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시 -2 2010. 6. 30. 19:17


 

약력

                                          차옥혜 

 

 

약력을 쓴다.

몇 년 어디서 태어나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직업을 갖고

무슨 상을 타고

 

단 몇 줄로 기록된 이것이 나인가.

줄의 행간에 파도치는

한숨과 눈물과 고통과 절망을

웃음과 기쁨과 환희를

어둠과 빛의 무늬를

말하지 않고

이것이 나인가.

약력 뒤에 비치는

내 땀과 눈물과 피가 얼룩진

저 벌판과 길들과 마을들을

말하지 않고

이것이 나인가.

 

약력을 쓰다 말고

창 밖

약력 없이도

그대로 환한 별을

그대로 환한 미루나무를

본다.

 

<시인정신  200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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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눈물이 나는지

시 -2 2010. 6. 20. 21:55

 

왜 눈물이 나는지 

                                                        차옥혜

 

홍수가 나자 돼지가

지붕 위에 올라 꽥꽥거리는 것을 보면

날씨가 서늘해지자 딱정벌레가

악착같이 문틈으로 기어드는 것을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던 소가

트럭에서 탈출하여

산비탈로 뛰는 것을 보면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 떼를 보면

저를 죽이려던 주인의 집을

배고파 다시 찾아온 개를 보면

콘크리트 계단 틈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면

산불 지나간 자리에 반짝이는 새싹을 보면

낭떠러지에서 천 개의 손을 뻗어

하늘을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는 고목을 보면

제초제로 죽은 나무 등걸에 솟는 새 가지를 보면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강남문학  7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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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어머니

시 -2 2010. 3. 8. 21:15

  

거울 속 어머니

                                                차옥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거울을 보면

어머니가 그 안에서 나를 보고 계신다.

서글프신 듯 기쁘신 듯

할 말이 있으신 듯

그러나 끝내 아무 말씀 안하시고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보신다.

그러나 나는 벌써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말씀

번개보다 빠르게 다 알아채고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어머니도 고개를 끄덕이시며 웃으신다.

 

 <문예비전  2006. 56월호>

 <한겨레신문  2010.3.8.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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