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거울의 시학

  맹문재(孟文在, 문학평론가안양대 교수)

 

   1.

차옥혜 시인이 제시한 숲 거울의 개념은 숲의 의미를 시문학으로 심화시키고 있기에 주목된다. 지금까지 숲을 제재로 삼고 노래한 시인들이 많았고 앞으로도 많겠지만, 차옥혜 시인은 그 누구보다도 본격적이고 집중적으로 노래했다. 숲을 단순히 제재로 삼은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품어 숲의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마련해준 것은 물론 숲과 인간의 공동체적인 운명을 자각시킨 것이다.

시인은 시집의 서문에서 숲 거울의 근거를 나는 오래전부터 작고 작은 숲 하나 낳아 길렀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그 숲이 오히려 나를 기르기 시작했다. 숲은 나에게 때로는 어머니, 스승, 친구, 애인, 자식이 되어주기도 하고 나와 세계를 환히 비추어주기도 한다.”라고 밝혔다. 자신이 낳아 기른 숲이 오히려 자신을 기르고 있다고 진단하고 이 세계를 환히 비추어주는 숲을 노래한 것이다.

인류는 자신의 생산물을 만드는 데 필요한 원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나 신화 및 설화를 낳은 데 지대한 역할을 한 숲을 파괴해왔다. 그리하여 사막화, 대기 오염, 수질 오염, 온실 효과, 산성비 등이 증가했고, 생물의 종수는 감소하거나 멸종했다. 숲이 지금처럼 파괴된다면 인간의 문명이 지속될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지진, 바람, 홍수, 화산뿐이랴/생명끼리도 줄기차게 싸우며 죽이는 세상”(나는 바보인가 봐 )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숲을 인간을 지켜주는 최후의 보루로 삼고 따르고 있는 시인의 노래는 의미가 크다. 

 

숲에 들면

내가 보인다

앞만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인다

현실만 보이지 않고 과거도 미래도 보인다

현상만 보이지 않고 숨은 것도 보인다

죽은 목숨들의 영혼도 보인다

바위, , 하늘, 구름, 바람, 계곡물의

마음도 보인다

 

세상을 등지려고 숲 거울에 든 그 사람은

자신을 에워싼 수백 송이 달맞이꽃이

밤새워 꽃문을 여는 것을 보고

세상으로 돌아갔다

어떤 사람은 숲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앞은 약한 짐승을 쫒는 맹수이고

뒤는 벼락 맞은 나무인 것을 보고

아예 숲 거울에 자리를 펴고 도인이 되었다

 

나는 숲 거울에서 지금 무엇을 보는가

앞은 더덕이고 뒤는 나비인 나

뿌리와 날개가 대지와 하늘이 맞서

안개가 낀다

―「숲 거울전문

 

위의 작품의 화자는 숲에 들면/내가 보인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다시 말해 이전에 보였던 것과 달리 보이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그 모습은 앞만 보이지 않고 뒤도 보이는 것이고, “현실만 보이지 않고 과거도 미래도 보이는 것이고, “현상만 보이지 않고 숨은 것도 보이는 것이다. 심지어 죽은 목숨들의 영혼도 보이고, “바위, , 하늘, 구름, 바람, 계곡 물의 마음도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한쪽만 보며 살아왔는데 다른 쪽도 보게 된 화자는 보이는 쪽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쪽도 봐야겠다고 생각한다. 현실만 보면서 살아왔는데 과거와 미래도 봐야겠다고, 현상만 보아왔는데 상상의 세계도 봐야겠다고, 영혼과 무생물의 마음도 봐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리하여 에 대해 이전과는 다른 세계인식을 갖는다. 마치 자연의 신비와 우리의 느낌이 만나 !’ 또는 -하는 순간이 신의 축복이고 삶의 절정이고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 싶은 감사의 시간을 갖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음을 깨달은 사람세상을 등지려고 숲 거울에들었다가도 자신을 에워싼 수백 송이 달맞이꽃이/밤새워 꽃문을 여는 것을 보고/세상으로 돌아왔다. 또한 어떤 사람은 숲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앞은 약한 짐승을 쫒는 맹수이고/뒤는 벼락 맞은 나무인 것을 보고/아예 숲 거울에 자리를 펴고 도인이 되었다”. 모두 숲을 거울로 삼고 자신의 운명을 바꾼 것이다.

그에 비해 화자는 나는 숲 거울에서 지금 무엇을 보는가라고 묻고 있다. “을 거울로 삼고 세속으로 되돌아온 사람이나 도인이 된 사람과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의 마음에 안개가 낀상황도 그와 같은 면을 나타낸다. 화자는 앞은 더덕이고 뒤는 나비인 나뿌리와 날개가 대지와 하늘에 동화되지 못하는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정직하게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다시 숲을 바라본다 

   2.  

 

들이 울고 있구나

숲이 울고 있구나

 

있다가 떠나버린 사람

왔다가 가버린 사람

꽃들만 남아

피고 있구나 지고 있구나

들과 숲의 노래

누가 들을까?

꽃들의 춤

누가 볼까?

들과 숲의 말

누가 전할까?

 

들이 울고 있구나

숲이 울고 있구나

―「우는 들, 우는 숲전문

 

과학기술의 발달로 문명사회가 진행될수록 들이 울고” “숲이운다. “있다가 떠나버린 사람이나 왔다가 가버린 사람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은 들이나 숲에서 살다가 도시로 주거지를 옮기고 있다. 도시는 많은 일터가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 시설과 질 높은 의료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지나친 경쟁과 인간 소외와 갖가지 범죄와 부담되는 생활비와 오염된 공기와 물 등을 들면서 도시를 비판하지만 숲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도시의 생활에 익숙해져 자신의 거주지를 떠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하여 들과 숲의 노래를 듣는 사람도, “꽃들의 춤을 구경하는 사람도, “들과 숲의 말을 전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물론 사람이 숲에 드는 일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가령 사람이 농경지를 확보하기 위해 개간하거나 땔감을 마련하거나 공장을 가동하거나 전쟁을 수행하려고 기지로 삼으면 숲은 파괴된다. 그렇지만 사람에 따라 숲은 달라질 수 있다. 가령 김탁환의 중편소설 앵두의 시간에 등장하는 치숙’(癡叔) 같은 인물은 숲을 절대로 해치지 않고 오히려 살려낸다.

앵두나무 아래의 평상에 앉거나 엎드려 글을 쓰면서 , 봐라. 저 산과 나무와 풀들! 참으로 아름답지 않니? 골방에서 벽만 보고 글을 쓰면 내 문장에 최고란 착각이 들어. 하지만 여기 이렇게 앉으면 주위를 돌아보기만 해도 내 글이 얼마나 부족한지 깨닫지.”라고 겸손하게 글을 쓰는 치숙은 검은 돛배라고 불리는 집을 산봉우리 가까운 밤나무 위에 지었다. 나무와 한 몸인 집을 원해 줄기나 가지를 자르지 않고 판자에 구멍을 뚫고 지었다. 치숙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새들이 날아들어 발꿈치를 쪼기도 했다. 치숙은 그러면서 매일 앵두나무 백 그루 이상을 삼십 년 동안 돌보았다. 그와 같은 정성이 있었기에 치숙은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하는 처지인데도 불구하고 병원에서 빠져나와 농장의 앵두나무를 찾고는 함께해온 나무들과 일일이 포옹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치숙은 한 권의 소설도 간행하지 못했지만 평생 자연과 함께 써왔기에 위대한 작가라고 볼 수 있다.

어느덧 은 생태맹(ecological illiteracy)인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한 채 울고 있. 생태맹은 자연계나 생명 현상에 대한 지식의 결여뿐만 아니라 자연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나 감성의 결핍을 의미한다.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인간과 자연의 거리는 점점 멀어져 인간이 천부적으로 지닌 생명 현상에 대한 호기심이나 경외감이나 감성적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숲에 대한 간섭과 파괴를 가져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는 울고 있다. 

 

나는 지구에서 제일 먼저 해가 뜨는

태평양 적도 산호섬 나라 키리바시에 사는

다섯 아이의 엄마입니다

 

내 자식들을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해수면이 높아져 우리 섬나라가 잠겨가요

없던 허리케인이 찾아와 집들을 쓸어가요

담수가 오염되고 농작물이 죽어가요

나무, , , 물고기처럼 살며

행복했던 우리 자식들이

목숨 붙일 땅이 사라져가요

 

이 모두가 당신네 가족과 이웃이

편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서

에너지를 낭비하고

숲을 없애며 쓰레기를 태우고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며

문명과 문화를 즐기면서

만들어낸 이산화탄소가

북극의 빙하를 녹여 생긴

기후변화 때문이라 합니다

 

제발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

우리를 희생시키지 마세요

 

내 자식들을 우리나라 어린이들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겨울이 있는 문명국 어머니들게전문

 

키리바시(Kiribati)는 오세아니아에 있는 섬나라로 일출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국가이다. 1892년 영국의 보호령이 되어 길버트제도라고 불리다가 1979년 독립했다. 2차 세계대전 중 미군과 일본군이 전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언어는 영어와 키리바시어를 공용어로 사용하고, 기독교가 주된 종교이다.

키리바시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에 국토가 잠길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이다. 11만 명 정도의 인구가 살아가고 있는데,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수몰 위험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약 2,000떨어진 피지섬에 영토를 구입해 대규모의 이주 계획을 검토하는 상황이다. 지구의 기후 변화에 따라 최전선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키리바시의 해발은 해수면보다 약 1.8m 정도 높은 것에 불과해 지구 온난화의 속도가 지금처럼 진행된다면 21세기 말에 국토가 침식당할 것으로 관측된다. 현재에도 연간 강우량이 감소해 주민들의 식수원인 지하수가 소금물로 바뀌고 있고, 파도가 육지로 범람하면서 경작지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어획량이 감소하고 있다. 위험한 상황을 피해 주민들이 수도 타라와로 피난 오면서 인구 과밀, 물가 상승, 실업률 증가, 위생 시설 부족 등의 사회 문제까지 대두되고 있다.

위의 작품은 태평양 적도 산호섬 나라 키리바시에 사는/다섯 아이의 엄마를 통해 그곳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리고 있다. 환경 변화로 키리바시해수면이 높아져” “잠겨가, “없던 허리케인이 찾아와 집들을 쓸어가, “담수가 오염되고 농작물이 죽어가고 있다. “나무, , , 물고기처럼 살며/행복했던 우리 자식들이/목숨 붙일 땅이 사라져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작품의 화자는 내 자식들을 우리나라 어린이들을/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라고 호소한다.

키리바시해수면이 높아지는 이유는 당신네 가족과 이웃이/편리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위해서/에너지를 낭비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숲을 없애며 쓰레기를 태우고”, “문명과 문화를 즐기면서/만들어낸 이산화탄소가/북극의 빙하를 녹여 생긴/기후 변화 때문이다. 따라서 키리바시의 주민들에게 작품의 화자는 미안함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키리바시의 환경 문제가 자신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기에 걱정도 한다. 그리하여 다섯 아이의 엄마제발 당신들의 행복을 위해/우리를 희생시키지 마세요라고 호소하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인간이 화석 연료의 소비를 줄이지 않는다면 해수면이 상승해 키리바시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화자는 그와 같은 큰 피해가 자신에게도 미칠 것을 알고 있다. “키리바시가 직면한 문제는 곧 자신이 겪게 될 미래의 상황이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지구 온난화로 해수면이 높아지면서 섬의 일부가 바닷물에 잠겨 국가 위기를 선포한 투발루(Tuvalu)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숲으로부터 멀어질수록 기후 난민이 될 수밖에 없다. 곧 숲과 가까워져야만 인간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이다. 

   3.

인간과 숲이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인간과 숲이 이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로서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관계를 개선시켜 나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의식의 주변부로 밀려나 있는 숲을 중심부로 가져와야 한다. 인간 중심적인 자연관을 극복하고 서로의 생명력을 높여야 하는 것이다 

 

천년 숲속을 걷고 걸으니

나는 천년 나무

광활한 초원을 바라보고 바라보니

나는 광활한 초원

 

숲과 초원이 기르는 아름다운

사람, 마을, 도시

사람이 가꾸는 아름다운

, 초원, 꽃밭

 

생명과 생명이 사랑으로 껴안는 곳

맑고 깨끗한 하늘과 땅이 눈 뜨는 곳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곳

, 초원, 꽃의 나라

 

숲과 사람과 초원에

고이고 고이는 평화와 꿈

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

―「숲에서 숲으로 초원에서 초원으로전문

 

천년의 숲속을 걷고 걸으니/나는 천년 나무라는 화자의 노래는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광활한 초원을 바라보고 바라보니/나는 광활한 초원이라는 노래도 마찬가지이다. 아름다운 숲속을 걸으면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맑은 숲속을 걸으면 맑은 사람이 된다. 고요한 숲속을 걸으면 고요한 사람이 되고, 품위 있는 숲속을 걸으면 품위 있는 사람이 된다. 고요한 숲속에서 시끄럽게 행동하는 사람은 없고, 품격을 지닌 소나무 숲속에서 경박하게 떠드는 사람은 없다. 결국 사람이 가꾸는 아름다운/, 초원, 꽃밭이 마련되면 숲과 초원이 기르는 아름다운/사람, 마을, 도시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생명과 생명이 사랑으로 껴안는 곳이고, “맑고 깨끗한 하늘과 땅이 눈 뜨는 곳이다. “사람이 꽃이고 꽃이 사람인 곳이기도 하다. 그와 같은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 화자의 희망이다. 우리의 의무이기도 하다. 생명을 중시하는 인간만이 숲과 사람과 초원에/고이고 고이는 평화와 꿈을 이룰 수 있고 흐르고 흐르는 생명의 강을 살릴 수 있는 것이다.

숲과 친밀한 관계를 가질수록 인간은 인간다워진다. 숲의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있고 맛을 느낄 수 있고 색감을 체험할 수 있고 촉감을 느낄 수 있기에 숲다워지기도 한다. 인간과 숲이 서로 생명력을 낳는 관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새끼들을 지키기 위하여

무슨 짓을 못하랴

만개의 푸른 입으로

세상 먼지 다 삼켜

섬세한 천연 필터 폐로 걸러

맑고 신선한 공기 뿜어낸 허공에

새끼마다 몸에 꼭 맞는 집을 지어주고

그 집을 독으로 에워싸

어떤 짐승도 벌레도

내 새끼들을 넘보지 못한다

내 새끼들은

청정하고 평화로운 집에서

한 점 얼룩 없는

맑고 고운 초록 눈 뜨고

천년 미래를 꿈꾼다

 

알 수 없어라

기진맥진하다가도

자식들만 보면

푸릇푸릇 솟구치는 내 핏줄

―「에미 은행나무의 자부심전문

 

새끼들을 지키기 위하여/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이 에미 은행나무의 자세이다. 그리하여 에미 은행나무만개의 푸른 입으로/세상 먼지 다 삼킨다. 그리고 섬세한 천연 필터 폐로 걸러/맑고 신선한 공기 뿜어낸 허공에/새끼마다 몸에 꼭 맞는 집을 지어준다. 또한 그 집을 독으로 에워싸/어떤 짐승도 벌레도” “새끼들을 넘보지 못하게 한다. 그 결과 새끼들은/청정하고 평화로운 집에서안전하게 살아간다. “한 점 얼룩 없는/맑고 고운 초록 눈 뜨고/천년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에미 은행나무새끼들에 대한 이와 같은 자세는 부모가 자식에게 헌신하는 인간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에미 은행나무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과 같은 본성이 인간에게도 있음이 확인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숲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점점 자식을 사랑하지 못한다. 다른 인간을 지배하고 학대하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는 데서 보듯이 이기적으로 사랑할 뿐이다. 이렇듯 숲이 사라진 인간세계는 둘러보고 둘러보아도/숨 막히는 어둠뿐”(장님이 되라 하네)이다. 따라서 다른 생명을 중시하듯 숲을 품어야 인간의 길을 열 수 있는 것이다 

   4. 

세상은 거대한 눈꽃입니다

길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푸른 보리밭과 생수가 솟구치는 울창한 삼나무 숲은

전설이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배고픈 조카들 때문에 또다시 빵조각을 훔쳐

교도소에 재수감되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빵을 찾아 죽음일지도 모르는

눈 산을 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폭설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쳤지만

얼어 죽었습니다

가엾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눈꽃 속을 헤매다

죽어야 합니까

천년입니까 만년입니까

봄은 정녕 꿈꿀 수 없는 것입니까

햇살이 새싹의 볼을 어루만지는 벌판을

배고픈 이들을 위한 무료 빵가게를

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

생명이고 사랑이고 평화고 희망이고 영원인 당신이시여

세상을 덮어버린 눈꽃에 길을 내시며 오소서

눈꽃을 헤쳐 언 손들을 잡아끌어 언 몸을 품어주소서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

―「쿼 바디스 도미네전문

 

외경 사도행전 중에서 유명한 베드로 행전에 따르면 베드로가 로마에서 정결한 생활을 설교하자 감명 받은 많은 부인들이 부부생활을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로마의 집정관인 아그리파 총독과 황제의 친구인 알비누스가 베드로에게 복수하려고 나섰다. 죽음의 위협을 느낀 베드로는 신도들의 권유에 따라 변장하고 로마를 빠져나갔다. 그런데 도망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났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 쿼 바디스 도미네?”(Quo Vadis Domine?),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는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에 들어간다고 대답했다. 베드로는 믿기지 않아 주님,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하고 거듭 물었다. 예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제야 베드로는 예수의 뜻을 깨닫고 기쁜 마음으로 로마로 돌아갔다. 일찍이 예수는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요한복음211923)라고 말했는데, 그 일을 맞이해야 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베드로는 군인들에게 순순히 잡혔다. 베드로는 자신이 죄 많은 인간으로 태어났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달라고 사형 집행인들에게 청했다. 그리고 감사의 기도를 바치고 순교했다.

작품의 화자가 쿼 바디스 도미네를 인유한 것은 자신이 처한 환경이 심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세상은 거대한 눈꽃으로 뒤덮여 길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눈꽃은 아름답거나 깨끗한 대상이 아니라 인간의 길을 지우는 암담하고 추운 상황을 상징한다. 화자는 푸른 보리밭과 생수가 솟구치는 울창한 삼나무 숲전설이 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상황이 도래되었다고 진단한다. 자연 파괴로 인해 인간의 길이 사라졌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묻는다. ‘당신은 우주를 창조한 신일 수 있고, 자연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인간의 현재 상황을 감당하고 개선시킬 수 있는 존재이다.

울창한 삼나무 숲이 사라져 인간의 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현재의 상황은 심각하다. “장발장은 배고픈 조카들 때문에 또다시 빵조각을 훔쳐/교도소에 재수감되고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은 빵을 찾아 죽음일지도 모르는/눈 산을 넘고 있. “어떤 이들은 폭설에 맞서 바리케이드를 쳤지만/얼어 죽고 만다. 그리하여 화자는 가엾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눈꽃 속을 헤매다/죽어야 합니까라고 당신에게 묻는다. “천년입니까 만년입니까라거나 봄은 정녕 꿈꿀 수 없는 것입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결국 햇살이 새싹의 볼을 어루만지는 벌판을/배고픈 이들을 위한 무료 빵가게를/언제쯤 볼 수 있습니까라고 물으며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희망하고 있는 것이다.

화자는 그와 같은 세상을 이루는 길을 알고 있는데, “당신은 어디로 가십니까라는 베드로의 물음을 인유한 것에서 확인된다. 베드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를 피해 로마를 벗어나려고 하다가 예수의 말씀을 깨닫고 돌아와 순교했다. 작품의 화자 역시 베드로와 같은 길을 선택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푸른 보리밭과 생수가 솟구치는 울창한 삼나무 숲으로 되돌아가 되살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인간이 교도소에 가지 않고, 얼어 죽지 않고, 빵을 구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화자는 생명이고 사랑이고 평화이고 희망이고 영원인 당신이시여/세상을 덮어버린 눈꽃에 길을 내시며 오소서/눈꽃을 헤쳐 언 손들을 잡아끌어 언 몸을 품어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자신이 추구하는 길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당신에게 호소하는 한편 그 길을 이루고자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이다.

푸른 보리밭과 생수가 솟구치는 울창한 삼나무 숲을 되살리면 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니다. 공상도 아니다. 숲은 분명 인간을 살리는 빵을 제공한다. 그와 같은 사실은 프랑스의 작가 장 지오노(Jean Giono)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탁광일 옮김)에서 여실하게 증명된다.

작품의 화자는 약 40년 전에 알프스의 높은 산간 지방에 하이킹을 나섰다가 한 양치기를 만났다. 그의 이름은 엘지에 부피에였는데 아내와 외아들을 잃고 산 위에 올라와 살고 있었다. 화자는 그에게 물을 얻어 마신 뒤 그가 살아가는 방법이 신기해 이틀 동안 함께 지내며 살펴보았다. 그는 땅이 나무가 없어 죽어가는 것을 살려내려고 도토리를 심고 있었다. 화자는 그 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5년간 근무하느라고 그 양치기를 잊고 살았다. 그러다가 전역한 뒤 그가 떠올라 찾아갔는데, 참나무들이 자란 모습에 감동해 할 말을 잃었다. 물이 보이지 않던 산에 개울물이 흐르는 것도 보였다. 그 뒤 화자는 매년 양치기를 찾았다. 양치기는 자신이 하는 일에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꿋꿋하게 나무를 심고 있었다. 그렇게 그는 89세까지 심었다. 그 결과 처음 양치기를 만났을 때는 마을 주민들이 몇 가구밖에 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서로 미워하고 싸웠는데, 어느덧 28명으로 늘어났고 생활도 활기차고 행복한 표정들이었다. 숲이 인간에게 빵을 마련해준 여실한 사례인 것이다.

지구에서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는 우주의 질서를 따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무는 거울 같은 존재이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봄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나무의 모습은 경이롭기 그지없다. “단풍든 목숨의 빛이/찬란하고 아프”(단풍든 목숨의 빛)듯이 열매를 맺은 뒤 가을에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의 모습은 숭고하고도 아름답다. 태양과 달과 바람과 날씨의 질서가 나무들에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무들이 모인 숲은 장엄하고 천년을 꿈꾸는 소나무”(폭설에 가지 찢겼어도) 같은 생명력이 생성되기에 신성하다.

그렇지만 인간은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챙기느라 숲을 무너뜨리고 있다. 2016510, 영국 왕립식물원 큐(Kew) 가든이 발표한 세계 식물 현황 2016’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상에는 39900여 종의 식물이 살고 있는데, 5분의 1이 넘는 21%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다. 멸종 위기의 식물 가운데 농경으로 인한 서식지 파괴로 위협당하는 식물이 31%로 가장 많고, 벌목과 같은 자원 활용(21%), 건설 등 개발사업(13%) 등이 뒤를 이었다. 기후 변화로 멸종 위기에 놓인 식물은 3.7%로 비교적 많지 않았다. 결국 인간에 의한 파괴가 숲에 결정적인 피해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차옥혜 시인이 제시한 숲 거울의 의미는 크고도 깊다. 숲이 어머니와 스승과 친구 등과 같고, 이 세계를 환하게 비추어주는 존재로 인식함으로써 숲과 인간이 공동체라는 운명을 자각시킨다. 또한 숲과 인간이 지닌 생명력, 사랑, 평화, 우주적 질서 등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시인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숲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다. 숲을 거울로 삼고 인간이 궁극적으로 이르고자 하는 이상세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시학 2016년 가을호 245262쪽 재수록>

<3의 문학 2016년 가을호 94110쪽 재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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