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문화 시대의 서정(抒情), 그 전망의 시학
오성호ㆍ이경철ㆍ김용희ㆍ심선옥ㆍ김진희
이 계절의 좋은 시
차옥혜.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내일을 여는 작가》5~6월)
갑자기 소낙비 쏟아져/ 길 가던 사람이//늙은 느티나무 훵하게 삭은 몸통에서/ 비를 피하고 있다.// 50여 년 사막을 건너다보니/ 내 뼈에 구명이 숭숭 뚫려/ 바람이 집을 짓고 새떼가 날고/ 강물이 흐르고 풀들이 흔들린다/ 사람들이 춤을 춘다.// 한 아주머니가 애 낳은 딸에게 고아주려고/ 늙은 호박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속이 텅 빈 것을 고르고 있다.
차옥혜<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위의 시에서 늙은 느티나무와 구멍이 숭숭 뚫린 내 뼈, 그리고 속이 텅빈 늙은 호박은 모두 소멸을 향해 가는 사물들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들이 간직한 덕목들을 주시한다. 느티나무는 늙었으되 그 자신의 몸으로 사람들을 보듬는다. 나 또한 사막 같은 삶을 살다가 소진된 상태이다. 그러나 자신이 비워졌을 때 시인은 비로소 충만한 자연인이 됨을 깨닫는다. 마찬가지로 늙고 텅빈 호박은 새로운 생명 잉태를 위해 자신의 몸을 한껏 비워야 한다. 이는 소멸을 통해서만이 충만해질 수 있다는 역설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삶에 내재한 긍정적 의미들에 주목할 때 하찮아 보이는 일상의 삶도 그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문학평론 1997년 가을호 15쪽, 55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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