 그루의 생명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반전이 일어난다. “긴 가뭄 끝에 삼 일간 장마 진 후/죽은 줄 안 대추 묘목에서새순이 솟은 것이다. 비가 생명의 기척이 없던 대추나무를 살린 것이다. 포기하고 있던 한 그루의 대추나무에서 칠월 한여름에야 돋은 새싹이라니! 반가움과 고마움과 신기함이 겹쳐진다. 그래서 단비라고 하는구나, 새삼 깨달았을 것이다. 여기서 시의 주체는 문득 자신을 돌아본다. “그동안 너무 일찍 포기한/목숨은 없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자연이 일으킨 기적은 이처럼 시의 주체를 성찰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 자연으로부터 얻는 배움에는 끝이 없다.

물에 대한 차옥혜 시의 예찬은 다른 시에서도 이어진다. “낮아지고 낮아져/세상 목숨을 떠받드느라/닳고 닳아져 저절로 하늘로 떠올라/구름이 되었다가/못 잊어 못 잊어/다시 비로 눈꽃으로/돌아오는 물을 보며 시의 주체는 꿈이여 님이여/나를 물이게 하여라”(낮은 곳으로 흘러 돌아오는 물)라고 기도한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처럼 시인의 마음도 그렇게 낮은 곳으로 흘러 세상 목숨을 떠받드는 자리에 머물고자 하는 것이겠다.

 

발도 무릎도 성치 않은 나를

오라오라 부르는 소리 끊임없어

드디어 너를 찾아가는 길

끊어질 듯 숨이 끊어질 듯

터질 듯 가슴 터질 듯

오르고 오른 산길

마침내 만난 너

아름다워라 눈부셔라

하얀 나무들의 숲

천사들의 마을인가

평화의 나라인가

성자들의 사원인가

얼마나 사랑이 넘치면

온몸에 하얀 꽃 피었을까

하늘도 내려와 기댈까

어느덧 내 안의 나는

자작나무들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

자작나무 나라에 망명하여

한 그루 자작나무로 선다

―「자작나무 숲에 망명하다전문

 

그렇다면 차옥혜의 시가 자연을 노래하며 꿈꾸는 것은 무엇일까? 인용 시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 “발도 무릎도 성치 않은시의 주체는 그럼에도 오라오라 부르는 소리 끊임없이 들으며 너를 찾아 가는 길에 오른다. “숨이 끊어질 듯” “가슴 터질 듯산길을 오르고 올라 마침내 만난 것은 다름 아닌 자작나무 숲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하얀 나무들의 숲을 바라보며 시의 주체는 자기도 모르게 아름다워라 눈부셔라감탄을 쏟아놓는다. 지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신비로운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며 얼마나 사랑이 넘치면/온몸에 하얀 꽃 피었을까감탄한다. 자작나무 숲을 비유하는 천사들의 마을”, “평화의 나라”, “성자들의 사원은 시의 주체가 생각하는 최고의 예찬이겠다. 성치 않은 발과 무릎으로 힘겹게 오른 산길에 만난 자작나무 숲을 바라보다 자작나무들의 그윽한 눈빛에 빠져마침내 자작나무 나라에 망명하여/한 그루 자작나무로서는 것을 상상한다. 아름답고 눈부신 것에 대한 예찬을 넘어 그 자체가 되고자 하는 합일의 마음이 자연에 기대어 시를 쓰는 시인의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3.  

차옥혜의 시에서 자연은 단지 예찬이나 동화의 대상은 아니다. “꽃씨를 나누니/절로 마음도 나누”(꽃씨를 나누니)게 되는 경험을 노래한 시처럼 더 많은 생명을 지키고 더 많은 것을 나눌 수 있는 것이야말로 자연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그런 점에서 차옥혜의 시는 땅을 일구고 씨를 뿌려 생명을 가꾸는 농부의 마음으로 쓰인다. 유독 이번 시집에 농촌이나 산 같은 자연을 지키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녀의 시가 자연에서 얻는 가장 큰 가르침도 생명을 키우고 나누는 바로 그 마음에 있을 것이다 

 

그해 겨울

기근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전쟁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은 영희는

시아버지와 어린 자식들을 위해

간신히 묽은 죽을 쑤어 밥상을 차렸다

시아버지는 단식으로 속병을 고친다며

식사를 거부하고 물만 마셨다

영희가 매일 수시로 아무리 죽을 권해도

시아버지는 한사코 막무가내였다

 

봄이 오자 뼈만 남은

시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시신을 염하고 시아버지의 요를 거두니

씨앗들이 깔려 있었다

볍씨, , 상추, 아욱, , 배추, ……

장례를 마치고 자식들과 고향을 떠나려던

영희는 통곡하며 씨앗을 끌어안았다

생명을, 희망을, 미래를 껴안았다

 

아버지 저도

사람 씨앗을 위하여

어떤 일이 있어도

곡식 씨앗을 지키겠습니다

아버지가 목숨으로 지킨 씨앗

아버지의 몸이고 넋인 씨앗

아버지와 나와 자식이 씨앗으로

한 몸입니다

조상과 후손과 나는 씨앗으로

함께 영원합니다

 

영희는 죽을힘을 다해

논밭을 갈고 씨를 뿌렸다

걸핏하면 울던 울보 영희는

그 이후 절대 울지 않았다

 

씨앗이 밀고 가는 세상

씨앗이 먹이는 세상

씨앗이 키우는 세상

씨앗은 생명이다 목숨이다 넋이다

씨앗은 아버지다 어머니다 나다 자식이다

 

초록 벌판에

종일 일하며 부르는 영희의 노래가

끊임없이 울렸다

―「씨앗의 노래전문 

 

시집 수록시 중에서 비교적 긴 이 시는 서사를 품고 있다. 전쟁으로 남편과 시어머니를 잃고 기근이 전염병처럼 퍼진 그해 겨울 시아버지마저 곡기를 끊고 세상을 떠난 영희의 사연이 시에 펼쳐진다. 기근이 심해 간신히 묽은 죽을 쑤어 밥상을 차렸지만 단식으로 속병을 고친다며 곡기를 끊고 세상을 등진 시아버지의 시신을 염하고 나서 시아버지의 요를 거두니 그곳엔 씨앗들이 깔려 있었다. “볍씨, , 상추, 아욱, , 배추, ……”. 며느리와 손주들을 위해 각종 씨앗을 이부자리에 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영희의 시아버지가 목숨을 바쳐 지킨 씨앗은 생명의 상징이자 희망의 상징, 미래의 상징이었다. 그러므로 영희는 시아버지를 향해 맹세한다. “사람 씨앗을 위하여/어떤 일이 있어도/곡식 씨앗을 지키겠다고. “아버지가 목숨으로 지킨 씨앗아버지의 몸이고 넋이며 조상과 후손을 이어주는 함께 영원한 씨앗임을 영희는 안다. 그러므로 죽을힘을 다해/논밭을 갈고 씨를 뿌씨앗이 밀고 가는 세상/씨앗이 먹이는 세상/씨앗이 키우는 세상을 일구어간 것이다.

이번 시집의 핵심어인 씨앗은 생명이고 목숨이고 넋이며, 아버지고 어머니고 나고 자식이다. 차옥혜의 시가 쓰고 싶어하는 시는 바로 그런 씨앗의 노래이다. 누군가 목숨을 바쳐 지킨 생명이자 목숨이자 넋인 노래. 그것은 씨를 뿌려 생명을 기르는 농부의 마음이자 시인의 마음이겠다.

 

콩밭에는 콩만

고추밭에는 고추만

심고 길러야 하는 농부의 밭에

바람은 수시로 와

쇠비름, 클로버, 새포아풀, 애기똥풀

엉겅퀴, 환삼덩굴, 메꽃, 강아지풀 ……

잡초를 옮겨놓는다

바람의 심술에

아니 세상 모두가 제 땅이고

제가 경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람의 아집 때문에

농부는

손가락이 아프며 등뼈가 굽고

옆구리가 결리며 무릎이 쑤신다

그래도 농부는 바람에

백기를

들지 않는다 들 수 없다

맞서 뚫고 나간다

― 「농부는 바람에 백기를 들지 않는다전문

 

씨를 뿌리고 거두는 농부의 마음이 어떤 것인지 짐작케 하는 시이다. 농부의 밭에 수시로 와 쇠비름, 클로버, 새포아풀, 애기똥풀”, “엉겅퀴, 환삼덩굴, 메꽃, 강아지풀따위의 잡초를 옮겨놓는 바람의 심술과 아집에 맞서, 농부는 손가락이 아프고 등뼈가 굽고 옆구리가 결리고 무릎이 쑤시도록 잡초를 뽑는다. “콩밭에는 콩만/고추밭에는 고추만잘 자라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무리 온몸이 아프고 쑤셔도 농부는 바람에/백기를/들지 않는다는 사실은 직접 경험하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바람에 백기를 들지 않고 맞서 뚫고 나가는 농부의 의지는 정성들여 생명을 지켜내기 위한 것임을 차옥혜의 시는 보여준다.

 

싹트지 못한 씨앗들에게

처진 잎이 도르르 말린 수국에게

타는 고구마 순, 호박 순, 고추, 가지에게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주니

잎새들이 고개를 쳐들고 눈물 흘린다

씨앗들이 움튼다

 

아파트 관리비를 몇 달 못 내어

수돗물이 끊겨 죽었다는 모녀

물 좀 줘, 물 좀 줘, 물 좀 줘

사방 벽을 넘지 못한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들의

소리 없는 비명이 새삼

물 호스를 든 나를 때린다

― 「가뭄에 물주기전문 

 

신성한 노동이 생명을 키우는 힘임을 알고 있는 차옥혜 시의 주체는 자연스럽게 삶이 고달픈 이들의 사연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이 또한 생명을 귀히 여기고 키우는 농부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싹트지 못한 씨앗들처진 잎이 도르르 말린 수국”, “타는 고구마 순, 호박 순, 고추, 가지에게” “지하수를 끌어올려 물을 주니/잎새들이 고개를 쳐들고 눈물 흘리고 씨앗들이 움트는 경험을 한 것에 대해 이 시는 주목한다. 그렇게 시들어가는 존재를 살려본 적이 있기에 아파트 관리비를 몇 달 못 내어/수돗물이 끊겨 죽었다는 모녀의 사연이 주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얼굴도 본 적 없는 그들의/소리 없는 비명이 새삼/물 호스를 든시의 주체를 때린 것이다. 시든 수국과 싹트지 못한 씨앗들에게 물을 주는 마음으로, 차옥혜의 시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고자 한다 

 

산과 살다 산에서 죽어 산에 묻혀

영원히 산과 함께하고 싶었다

그런데 보름 전 처음 보는 남자가 나타나

자기가 산의 주인이라며 등기권리증을 보여주고

산을 깎아 물류센터를 지으려고 하니

산을 떠나라고 했다

 

나무, 풀꽃, 산새, 고라니, 토끼, 다람쥐 어쩌고

태초부터 마을을 안고 있는 산을 죽인다니

할아버지 산지기는 눈앞이 캄캄하다

그때 조금만 더 나이가 많았어도 쌀 세 가마에

아니 쌀 백만 가마를 준대도

결코 산을 팔지 않았을 텐데

안 돼 안 돼 절대 산을 죽여선 안 돼

할아버지 산지기는 울부짖으며

왕 소나무에 자신의 몸을 꽁꽁 묶었다

―「벼랑에 몰린 할아버지 산지기부분

 

 

처녀의 몸으로 14명 고아들을

자식으로 입양하여

키우며 교육시키고 결혼시킨 님

편하고 위생적인 선교사 숙소 버리고

한옥에서 한복 입고 조선 사람 되어

22년간 오갈 데 없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품어주어

나이가 많으나 적으나 어머니로 부른 님

간호학교와 신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한 님

 

끝내 과로와 영양실조로 병에 걸려서도

마지막까지 사랑을 베풀다

죽어서도 자신의 몸을 의학용으로 기증한 님

남은 건 반쪽 담요, 동전 일곱 개, 강냉이 두 홉

최초 광주 시민 사회장으로 치른 장례 행렬엔

수많은 사람들이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울며 애통해하며 따랐다는

―「서서평부분

 

산에서 태어나 평생 산을 가꾸고 지키며 살던 할아버지 산지기와 식민지 조선에 선교사로 와 병자와 아이들과 여성들을 돌보며 조선의 어머니로 살다 간 독일 출신 미국 선교사 서서평의 삶은 서로 닮았다. 눈 감고도 산 전체를 훤히 알 정도로 산을 구석구석 돌보며 산 산지기 할아버지는 끝내 목숨 걸고 산과 산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을 지켜낸다. 산을 깎아 물류센터를 지으려는 자본의 욕망에 맞서 자연 생태계를 지켜냄으로써 산 아래 마을 주민들의 목숨까지 지켜낸다. 서서평 역시 자신을 필요로 하는 병자와 아이들과 여성 같은 약자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으며 고통 받는 사람들을/품어주간호학교와 신학교를 세워 인재를 양성한다. 이처럼 생명을 지키고 수호하는 이들의 삶에 차옥혜의 시는 공감하며, 자신의 시도 이들처럼 씨앗을 지키는 생명의 노래가 되기를 희망한다. 이번 시집의 제목이 씨앗의 노래가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4.

차옥혜의 이번 시집에는 아프거나 소외된 이들이 자주 등장한다. 그녀의 시는 늙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며 이들의 상처를 돌보고자 한다. 늙고 쇠약해져 가는 자신의 몸을 응시하는 시들도 같은 맥락에 놓인다. 차옥혜 시인은 노년의 삶을 따뜻한 성찰의 시선으로 들여다보며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시를 쓰고자 한다. 

 

낙엽이 낙엽을 덮어주며

마른 풀들이 마른 풀들을 껴안으며

빈 나뭇가지들이 빈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

서로를 위로하고 있는

적막한 겨울 들판이

적막한 겨울 숲이

적막한 나를 품는다

 

쓸쓸한 겨울 들이

고요한 겨울 숲이

뿜는 시리고 찬 은은한 빛이

쓸쓸한 내가

고요한 내가

읊는 시에

따뜻함으로 서린다

―「적막이 적막을 위로한다전문 

 

시의 주체가 그리는 적막한 겨울 들판의 모습은 홀로 있는 모습은 아니다. “낙엽이 낙엽을 덮어주며/마른 풀들이 마른 풀들을 껴안으며/빈 나뭇가지들이 빈 나뭇가지들을 바라보며/서로를 위로하고 있는모습에 가깝다. 적막한 겨울 들판과 겨울 숲이 적막한 나를 품는까닭은 여기에 있다. 외로운 영혼이 외로운 영혼을 알아보듯이 적막한 겨울 들판과 적막한 겨울 숲은 적막한 나를 품는다. 적막함과 쓸쓸함과 고요함은 어쩌면 시의 숙명이기도 하다. 겨울을 맞은 들과 숲이 쓸쓸하고 고요한 빛을 내뿜는 것을 보며 쓸쓸하고 고요한 시의 주체도 그런 풍경에 공감한다. 적막만이 적막을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옥혜의 시에는 바로 그 적막하고 쓸쓸하고 고요한 겨울 풍경이 따뜻함으로 서린다. 적막함을 체득한 시의 주체는 적막한 영혼을 위로하는 따뜻한 시를 쓰고 있다 

 

비정규직으로 떠돌다

오랜만에 집에 들른 노총각 아들

한밤중 인기척에 깨어보니 화장실에서

소리 죽여 토하네

 

공중 줄타기 같은 일자리에 시달려

밥 제때 제대로 못 챙겨 먹어

마른 아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따뜻한 밥과 국 듬뿍 담아

밥상을 차려주며

밥 많이 먹어라 밥이 힘이다

라는 말 주문처럼 되풀이하는 것

 

고달파 줄어든 위로

어미 기분 좋게 하려고

억지로 많이 먹어 체했나

 

아들 몸과 마음 살찌우려다

되레 병만 준 어미

속수무책으로 가슴 쓰라린 밤

― 「사랑도 넘치면 독이 되나 봐전문

 

비정규직으로 하루하루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이 잘 그려진 시이다. 정규직 진입이 점점 어려워지는 세상에서 비정규직으로 공중 줄타기 같은 일자리에 시달리느라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겨 먹어/마른 아들이 어머니 눈에는 계속 밟혔을 것이다. 그런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따뜻한 밥과 국 듬뿍 담아/밥상을 차려주는 것밖에 없다는 생각에 밥 많이 먹어라 밥이 힘이다라는 말 주문처럼 되풀이했을 뿐이었겠다.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아들은 꾸역꾸역 억지로 많이 먹었다 체하고 말았는데, 혹시나 어머니가 들을까 봐 화장실에서/소리 죽여 토하고 있다. “한밤중 인기척에 깨어그런 아들의 모습을 목격한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쓰라렸을까. 아들은 어머니를, 어머니는 아들을 서로 배려하고 위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자 행동이지만 아들 몸과 마음 살찌우려다/되레 병만 준것은 아닌지 어미의 마음은 속수무책으로쓰라리다. 비정규직 아들을 둔 어머니의 마음으로 차옥혜의 시는 소외된 이들의 아픔을 어루만진다.

꽃이 모두에게 꽃이 아니구나에서도 벚꽃들이 내민 수만 손을 잡고/벚꽃들의 눈빛에 끌려/벚꽃 세상을 떠돌며/살고 싶어 살고 싶어노래하고 있는 순간 벚꽃 아래에/스스로 목숨을 내려놓은 친구가 있었음을 알고, 친구의 아픔을 뒤늦게 알았다는 미안함에 자책하는 시의 주체가 등장한다. 세상의 모든 아픔을 끌어안을 수는 없겠지만 시의 주체는 누가 무엇이 너를 가로막았는지 벚꽃이 눈부신 이 봄날에/벚꽃을 등지고/어디를 가고 있는지 묻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식민지 조선 청년 일만 명이나 강제징집하여

위협으로 폭탄을 짊어지고

미군 전차에 뛰어들어 폭사하게 만들고

총알받이로 세워 학살한

전범 일본이 70년이 훌쩍 지나도록

진실을 감추고 침묵하고 있어

한국인위령탑은 억울하고 원통해서

잠들지 못하고 통곡하고 있다

 

고국이 고향이 그리워

가족이 보고 싶어

눈물 솟아

잠들 수 없어 통곡하고 있다.

 

한국의 돌로 온 민족의 이름으로 탑을 세워

명복을 비오니 편히 잠드소서

라고 조국에서 비문 새겨주었지만

숨겨진 모든 조선 전사자들의 진상과 이름 밝혀져

합동 위령탑 진실 위령탑 될 때까지는

한국인위령탑 313명 넋들은 쓰라리고 아파

결코 자신들만 잠들 수 없어 통곡하고 있다

 

천명 가난한 조선 처녀들 취직시켜준다고 속여

끌고 와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짓밟고도

아직도 숨기고 참회하며 사과하지 않는

일본이 화나서도 통곡하고 있다

―「통곡하는 오키나와 한국인위령탑전문

 

소외된 이들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차옥혜의 시는 종종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이 땅에서 벌어진 학살의 역사를 증언하기에 이른다. “식민지 조선 청년일만 명이나 강제징집미군 전차에 뛰어들어 폭사하게 만들고/총알받이로 세워 학살한/전범 일본이 70년이 훌쩍 지나도록반성은커녕 진실을 감추고 침묵하고있다는 사실에 원통해한다. 오키나와에 세워진 한국인위령탑은 억울하고 원통해서/잠들지 못하고 통곡하고 있는데 천명 가난한 조선 처녀들취직시켜준다고 속여/끌고 와 강제로 일본군 위안부로 짓밟고도” ‘일본군 위안부할머니들이 20명밖에 생존하지 않은 지금까지도 사과할 줄 모르고 오히려 적반하장으로 경제 보복을 자행하고 있는 일본의 만행에 차옥혜의 시는 분노한다. 아직도 제대로 된 애도의 시간을 갖지 못한 역사의 아픈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과 참회할 줄 모르는 이들을 향해 분노하는 마음은 사실상 다르지 않다. 학살당한 기억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은 어둠을 넘어” “빛을 몰아오는” “광장에 만발한 촛불 꽃 마음 꽃”(촛불 꽃 마음 꽃)을 기리는 마음으로 확장된다. 신동엽의 시가 그랬던 것처럼 차옥혜의 시도 우리의 아픈 역사를 기억하고자 하며 오늘의 역사적 순간 또한 기억하고자 한다. “광장에 가득 핀/촛불 꽃의 기억, 그 감격의 역사적 순간에 함께했던 기억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불러온 촛불 꽃 마음 꽃이 광장을 물들이기까지 쌀값 폭락 농민들의 어려움 호소하고/젊은 모세들의 울타리가 되어주려다/공권력의 정조준 물대포에 쓰러져/뇌출혈로 의식 잃어 뇌수술 받고/300여 일이나 사투하다 영면”(떨기나무 불꽃을 본 모세들)한 백남기 농민의 희생이 있었음을 또한 잊지 않으려 한다 

  5.  

자연으로부터 차옥혜의 시는 생명의 소중함을 배웠고, 생명의 소중함을 지킬 줄 아는 마음으로 상처입고 소외당한 이들의 아픔을 돌본다. 그녀의 시가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학살의 현장을 기억하고자 하는 것도, “이제 희망을 버리고/호박이나 바람개비로 살자 하다가도 어둠을 뚫고 들려오는 희망이 부르는 소리”(희망이 부르는 소리)를 끝내 외면하지 못하는 것도 역사를 신뢰하고 생명의 존엄함을 지킬 줄 아는 세상을 향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시집에서 시와 시인에 대한 시가 자주 눈에 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게 읽힌다 

 

언젠가 장님이 될 거라는 의사의 말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별이 되고 꽃이 되어

내 눈을 찔러댄다

 

쓰리고 아파서 울고 울다가

사십오 년 전 결혼할 때

어머니가 지어주신 목화솜 이불

이불장 깊숙이 잠자던 목화솜 이불

꺼내어 처음으로 솜을 타서

깔고 덮는다

포근한 어머니 품에 안긴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 들린다

 

두려워 마라

눈을 감아도 내가 보이잖아

보이는 동안 본 것들을

감사하고 사랑하며

마음의 솜틀에 틀어

마음의 빛으로 보며

마음의 백지에 시를 쓰거라

―「어머니가 지어주신 목화솜 이불전문 

 

젊은 날에는 사느라 바빠 몸을 돌볼 마음의 여유를 갖지 못하다가 나이 들면서 멀쩡했던 몸이 하나둘 아프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몸을 돌아보게 된다. 무릎이나 발, 손목이 고장 나는 사람도 있고 눈이 침침해지고 귀가 어두워지는 사람도 있다. 신체 부위는 달라도 어디든 젊은 날의 몸 같지는 않고 그 사실을 받아들여야 함을 알면서도 문득 서러움에 젖기도 한다. 시의 주체도 눈에 이상이 생겨서 병원에 갔다가 언젠가 장님이 될 거라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그러자 보이는 모든 것이/별이 되고 꽃이 되어” “눈을 찔러댄다”. 평생 책을 가까이하고 시를 써온 시의 주체에게 눈이 안 보일지도 모른다는 말은 사형선고와도 같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쓰리고 아파서 울고 울던 주체가 위안을 얻는 것은 사십오 년 전 결혼할 때/어머니가 지어주신 목화솜 이불꺼내어 처음으로 솜을 타서/깔고 덮으면서였다. 어머니가 지어주신 목화솜 이불은 어머니의 품처럼 포근하고 따뜻해 마치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고 어머니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마음의 안정을 얻는 시의 주체에게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두려워 마라. “눈을 감아도 내가 보이듯이 눈을 잃어도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볼 수 있을 거라고, “보이는 동안 본 것들을/감사하고 사랑하며/마음의 솜틀에 틀어/마음의 빛으로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의 백지에 시를 쓰라는 어머니의 말은 시의 주체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말이기도 하다.

 

 

깊고 먼 그 이름이다

 

바람 바람꽃이다

 

발아래 있는 하늘이다

 

아름다운 독이다

 

날마다 되돌아가는 고향이다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하늘이다

 

숲 거울이다

 

만날 수 없는 희망이다

 

희망이 부르는 소리다

 

눈사람이다

―「전문

 

차옥혜 시인에게 시란 무엇일까? 그것은 깊고 먼 그 이름이자 바람 바람꽃”, “발 아래 있는 하늘”, “숲 거울처럼 자연이 선사한 것이자 날마다 되돌아가는 고향인 어머니의 마음이다. 때론 흔들리고 회의하지 않는 것도 아니지만 그 흔들림 속에 가득한 하늘이다. “만날 수 없는 희망이지만 그럼에도 끝내 외면할 수 없는 희망이 부르는 소리. 마치 눈사람처럼. 녹아 버려도 눈이 오면 또 설레면서 만들 수밖에 없는 눈사람처럼 말이다.

차옥혜의 시가 그리는 시인은 끊임없이 어둠을 뚫는/뿌리의 노래를 새기는/항상 씨앗의 꿈을 꾸는/해와 달을 부어 키운 시 나무로/세상의 아픔을 사르는/죽은 사람, 산 사람, 올 사람/모두 함께 천년만년/풀잎의 말로 속삭이며 춤추고 싶은/사람”(시인)이다. ‘씨앗의 노래를 부르며 씨앗의 꿈을 꾸는 사람. “죽어서 빛나는 전복처럼 겉만 보거나 겉만 챙기지말고 고운 내면의 빛”(전복 껍질)을 그릴 줄 아는 사람. 어쩌면 풀릴 듯 풀릴 듯 풀리지 않는/수학을 풀다 수학 공식에/머리 박고 쓰러병원에 실려 가면서/조금만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꼭 풀 수 있는데/들릴 듯 말 듯 중얼거리는집념의 수학자(집념의 수학자)가 그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시인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에 시인은 어느 시집이든 찾아오면/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으며/노트에 감동한 시 구절 기록하고/모르는 시어 일일이 사전에서 찾아 쓴 후/백지에 가장 자신을 울린 시 한 편/펜으로 꾹꾹 눌러 쓴 후/여백에 빼곡히 감동한 시/제목과 쪽 번호 나열하고 시평을 써서/폐지를 접어 만든 편지봉투에 넣어/시집 저자에게 보내주는”(나비 시인) ‘나비 시인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차옥혜의 시가 부르는 씨앗의 노래에 그렇게 화답할 아름다운 독자가 저기, 온다.

 

Posted by 차옥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