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봉

시 -2 2011. 2. 9. 11:42

  

희망봉

                                                            차옥혜

 

 

달리고 달려온 대륙을 바다가 가로막는 곳

파도쳐 파도쳐온 바다를 절벽이 가로막는 곳

거기에 희망봉이 있다

바다는 절벽을 기어올라야 희망봉에 오를 수 있고

땅은 바다에 빠져야 희망봉을 만날 수 있다

두려움과 절망과 죽음을 무릅써야만

만날 수 있는 희망봉

적과 적이 덜컥 껴안아야만

만날 수 있는 희망봉

살아 있는 한

포기할 수 없는 곳

저절로 꿈꾸며 달려가는 곳

그러나 오늘도

바다는 끝없이 밀려와 절벽을 기어오르다

미끄러지고

땅은 끝없이 달려와 바다 앞에서 한숨 쉰다

 

있으나 없는 희망봉

쓸쓸하고 영원한 오로라여

 

<시문학   2007년 5월호>
<문학사상  2007년 6월호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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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시 -2 2010. 6. 30. 19:17


 

약력

                                          차옥혜 

 

 

약력을 쓴다.

몇 년 어디서 태어나

어느 학교를 졸업하고

무슨 직업을 갖고

무슨 상을 타고

 

단 몇 줄로 기록된 이것이 나인가.

줄의 행간에 파도치는

한숨과 눈물과 고통과 절망을

웃음과 기쁨과 환희를

어둠과 빛의 무늬를

말하지 않고

이것이 나인가.

약력 뒤에 비치는

내 땀과 눈물과 피가 얼룩진

저 벌판과 길들과 마을들을

말하지 않고

이것이 나인가.

 

약력을 쓰다 말고

창 밖

약력 없이도

그대로 환한 별을

그대로 환한 미루나무를

본다.

 

<시인정신  2000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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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눈물이 나는지

시 -2 2010. 6. 20. 21:55

 

왜 눈물이 나는지 

                                                        차옥혜

 

홍수가 나자 돼지가

지붕 위에 올라 꽥꽥거리는 것을 보면

날씨가 서늘해지자 딱정벌레가

악착같이 문틈으로 기어드는 것을 보면

도살장에 끌려가던 소가

트럭에서 탈출하여

산비탈로 뛰는 것을 보면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슴 떼를 보면

저를 죽이려던 주인의 집을

배고파 다시 찾아온 개를 보면

콘크리트 계단 틈에 흔들리는 풀잎을 보면

산불 지나간 자리에 반짝이는 새싹을 보면

낭떠러지에서 천 개의 손을 뻗어

하늘을 붙잡으려고 버둥거리는 고목을 보면

제초제로 죽은 나무 등걸에 솟는 새 가지를 보면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강남문학  7 200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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