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 울다

                              고은

 

봄비 앞

어린 이파리

봄비 뒤

어린 이파리

 

그 어리디어린 이파리 숨진

차 한잔이

여기 와 있군

 

나 또한

을긋불긋 팔만사천 번뇌 두고

여기 와 있군

 

제법 둘이 하나 되고 하나가 둘이 되어 와 있군

 

웬일인가

바람 한점 없이도

댕그랑

풍경소리 와 있군 울고 있군

 

  【감상】 시인은 차 잔 속에 와 있는 어린 이파리를 보며 바람도 불지 않는데 풍경소리를 듣는다. 시인이 풍경이 되어 소리 없이 울고 있는 것이다. 사람 뿐 아니라 모든 생명에 대한 지극한 사랑 때문에 시인은 언제 어디서나 풍경이 될 수 밖에 없다. 그 풍경 소리가 시인의 울음이 시가 되는 것이리라.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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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을 보았습니다 

                                                          한용운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가 없습니다.

저녘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이 없습니다. 민적 없는 자는 인권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냐"하고 능욕하려는 장군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하는 찰나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감상】 당신은 누구입니까? 하느님입니까? 진실입니까? 정의입니까? 천국입니까? 숨 쉬는 생명이면 누구든 무엇이든 존중받는 먼 미래의 세상입니까? 사랑입니까? 어머니입니까? 인격과 정조가 있는 시속 화자의 자아입니까?  한용운 선생님의 뜨겁고 깊은 인간애가 가슴을 울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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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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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룻배와 행인

                                                           한용운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감상】 나는 나룻배였을까? 행인이었을까? 내 가슴에 낡은 나룻배 한 척이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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