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의 몸을 보았다

                                                               차옥혜

 

창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내 책상에 펼쳐놓은 노트에서 옷을 벗었다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 보라

일곱 가지 색깔이 나란히 사이좋게 반짝이는

색동 몸이다

햇빛의 아름다운 몸을 가만히 어루만지니

어느덧 햇빛이 부피도 무게도 없이

내 손등 위에 있다

세상에 가득하면서도

제 자리나 집이 없다

올 사람들의 영혼이 그러할까

떠난 사람들의 넋이 그러할까

무엇에게도 구속되지 않고

모든 것과 함께 하면서

모든 것을 자유롭게 하는

햇빛을 닮으면

내 몸도 무지개가 될까

영원히 썩지 않는 생명이 될까

내 노트 위에서 쉬고 있는 햇빛의 맨 몸이

손가락 하나 안 대고

나를 사로잡는다

 

<문예2000,  1997년 2월호>

<경향신문  1997.2.26.자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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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시 -1 2011. 2. 13. 00:03

 

눈사람 

                                                차옥혜

 

마음도 없는 것이

손도 발도 없는 것이

녹으면 단지 한 옴큼 구정물인 것이

길을 환하게 한다.

차가운 것이

나를 따뜻하게 한다.

얼마 안 가 개구쟁이들의 발길에 부서지거나

햇볕에 사라질 것이

다정한 친구가 된다.

나는 무엇을 보며 위로 받고 사는가

나는 누구의 눈사람인가

눈부신 하얀 허물을 벗으면

시커먼 산성 물인 것 알면서도

눈사람 없이는

겨울 길을 걸어갈 수 없구나

사람아.....

 

<학산(인천문인회)  1996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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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눈부신 사람 

                                                    차옥혜

 

꽃을 보기 위하여

먼 길 걸어가는 이여

오래 아파하는 이여

꽃을 위하여

오래 울고 있는 이여

꽃을 지키기 위하여

긴 세월 시달리는 이여

꽃을 보고 꽃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간이지만 언제나 아쉽지만

때로는 끝내 못 만나기도 하지만

꽃을 위하여

모두를 바치는 당신의 삶은

꽃보다 더욱 아름답다 순결하다.

꽃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당신은

꽃보다 더욱 눈부시다.

 

<동서문학  2004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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