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것은
차옥혜
산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일이다.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진구렁을 헤매는 일이다.
진구렁을 벗어나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물이 되어 스며드는 일이다.
물이 되어 씻어내며 흘러가는 일이다.
<시현실 2001년 겨울호>
산다는 것은
차옥혜
산다는 것은
먼지가 쌓이는 일이다.
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진구렁을 헤매는 일이다.
진구렁을 벗어나는 일이다.
산다는 것은
물이 되어 스며드는 일이다.
물이 되어 씻어내며 흘러가는 일이다.
<시현실 2001년 겨울호>
나의 글방은 경계 없는 세상이다
차옥혜
내가 글방을 갖게 된 것은 나이 서른아홉이 되어서다. 6ㆍ25 전쟁 후 초등학교 시절엔 책상도 없이 가족들이 함께 쓰는 단칸방 한구석 바닥이나 툇마루에 엎드리거나 앉아 책을 읽고 숙제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언니, 동생과 함께 쓰는 방에 조그만 책상 하나가 나에게 할당되었다. 우리 집엔 따로 글방은 없었지만 안방이나 마루 식당 가리지 않고 어디든지 빈 공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책으로 채워졌다. 아버지가 폭넓은 독서를 통하여 자아를 확장하고 세계를 구축해온 탓에 아버지의 전공인 법학뿐만 아니라 문학, 철학, 종교, 역사 책과 명상집이 많았다. 게다가 바로 위 언니가 독서광이어서 동화, 위인전, 만화, 소설책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집 전체가 살림집이면서도 글방인 셈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책을 통해 세상을 배우고 책을 소중하게 여겼으며 가난했지만 책을 많이 가지고 많이 읽은 것에 자부심을 지녔다. 이런 탓에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저절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쓴 글을 상자나 대바구니에 넣어 보관하고 이사할 때 마다 보물처럼 끌고 다녔다. 지금도 중학교 때 신문에 발표한 단편과 수필, 그리고 원고지에 쓴 글들을 묶어 “꽃봉오리”라는 제목을 붙여 내 손으로 만든, 조잡하지만 단 한 권짜리 최초 문집을 가지고 있다.
나는 지방에서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하면서 자취방에 나만의 책상과 책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전업주부가 된 후에도 학자인 남편의 서재 한구석이나 거실이나 안방 빈 곳에 내 책을 두고,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엔 안방이나 식탁이나 거실 탁자나 방바닥을 전전했다. 아이들은 취학하면서 공부방을 주었지만 나까지 글방을 차릴 여유는 없었다. 드디어 29년 전 시인으로 등단하면서 아파트 부엌 옆 한 평 쯤 되는 골방에 책상과 작은 책꽂이를 간신이 넣은 내 글방을 처음 갖게 되었다. 비로소 내가 사람대접을 받는 것 같았다. 20년 전 쯤 조금 큰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내 글방은 조금 더 넓어졌고 남편이 직장에 갔을 때만 이용하던 남편의 컴퓨터 대신 내 책상에도 나만의 컴퓨터가 생겼다.
책은 자꾸자꾸 불어나 둘 데가 없어 도서관이나 문학관 등에 수시로 기증하고 문예지들은 내 작품이 실린 책들만 보관하고 자료가 될 만 한 것은 복사하여 바인더에 넣어두었다.
한편 집안에 글방을 갖게 된지 몇 년이 지난 때부터 자연과 흙이 강렬하게 나를 부르는 바람에 농촌 황토밭에서 나무와 밭작물을 기르는 일도 병행하게 되었다. 이 일은 나에겐 식물 글자로 땅에 시를 쓰는 행위와 같아서 황토밭은 내 자연글방이 되었다. 자연글방에서 얻은 영감으로 종이에 쓴 시를 집안 글방 컴퓨터에 옮겨 정리한다. 아마도 내가 시인이기 때문에 두 개의 글방을 왕래하며 사색하고 시를 쓰고 책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자연글방이나 집글방 책상 앞에서만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사실 진정한 나의 글방은 자연글방과 집글방을 포함한 경계가 없는 세상이 아닌가 한다. 도시의 뒷골목에서, 지하철에서, 여행 중에, 몇 권의 대하소설을 읽다가 혹은 신문을 보다가, 창밖을 내다보다가, 영화를 보거나 책을 읽다가, 꿈꾸다가 불현듯 시를 만난다. 세상을 떠돌다 어느 순간 나와 세상과 우주가 통합될 때, 혹은 어느 사물이나 현상에 부딪쳐 내 영혼이 불꽃을 낼 때 시가 온다. 그래서 늘 가방 속에 수첩이나 종이를 가지고 다닌다. 언제 어디서나 바로 적어놓지 않으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기 일쑤다. 세상글방에서 쓴 시를 집글방에서 읽고 또 읽으며 완성한다.
좋은 시를 만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경계 없는 내 광활한 글방인 세상에서 온몸과 마음으로 일하고 서성이며 헤매고 바라보며 읽고 명상하며 쓰고 또 쓴다.
<『문학의 집ㆍ서울』 2013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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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옥혜 시집 『날마다 되돌아가고 았는 고향은』
문덕수(예술원회원ㆍ시인ㆍ전홍익대학교수)
차옥혜(1945~시인,『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 경희문학상 수상)의 시집. 「슬픈 목숨」등 약 77편을 수록. 정치 등 현실문제를 다룬 작품도 상당 수 있으나, 이 저서는 생태주의 시집이라고 할 수 있다. 생태주의 시집이기는 하나 혼돈으로서의 생명, 진화하는 생명, 환경에 관련된 생명 등의 다양성이 감지된다. 특히, 이 저서의 제목 ‘날마다 되돌아가고 있는 고향은’에서 고향에 대한 근원사상이 암시되어 있다. 혼돈, 신화, 사물, 조화(調和), 진화, 환경 등의 다양한 문제점은 모두 생명과 관련된다. 「시인의 말」에는 “몰려오는 삶의 울음소리”라는 대목이 있는데, 이 대목이 암시하는 의미의 확장은 넓은 의미의 ‘삶’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의 생태(生態)는 단순한 물질로서의 사물이 아니라 생명의 몸짓이나 생명현상 전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작품 중에는 탄자니아국립공원의 고유명사도 특정 지명에서 생명현상의 보편성을 띤 곳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시문학 2013년 2월호 196쪽 수록>
식물 글자로 황토밭 원고지에 핀 서리꽃
권현수(시인)
누구의 기쁨이 서리꽃 되어
산을 덮었나
누구의 슬픔이 서리꽃 되어
호숫가 숲을 품었나
삶이 죽음을 죽음이 삶을 껴안아
서리꽃 나라 눈부셔라
겨울길만 헤매도
남루하여 자꾸만 몸 가려도
서리꽃 아닌 목숨이 어디 있으랴
서리꽃 아닌 넋이 어디 있으랴
서리꽃이 서리꽃을 부르며 웃고 있구나
서리꽃이 서리꽃을 어루만지며 울고 있구나
―「서리꽃」 전문
유난히 추운 겨울 한가운데 향기로운 분홍빛 ‘꽃피리’를 날리며 한 권의 시집이 배달되었다. 『날마다 되돌아가고 있는 고향은』 1984년 한국문학으로 등단하여 이제 10번째 시집을 상재한 차옥혜 시인의 시집이다.
시력 30년.
그 긴 세월을 한결같이 맑은 시심을 가꾸어 온 시인의 그 식지 않는 열정에 먼저 경건해지는 아침이다. 그리고도 시인은 “아직도 시는 ‘부르다가 내가 죽을’ 깊고 먼 이름이다. 오늘도 나는 한 편의 좋은 시를 찾아서 시의 길을 간다.”라고 선언하고 있다.
5부로 나누어진 77편의 알찬 시들은 말미에 곁들인 “시인이 쓴 생태시론”과 함께 시를 향한 시인의 쉬임 없는 꽃피리 소리들이다.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한 편의 시를 음미해 본다.
생명이 얼어붙어버린 겨울산, 벗은 나무의 가지마다 만발한 서리꽃. 눈 오는 날이면 주위 어느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눈꽃과는 달리 서리꽃은 평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꽃이다. 아니 꽃이 아니라 서리가 꽃무늬처럼 보여서 이름 붙인 서리꽃이다.
겨울 한낮 높은 습도 속에 퍼져 있던 수증기가 밤이 되어 추워지면서 더 추운 평지나 높은 곳의 나뭇가지나 잎들에 달라붙어 꽃처럼 보이는 서리꽃. 그래서 서리가 아침 이슬처럼 햇살이 퍼지면 사라져 버리듯이 서리꽃 역시 기온이 올라가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다. 사람의 목숨이 때가 되면 그래야 하듯이.
“삶이 죽음을 죽음이 삶을 껴안아” 살고 죽는 것이 그저 한몸인 것처럼 자연스럽고 “남루하여 자꾸만 몸 가려도” 서리꽃처럼 아름답고도 숭고한 우리의 목숨, 우리의 넋. 그래서 시인은 “서리꽃이 서리꽃을 부르며 웃고” “서리꽃이 서리꽃을 어루만지며 울고”있다고 노래하고 있다.
스스로 ‘생태시인’임을 자각하고 또한 그 속에 시심의 근원을 캐고 있는 시인에게 있어 겨울 새벽 한때 꽃처럼 아름답게 피어나는 서리꽃은 바로 인간과 자연이 하나가 되는, 기쁨과 슬픔이 또한 함께 하는 넋이고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창으로 찔러대는 것 같이 온몸이 비명을 질러대는”(「다 함께 점령하라」) 끔찍한 병, 세상의 행복전도사라는 분을 자살로까지 몰아 부친 그 병, 대상포진이라는 병을 앓으면서도 시인의 시심은 그 참혹한 아픔을 참아내면서 그 통증 너머의 세계로 한달음에 달려간다. “미국에서 분노한 시민들이/ 윌가를 점령하라”고 벌이던 시위다. 그리고 시인 자신의 통증으로부터 관심을 거두어 전 세계 99%의 사람들을 빈곤에 허덕이게 하는 1%의 사람들을 향한 분노로 “가슴을 친다.”
시인의 이러한 시선은 그래서 20여 년간 자연 속에서 살면서 “시골 황토밭에서 직접 나무와 풀꽃과 곡식과 야채를 키우면서 저절로 우러나온 시”를 쓸 수밖에 없었고 그런 시들을 읽은 다른 시인들이나 평론가들이 ‘생태시’라고 불러주는 것을 아주 만족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시집의 말미에 유려한 문장으로 곁들인 시론 「지구가 위험하다」에서도 “식물 글자로 황토밭 원고지에 시를 쓰면서 자연과 인류가 함께 생명과 평화로 가는 길을 찾는다는 의미와 보람도 있다”라고 쓰고 있다.
자연 속에 살면서 자연과 하나된 시인의 맑은 시심이 항상 함께하기를 빌어본다.
<문학과 창작 2013년 봄호 268-270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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