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보  서시

                                          고은

 

너와 나 사이 태어나는

순간이여 거기에 가장 먼 별이 뜬다

부여땅 몇천 리

마한 쉰네 나라 마을마다

만남이여

그 이래 하나의 조국인 만남이여

이 오랜 땅에서

서로 헤어진다는 것은 확대이다

어느 누구도 저 혼자일 수 없는

끝없는 삶의 행렬이여 내일이여

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

 

  【감상】 고은 선생님의 만인보 30년만에 완간되었다.  총 30권 4,001편에 5,600여 명의 다종 다양한 인생의 모습을 담아낸 연작시집이다. "사람에 대한 끝없는 시적 탐구이자 시적 역사 쓰기에 값하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 속에서만 사람이다 세계이다"는 것을 보여주는 전무후무한 이 대서사시를 볼 수 있는 것은 한국문학의 큰 축복이다.

 

Posted by 차옥혜
,

   풍경 울다

                              고은

 

봄비 앞

어린 이파리

봄비 뒤

어린 이파리

 

그 어리디어린 이파리 숨진

차 한잔이

여기 와 있군

 

나 또한

을긋불긋 팔만사천 번뇌 두고

여기 와 있군

 

제법 둘이 하나 되고 하나가 둘이 되어 와 있군

 

웬일인가

바람 한점 없이도

댕그랑

풍경소리 와 있군 울고 있군

 

  【감상】 시인은 차 잔 속에 와 있는 어린 이파리를 보며 바람도 불지 않는데 풍경소리를 듣는다. 시인이 풍경이 되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풍경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풍경 소리가 시인의 울음이 시가 되는 것이리라.

 

Posted by 차옥혜
,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녘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감상】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진실입니까? 정의입니까? 천국입니까? 숨 쉬는 생명이면 누구든 무엇이든 존중받는 먼 미래의 세상입니까? 사랑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인격과 정조가 있는 시속 화자의 자아입니까?  한용운 선생님의 뜨겁고 깊은 인간애가 가슴을 울립니다.

 

'타인의 시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인보』 서시 - 고은  (0) 2009.07.01
풍경 울다 - 고은  (0) 2009.07.01
나룻배와 행인 - 한용운  (0) 2009.07.01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시 - 윤동주  (0) 2009.07.01
눈 오는 밤 - 심훈  (0) 2009.07.01
Posted by 차옥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