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은 누구인가?

  서홍관(시인의사)

 

  머리글

시인은 누구인가? 시인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인가? 시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왜 그 사람은 시인이 되었는가? 그 사람은 시인이 되어서 그 사람의 인생의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한 사람의 시집을 읽을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끔이라고 말한 것은 항상 그런 근본적인 문제까지 도달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한 사람의 시집을 해보라는 엄청난 과제가 떨어져서 차옥혜의 시집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차옥혜라는 사람의 삶은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시인은 범상한 사람과 달리 역시 고상한 삶역시 고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고상한 삶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원래 그랬던 것인가 아니면 시를 쓰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만약 고상한 삶이 아니라면 시인이 된 것과 되지 못한 것의 차이는 단지 이름 뒤에 詩人이라는 멋있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이 시집의 시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우선 이 글은 평론가의 글과는 달리 시를 쓰는 한 사람이 다른 시인의 시를 감상하는 수준에서 다루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아무개의 시 세계를 싸그리 정리분석해서 독자에게 보여주는 글은 아예 언감생심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고, 그저 평범한 한 독자의 입장에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매우 주관적으로 생각이 흘렀음을 미리 고백하고 다른 이들이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기를 바란다.

우선 분류된 순서대로 1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부의

20꿈을 준다는 돌고래와 어느 곡예소녀라는 작품은 이미 충분히 보도된바 있는 유흥업소에서 줄타기를 하는 12살 소녀의 이야기를 돌고래에 비유해서 쓴 시이다.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자란 소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분노를 돌고래를 동원해서 적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한가지 아쉽다면 마지막 연에서 돌고래와 곡예소녀가/내 가슴 블랙홀에/한없이 추락한다.’라고 기술했는데 블랙홀 운운한 대목은 도리어 사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연은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16은 열쇠를 잃어버린 주인이 열 수 없었던 아파트 문이 몇 일 전 도둑에게 그랬던 것처럼 열쇠기술자에게 쉽게 열리는 것을 보고 정작 주인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 떠나는 것은 아닐까생각해보는 내용의 시이다. 작은 사실에서 커다란 사실로 상상력을 넓혀 가는 것에서 시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이라는 시는 어머니와 나와 아들과 죽은 이후의 나로 이어지는 세월 속에서 힘든 삶을 이겨보려고 바람은 곧 멎을 거라고믿으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삭다 만 뼈가 바람은 곧 멎을 거라고 말한다는 대목에서 좌절된 허망함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희망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따스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에 미덕이 있다.

14이 시집의 표제시인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이제까지 머리 위에 있는 하늘만 보고 살았는데 발 아래 있는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그리고 발 아래 있는 하늘과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하나로 우리를 감싸서 하늘과 나와 당신이 하나인 것을 본다는 내용이다. 다만 이 시는 이 시를 쓰는 화자의 주변정황이 불명확하고, 화자가 느낀 우주적 감동이 독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인다.

11흙은 흙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작품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간결하게 형상화한 좋은 작품이었다.

또한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는 시인의 모습을 보는 시들도 있다. 예를 들면 새해 새아침(23)이라든지 산다는 것은(12)과 같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1부에서 무지개」「고요」「만남등은 상식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었고, 여름은 너무 간단하게 쓰여져서 전달될 것이 미처 담아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겨울고목겨울고목이 사상을 한다는 명제가 무슨 뜻인지 그 국어적인 말의 쓰임에도 의문을 품게 되었고 전체적인 시의 내용도 시인만이 목에 힘을 주고 있을 뿐 독자가 감동할만한 여백을 남겨주지 못했다. 

 

2부의

연작 1-7을 읽으면서 1부에서 느꼈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어색하고, 막연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 춤이라는 것이 때로는 기막히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의 곡절을 표현하는 뜨거운 몸짓이라고 할 때 ------ 물춤, 하늘춤, 불춤, 바람춤으로 표현되는 이 작자만이 이해하는 것처럼, 관객과 동떨어진 거리감을 느껐다. 2도 마치 詩作法에 나오는 시처럼 깔끔하되 건조하였다. 구체적인 삶의 곡절을 반영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던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38고속도로에서는에서는 가장 빠르게 기분 좋게 이르는 고속도로/고속도로에서는/고속도로 만세를/아니/사람 만세를/ 소리치지 않을 수 없구나라는 대목에서는 너무 순진하고 솔직한(?) 느낌을 받았고 고속도로에서는/할머니와 할아버지를/부모와 자식을/나를/부인할 수 없구나라는 대목이라든지 내 몸도 고속도로로 누울 그곳까지라는 대목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40장마42바람,냇물,닫힌 문 열리니에서는 원초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고파 하는 인간의 그리움이 간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44콩깍지였다. 익자마자 맞아서 콩을 내놓고, 태워져서 재로 밭머리에 뿌려진 콩깍지에서 빼앗길 대로 빼앗긴 어머니를 연상한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3부의

3부에서는 통렬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메시지를 볼 수 있다.

두 여인의 하루에서는 건축공사장에서 석면을 붙이는여인과 사우나탕에 들락거리는 회장부인이 등장해서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한다. 김성희에서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불평등하게 자라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44살 노처녀가 누구나 벌거숭이인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취미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평등한 모습을 공중목욕탕에서야 겨우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불평등한 세상을 꼬집고 있다.

1991년 지하철역 한국 민주주의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비판하고 있다.

통일에 대한 시들이 또 눈에 띄는데 통일조국 어머니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에서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은 2에서도 실은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통일된 조국을 그리는 내용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점에서 이 시도 통일을 주제로 한 시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66홍수에서는 홍수를 다수의 폭력이라고 표현하고 적어도 민주주의라면 아무도 단 한 송이 풀꽃이라도 그렇게 으깨버릴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빙자한 권력의 횡포를 비난하고 있다.

다만 초록빛으로 흔들리자에서는 핵문제를 이야기하되 상식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건조하다. 마지막으로 잘린 수세미 꽃이에서는 반생명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통해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생각이 드러난다. 

 

4부의

4부는 흙을 향한 노래 14편으로 구성되었다. 나에게는 이 시집의 가장 좋은 시들이 여기에 몰려있다고 느껴졌다. 72의 모깃불을 피운 저녁식사라든지, 73의 농약 때문에 사라져버린 개구리, 맹꽁이, 지렁이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라든지, 75의 농약을 제 손으로 뿌리는 자기 모순에 대한 분노(?)라든지, 76의 손이 잘린 점례의 아픈 이야기라든지, 농촌의 모든 사람들과 벌레와 집짐승들이 스승이라는 77의 시들이 하나같이 쉽게 가라앉힐 수 없는 생래적인 흙과 농촌에 대한 애정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또 홀로 된 느티나무집 할아버지의 외로움과 운명을 그린 82의 시와 경찰의 잘못된 사격으로 사망한 한국원씨의 이야기를 그린 84의 시와 농약을 마시고 쉰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바위네 엄마의 아야기를 그린 86의 시들이 모두 생생하다. 다만 86의 시에서 바위네 엄마가 자살한 이유가 불분명한 것이 조금 걸린다.

90의 시는 골프장을 건설한다고 산을 파헤쳐서 산사태가 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농촌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정신나간 사람들)을 담고 있는데 골프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는 농촌사람들이 수동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면책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를 먼저 비판하지 않고 단순 가담자만을 비난한다면 그 지적은 부당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85의 호박에 대한 시는 대체로 좋은 시임에도 마지막 연의 당신 만세/호박만세라는 대목은 긴장하던 독자들을 깜짝놀라게 하여 긴장을 풀어지게 하는 느낌을 준다. 80의 시는 들깨가 쏟아지는 들깨줄거리와 나를 비교한 것인데 이 다음 죽은 나에게서/무엇이 쏟아질까요하고 질문을 던졌으나 나와 들깨에 대한 충분한 연결이 되지 않아서 질문을 통해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81의 조롱박에서는 작위적인 -시를 창작한다는 의식이 너무(?) 드러난-느낌을 주면서 특히 마지막 연의 아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는 감정의 무분별한 토로가 아닌가 싶다

 

5부의

5부에서는 스승의날 남북작가회의 한다고 판문점으로 가던 스승이 갇힌 서울구치소로 면회 가는 장면을 그린 95어느 스승의 날이 인상적이었다. 또 지주대가 있어야 오르는 더덕을 보면서 당신에 기대지 않고는 나 하늘에 오를 수 없음을 이제야 겸손히 고백합니다라고 고백하는 97더덕밭에서는 아마도 당신이 이나 眞理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나 자신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박제된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하는 박제된 나등의 시들이 맘에 들었다.

여성문제를 다룬 102여자, 나를 풀어 떠나보내며에서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하늘을 이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다만 약간 산만해보이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이라든지, 라든지에서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불분명했고, 105나는 어떤 나라 여자인가에서는 왜 작자가 왜 그토록 감탄하고 나는 어떤 나라 여자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지 독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108가을바람이나 109너는 어디 있는가도 막연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친구의 죽음을 다룬 너는 갔어도라는 시에서도 왜 친구가 죽었는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 그 친구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왜 친구야/너는 갔어도 가지 않았구나/삶과 죽음의 멍에 하나로 지고 우리 함께 서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전달하는 내용이 불분명하게 감춰져 있는 시들은 시와 독자 또는 시인과 독자의 거리를 멀게 해주는데 기여할 뿐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시인으로 등단하신지 9년이 되는 차옥혜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의 시들을 감상해보았다. 78편의 시들은 저자의 말에 의하면 1988년 후반에서 1992년 사이에 씌어졌다고 한다. 왕성한 창작의욕이 감지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저자의 서문을 읽어봐도 시인으로서 를 내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마치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던 각오처럼 의욕적인 느낌을 준다.

나에게 인상깊은 시들은 흙과 농촌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4부의 시들과 3부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쓴 시들과, 살아가면서 생명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시들이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되지 못한 점 사과 드리며, 더욱 좋은 시를 쓰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 자신의 말을 빌어 새로운 각오로 더욱 시인과 그의 가족과 이웃의 삶을 사랑하며 머리와 가슴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쓰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1993년 3월 시집  합평회에서 발표>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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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

                    - 차옥혜의 시세계 -

임헌영 (문학평론가)

 

     1

첫 시집 깊고 먼 그 이름』」(1986)에서 차옥혜는 종소리가 듣는 사람의 영혼을 진동시키며 멀리멀리 아름답게 울려퍼지려면 먼저 종이 좋아야겠지요.”라고 말한다. 차옥혜 시의 종소리는 마치 비 내리는 축축한 황무지에서 젖은 몸으로 대지를 호미질하는 수도녀의 육성처럼 깊고 멀리 울린다. 이 시인은 황무지에서도 풍요를 수확할 수 있는 예지와 투지를 함께 지닌 채 고통스러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음을/감사하겠습니다.//어두운 소리들이 허우적이는 시궁창에/내 귀도 빠지게 하소서/그리하여 함께 썩고 썩어 /발효하여/가스로 훨훨 날아가/하늘이 되게 하소서//괴로워도/귀를 막지 않겠습니다.”(3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 1990, 수록, 귀를 막지 않겠습니다전문)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이 모든 존재에 대하여 귀를 열고 있는 건 곧 우리 현실에 대하여 어떤 편견이나 기득권도 버린 채 객관적인 위치를 견지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자 그것이 냉철한 비판적인 자세이기보다는 따스한 모성애를 바탕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시인의 현실인식과 대응자세는 열린 귀뿐이 아니라 마음 전체가 그러함을 아래 시는 보여준다.

 

기쁨만 아니라/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희망만 아니라/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가진 것만 아니라/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승리만 아니라/ 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건강만 아니라/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

―『깊고 먼 그 이름수록, 기도 2전문 

인생에 대하여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고 도전적이기까지 한 자세를 차옥혜는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의 영향으로 육화시킨 것이 아니가 싶을 만큼 비로 오는 그 사람에 실린 아버지두 편은 생생하게 보여준다. 물론 이런 대담성은 제2시집 서사시 바람 바람꽃 막달라 마리아와 예수에서 감지되는 차옥혜의 신앙적 감성이나 우리 시대의 한 전범처럼 맺어진 부부의 인연 맺기와 이를 바탕한 가정생활의 영향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다.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너는 부른다./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깊고 먼 그 이름수록,서시개구리전문)이라는 소망을 가득 담은 이 울음이야말로 차옥혜의 은은한 쇠북의 종소리일 것이며, 그 소리는 햇살 따스한 인생의 봄날보다는 음습한 역사의 계절인 가을에 더욱 멀리 울려퍼질 것이다.

이 시인의 소우주에는 깊고 먼 그 이름겨울보리비 내리는 날연작이나, 비로 오는 그 사람, 아름다운 물, 비를 기다리는등에서처럼 황무지를 적셔줄 생명의 원천인 수분을 갈구하는 기원과 투지와 열망으로 가득 차 있다. 설사 대지가 아무리 메말라도 겨울보리처럼 그 섬세하면서도 강인한 뿌리의 생명력은 충분히 성장에 필요한 수분을 흡수하고야 만다는 악착스러움이 차옥혜의 시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이것은 제4시집 발 아래 있는 하늘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2

초기 시집이 지녔던 사변성이 일상적인 삶 속으로 융해된 채 보다 보람된 생활과 인생의 본원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자세로 바뀐 제4시집은 이 시인이 그간 고뇌를 거듭한 끝에 다다른 황무지로부터의 탈출, 혹은 황무지에서의 풍년제의 소망을 담아낸다.

내 가슴이 비좁아/숨막혀 못 살겠다고/네가 홀연히 떠나/종적을 감추자/나는 황무지가 되었다./우러르는 하늘마저/나를 외면하고/종일 모래바람만 분다.”(전문), 1988년 이후에 쓴 시를 모은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시가 추방당한 시대에 황야를 개간하는 이 시인의 끗끗한 겨울 나무 같은 의지와 섬세함이 공존한다. 시인은 시가 없어서만 황야가 아니라 설사 시를 부활시킨대도 우리 현실은 황야임을 전제로 하면서 그 북바친 하소연을 이렇게 토론한다. 

 

머리채는 하늘에 잡히고

발목은 땅에 묶여

빛과 어둠의 채찍을 번갈아 맞으며

둥둥둥 울고 있는 북아

뿌리쳐라

하늘과 땅을 뿌리쳐

네 뜻대로 굴러

네 울음 울어라

―「전문 

 

앞의 시집들이 종소리였다면 이제 제4시집은 끝내 북소리로 바뀌었는데, 종소리가 높든 낮든 안온한 화평과 여유를 동반하는데 비하여 북소리는 급박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시 형태나 기교에서는 약간 풀어진 느낌을 지녔으면서도 역시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차옥혜의 느긋함 속에 감춰진 황야에서의 씨뿌리기 작업의 긴박성이 내비친다.

현실과 삶 그 차체가 어둠이고, 어둠이 보기 싫어서/벽을 쌓다 보니/내가 그만 어둠이 된다는 이 시인은 피를 흘리고/하루를 잃을지라도/내가 흘리는 눈물만이/어둠을 씻어내리니/내 체온만이 어둠을 녹여내리니”(어둠)라고 노래한다. 여기서 이 시인이 오늘의 삶을 어둠이라고 진단 내리는데는 하류층과 상류층 여인의 하루 생활을 대비시킨 두 여인의 하루나 방직회사 여공의 소박한 꿈을 그린 김성희와 같은 현실인식의 측면만이 아니다. 인간의 삶을 원초적으로 갈등과 모순의 반복으로 보는 이 시인에게는 산다는 것은/먼지가 쌓이는 일이다./먼지를 털어내는 일이다.”(산다는 것은)로 풀이된다. 그래서 차옥혜에게는 삶의 먼지를 털어내는 과정이 인생의 참다움에로의 승화이며 그것은 황무지에 풍년제를 올리는 환희에 해당된다. 그 과정에서 이 시인은 때로는 종소리를 울리기도 하고 다급하면 북을 치기도 한다. 그 북치기 작업은 이 시인에게 생존경쟁을 위한 싸움이자 그 싸움을 중단시키려는 평화의 호소이기도 하다. 

    3

모든 아룸다움 중에 으뜸은/생명이니/생명을 지키기 위하여/싸움 아닌 것이 있느냐”(눈이 오는 날엔)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지닌 인간과 인간이 서로 이리로 으르렁대는 현실진단을 간과함과 동시에 바로 그 뒷구절에 이어지는 눈이 오는 날엔/우리의 상처마저/아름답구나에서 다툼을 멈추게 하려는 시인의 평화에의 기원을 전달 받는다.

생명체란 떠나야/사는/불붙은 맨발”(바람)이라는 직설적인 표현은 황야에 선 겨울고목이라도 끈끈한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그 존재의 보람을 과시함을 보여준다. 

 

겨울고목은 사상을 한다.

엄숙하고 깊고 고요하고 아름다운

겨울고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고목은 엄청난 사상의 힘으로

하늘을 빨아들이고

나를 삼킨다

그러자 나도 애닯고 장엄한 고목이 되어

사상의 힘으로

언 땅을 뚫고

깊숙이 뿌리를 내리며

대지를 빨아들인다

수맥을 마신다

아 모처럼 배가 부르다

―「겨울고목전문 

 

갈등과 모순에 찬 삶, 즉 황야에 내던져진 그 각박하고 척박한 조건에서도 뿌리가 있음으로써 나무는 생명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배를 불릴 수 있다는 진단은 바로 이 시인이 자주 등장시키는 움직임, 바람의 이미지와 물, , , 바다의 의미와 상통한다.

이 시인은 생명의 투지력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위에 든겨울고목과 는 달리, 수세미 줄기를 잘라 그 수액을 먹는 사람을 향하여 내 피를 마시니 좋으냐고 빈정거린다./하기야 저희들끼리도 약한 자의 피땀에/빨대를 대고 사는 족속들인데 라며 조롱한다.”(잘린 수세미꽃이)는 것은 생명력의 경쟁이나 잔인성 혹은 비인간화를 상징한다. 바로 이런 생명력, 잡식성 지배욕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한 경고를 위하여 이 시인은 노동자농민의 핍박스런 현장을 지나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런 문제에 도식적으로 집착하지는 않으나 인간주의적인 애정을 보내는 입장에서 차옥혜는 삶의 진정한 조화와 공존의 질서를 추구한다. 

 

황토흙을 받아/텃밭에 깔아주고/땅을 뒤집어/헌 흙과 새 흙을 뒤썪는다/헌 흙은 텃세도 하지 않고/새 흙을 받아들여/금새 한 몸이 된다/어디 저희끼리 만이랴/그래서 하늘을 날던 새들도/땅 위를 헤매던 짐승들도/종내는 흙에게 안기는 것이리라”(흙은 흙을 거부하지 않는다전문) 

우주 만상의 존재 일체가 이렇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상태, 상대를 거부하지 않고 평화로이 수용하는 상태를 이 시인은 발 아래 있는 하늘로 상징화한다. “가지와 잎과 꽃이 한 그루 나무이듯이/발 아래 있는 하늘과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하나이고/그 하늘과 나와 당신이/하나인 것을 보았습니다.”(발 아래 있는 하늘)는 깨달음은 가깝고도 멀며, 쉬우면서도 어려울 수 있다. 하늘이 땅이고 땅이 하늘인 이 경지에 이르러 인간과 삼라만상은 명실상부한 자유와 평등을 누릴 수 있으며 시인은 좌절과 슬픔보다 환희를 노래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의 일체화와 조화는 신명풀이의 만남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진단을 이 시인은 내려준다. 연작들이 제시하는 세계는 갈등과 증오가 뒤엉킨 만물들이 사랑의 매개로 만나서 화해와 일체화에로 승화하는 과도기 모습이다.

목숨의 허물을 벗었어도/떠나지 않아라/뜨겁고 괴로웠던 황무지에/사랑 있어/춤으로 살며/거듭거듭/물이 되는 넋이여”(3)라는 환희의 순간은 만남 사랑의 절차를 요구한다. 

 

천년 화석으로

마주본들 무엇하리

석불로 나란히 서서

눈비 맞은들 무엇하리

 

멀리 있어도

얼굴을 몰라도

마음이 만나야

만남인 것을

벌거벗은 마음과 마음이 만나면

얼음 안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는

불이 된다네

―「만남전문 

 

황무지를 만나가 내리는 땅으로 바꾸려는 꿈은 시인의 영원한 작업이며, 그 노정에 차옥혜 시인도 동참한다. 이 시인은 모든 존재의 만남을 사랑이란 의전절차를 거칠 것을 강조하며, 이점 역시 많은 시인들과 닮았다. 그런데 차옥혜는 그 만나는 장소를 머리 위의 하늘이 아닌 발 아래의 하늘로 잡았다는 점에서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것은 생명력의 영원한 원천인 대지를 상징하며, 이런 시인의 의도는 흙을 향한 노래연작에 여실히 드러난다.

대지에 뿌리 내려 사랑으로 만난다는 것은 인간사회에 존재하는 불평등에 대한 가차없는 항의와 비판이자 바람직스럽지 못한 지배와 피지배적 관계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그렇다. 차옥혜의 시는 하늘과 땅이 만나 사랑하는 관계로 이어주고, 그 사랑을 대지 깊숙이 묻어 생명력을 번창하게 만드는 종소리이자 북소리이다. 울려 퍼져라, 대지를 향한 복음이여.

 

<임헌영 문학평론집 우리 시대의 시읽기290-297쪽에 재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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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님 속에 짓는 집

  홍정선(문학평론가)

 

    1.

이 시집의 해설을 시작하기 전에 필자는 몇 가지 변명을 늘어놓지 않으면 도저히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 같다. 아니 변명이라기보다 필자의 나쁜 버릇에 대한 참회라고 해야 더 올바른 말이 될 것 같다.

차옥혜 시인의 원고를 필자가 처음으로 접한 때로부터 지금까지 6개월이 훨씬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로 출판사로부터 해설 원고를 써줄 것을 부탁 받은 지 4개월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 엄청난 시간 동안에 필자는 시집 뒤에 붙일 한 토막의 글을 쓰지 못해서 마냥 헤매고 있었다.

원고가 늦어지는 동안 처음에는 개인적인 사정이 엎치고 겹쳐서 그렇겠거니 하고 시인과 출판사 모두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그러다가 그 다음에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5공 청산 문제를 기다리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국민들처럼 양측은 그렇게 참을성 있게 기다려 주었지만 필자의 원고 청산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러니까 그 다음에는 시인 쪽에서 도리어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해설을 쓰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차옥혜 시인의 바닥 모를 순수함이 낳은 그 같은 불안감은 전혀 사실과 다른 것이었으며, 문제는 필자 개인에게 있었다.

필자는 그동안 전혀 글을 쓰지 않은 게 아니었다. 머리 속으로는 끝없이 글을 쓰고 지우고 했지만 완성을 시키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것은 좋게 말하면 기독교 문제에 대한 직장에서의 심각한 좌절감이 이 시집을 통해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고, 나쁘게 말하면 가볍게 마주 대할 수 없는 원고에 대해서는 마냥 시간을 끄는 평소의 버릇 때문이었다.

필자는 이즈음 르네 지라르 Rene Girard 의 말을 빌리면(예수의 수난을 제의로 만들어서 박해자의 대열에 선) 기독교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직장으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제의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희생함으로써 제의적인 기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처럼 보이는 차옥혜의 시는 필자에게 갈등의 대상이 아닐 수 없었다. 차옥혜의 시에 나타나는 기독교와 그녀의 시로부터 우러나오는 품성은, 소설가 정찬의 말을 임의로 이 자리에 잠시 도용한다면, <사랑의 군중을 거느렸고><그럼으로 말미암아 권력의 폭력성을 누구보다 생생히 드러내 보여 줄 수 있었던> 예수, 앞에서 이야기한 지라르의 예수에 너무나 가까이 접근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이 상반되는 두 기독교의 모습 앞에서 마냥 시간을 지체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필자는 시인으로부터 우송받은 교정쇄를 가방 속에 넣은 채 마냥 들고 다니기만 하고 있었다. 18개월의 기간을 약속하고 10년을 넘게 시간을 끈 오귀스트 로댕의 발자크 상처럼(필자의 글은 감히 그 명작과 비교 될 수 없지만 어쨌건 시간을 끌었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이 원고는 그렇게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리고 필자는 마치 밀린 원고를 두고 도박에 몰두하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심정을 이해하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아니, 순전히 자의적인 방식으로, 로댕과 도스또예프스키를 이해하는 심정에 사로잡혀 있었다. 필자를 구속하고 있는 기독교적 현실의 언어와 필자가 써야할 해설 속의 기독교적 언어 사이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 채 세상을 향해 열려 있었지만, 그 언어들이 이루는 의미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순결함으로 필자의 언어가 도달할 수 없는 저쪽에서 필자를 부르고 있었다. 

    2

차옥혜의 두 번째 시집 [바람 바람꽃]에 붙인 해설의 첫머리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었다. <차옥혜의 서사시[바람 바람꽃]을 다 읽고 난 후 필자는 한동안 막막한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처럼 사랑과 진실과 생명의 존귀함에 대해 순수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아직까지 있을 수 있다니---->라고. 필자의 이같은 생각은 이번 시집 [비로 오는 그 사람]을 읽고 난 후 더 분명하게 굳어진다. 그래서 그녀의 이번 시는 이 세상의 온갖 천박함으로 물들어 있는 필자에겐 두 번째 시집의 시와 마찬가지로 아직도 <이 세상을 향해 불어오는 바람>이고, <이 세상을 넘어서 피어 있는 바람꽃>이다.

그녀의 시에는 두 번째 시집이 그랬듯이 이번 시집에도,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시는 독특한, 정화된 아름다움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길을 막고 선

가시나무에

피 흘려도

어서 건너와

당신의 몸

찔린 상처마다

피어난 꽃을 보라는

나는

당신의 소리 없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사월]에서 

 

그녀의 시에 등장하는 이와 같은 <당신>의 이미지에는 조금도 증오와 원망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다. 또한 자신이 입은 상처에 대해 항의와 반발을 해보이지도 않는다. 자신의 완벽한 무죄로 자신의 죽음을 요구하는 집단의 폭력성을 입증해 보인 예수처럼 이 시 속의<당신>은 그렇게 서 있다. 그 당신은 <길을 막고 선/가시나무에/ 피 흘려도><찔린 상처마다/피어난 꽃을 보라는> 그런 당신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당신의 모습에는 제의화된 예수, 신화화된 기독교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자신의 수난을 증거로 타인에 대해 마찬가지의 수난이나 대가를 요구하는 세속의 오만함을 이 시 속의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녀의 이 시에는 그 대신 오로지 자신의 끝없는 수난으로 자신의 결백과 무죄를 입증해 보이는 사람의 자세가 들어 있다.

이와 같은 <당신>의 경지는 차옥혜 시가 도달하려는 목표이다. 그녀 시의 화자가 목메어 부르는, <내 애간장 다 태우>며 기다리는 그곳에는 언제나<당신(혹은 님)>이 있다. 그 님, 혹은 당신은 비록 호칭이나 시적 진술에 있어서는 한국 서정시의 전통적인 맥락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기독교적인 모습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에는 그래서 주()를 향해 나아가는 기독교인의 자세가 항상 들어 있다. 그 자세로 그녀 시의 화자는<당신>과의 합일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며 나아간다. 

 

마침내 꽃잎 지듯

내 살과 뼈 재가 되어

님이 밟을 땅

웅덩이를 메우며 스러져도

이 세상 끝날에도 타고 있을

내 불꽃 넋은

님 속에 집을 지으리니

-[분신]에서 

 

그러면 그녀의 시에서 <내 살과 뼈 재가 되>도록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님 속에 집을 짓>는 것이며 <님의 나라로 가는> 것이다. 

 

이제 우리 다시 님의 나라로 가는 길

때때로 가시 찔리고

들짐승이 으르렁거리고

강도 만나는 길

그러나 생명인 길

-[제야의 종소리]에서

 

따라서 우리는 이번 시집에 수록된 차옥혜의 이같은 시를 두고 <님 속에 짓는 집>, 혹은 <님의 나라로 가는 길>을 모색하는 시들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차옥혜의 시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도대체 어떤 집일까? 그 집은 어떤 모양의 집이기에 그녀가 그토록 간절히 소원하는 것일까? 그 집은 세속의 질서를 벗어난 저 먼 곳의 세계에서 아득히 우리를 손짓하며 오라고 하는 그런 종류의 어떤 집일까? 아니면 세속의 가치와 안락으로 우리를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집일까? 그리로 그 집은 어떻게 지을 수 있는 집일까? 우리는 이 같은 질문들을 떠올리며 그녀의 시를 차근차근 읽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녀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질서 속에 세운 집은 아니지만 세속의 집을 벗어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세우고 싶어하는 집은 세속의 정의로움과 무관한, 초월적 세계 위에 세워져 있지 않다. 그녀가 세우려는 집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분단의 현실이라든가 노동의 착취와 같은 온갖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시인 자신의 죄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아아 입 다물고

황사 바람에 눈감고 산 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소리들이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했던가

분단의 벽은 얼마나 더 높아졌던가

-[소리와 침묵]에서 

 

그녀가 님 속에 지으려는 집은 먼저 자신의 삶에 대한 죄의식과 부끄러움으로부터 벽돌장을 놓아가는 집이다. 그녀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삶의 질서, 세속적인 안락의 집에 대한 부끄러움은 그녀가 짓는 집의 초석을 이루고 있다. 이웃의 가난과 이웃의 고통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깊이 통회하면서 그녀가 세속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수평적이 삶(정의로운 삶)에 대해 가지는 부끄러움과 죄의식은 이번 시집의 곳곳에서 발견된다.

 

우리집 지하실 단칸방에/노모와 동생들과 함께 세를 살던 노총각은 /공장에서 12시간 노동에/잔업으로 야근까지 하고 돌아온 일요일/불편한 노모를 부축하여/마당가 화장실을 다녀가다/발을 멈추고/라일락꽃에 부서지는 봄볕을/하염없이 바라보다/문득 꽃밭을 손질하고 있는 나에게/어떻게 하면/집을 가질 수 있죠/라고 물었다./부지런히 일하고 근검 절약하면/누구나 집을 가질 수 있어요/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했다./그들은 소리 없이 씁쓰레하게 웃었다./그 순간 화살이 되어/ 내 가슴에 꽂히는 /그들의 웃음이여

-[우물 안 개구리] 전문

이렇듯 [내 친구의 십자가는]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친구의 자기 희생적인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우물안 개구리]와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이웃의 삶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과, [지리산 마을에서 하룻밤]과 같은 시에서 볼 수 있는 사회와 역사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은 그녀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다.

차옥혜 시의 핵심적인 기조를 이루고 있는 이 부끄러움은 그러나 이 글의 첫머리 부분에서 이야기했듯이 사회나 집단을 향한 증오와 분노로 곧장 표출되지 않는다. 그 대신 그녀 시에서 화자는 이 부끄러움을 자신의 내면을 향한 죄의식으로 치환시킨다. 윤동주가 그랬듯이 그녀 역시 이 세상의 온갖 모순에 대한 성찰을, 그녀 자신이 그러한 죄 많은 세상의 한 일원이라는 것을 먼저 깨닫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의식으로 치환해서 다시 성찰한다. 그녀 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들은 이 사실을 우리 앞에 뚜렷이 증거해 준다. 

 

창 너머 밝아오는 새벽빛을

차마 고개 들고 바라볼 수 없었다

-[아버지]에서

 

나이 사십이 넘고도

제자리에 없는 내가

부끄러웠습니다.

-[나의 기도]에서 

 

그녀 시의 화자는 <내가 죄인이듯이 당신도 죄인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그렇게 사람들을 협박하지 않는다. 그녀가 파악하는 예수의 죽음이 제의화된 기독교가 아니었듯이 그녀 시의 화자는 섣부르게 이 세상을 향해 강압적인 목소리로 회개를 요구하거나 대속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녀 시의 화자는 다만 <차마 고개를 들고 바라볼 수 없는>, 자신의 죄의식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래서 이 죄의식은 순결하다. 거기에는 희생적 일을 하는 사람들이 종종 드러내 보이는, 자신의 정의로움을 통해 자신의 자리를 이 세상 속에 마련하겠다는 욕망이 전혀 배어들어 있지 않다.

그녀 시의 화자가 드러내 보이는 이와 같은 순결한 죄의식은 그녀의 시를 수평적인 삶에 대한 관심을 넘어서 수직적인 삶의 높이에로 끌어올린다. 김교신에게 있어서 수직으로 치솟아 오른 포풀라나무가 그가 도달하려는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갈망의 표상이었듯이 차옥혜 시에 있어서<당신()>은 그러한 표상이다. 그녀 시 속의 화자는 이 세상의 온갖 부조리에 대한 자신의 부끄러움을 부둥켜안고 <당신()>을 향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화자는 인간들을 향해 속죄하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세계를 향해 기도의 자세를 취한다. 

 

채우지 마소서//비어있기에/충만한 평안을/그대로 머물게 하소서//비어있기에 꿈꿀 수 있고/내 안에 /햇빛과 달빛이 쉬어 가고/바람도 노래하다 떠나며/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감사하게 하소서//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 주소서

-[빈 잔] 전문 

이 기도의 자세는 위에서 보듯<당신()>을 향해 있다. 그러나 그녀 시의 화자가 당신을 향해 드리는 이 기도의 내용은 <빗물이 빗물로 고이고/눈이 눈으로 쌓일 수 있음을/기뻐하게> 해달라는 것이며, 따라서 세상을 향해 있다. 모든 것이 제 모습과 제 자리를 찾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도록<끝내 비어 있도록/용기를>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이 기도의 자세는 그러므로 다시 말하지만 이 세상의 집을 버리고 <당신>의 나라에 집을 짓고 싶다는 그런 일방적인 수직적 초월의 기도가 아니다. 그 자세는 수평적인 삶이 없이는 수직적인 삶도 없다는 자세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는 수평적인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삶을 수직적인 삶에 못지 않게 아끼고 사랑한다. 이 세상 속의 집들과, 그 집들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족들의 사랑을 아름답게 여긴다.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비어 있는 이 세상과 스스로를 희생하는 인간들의 모습을 찬탄한다. 이 시집에 들어 있는 다음 두 편의 시는 그래서 그녀가 <아름다워>라고 써놓지 않았더라도 무척 아름다운 시들이다. 

 

모두 훨훨 벗어버려

다 보이는 겨울 숲이여

있었는지조차 몰랐던

낱낱의 작고 가냘픈 어린 나무들이

드러나고

땅에 엎딘 마른 풀들도

환하구나

큰 나무들은

아득한 어린 나무들 앞에서

겸손하구나

이제 보인다

가려 보이지 안던

앞마을과 뒷마을

먼 산과 강과 지평선

그리고 길들이

환히 보이는구나

-[다 벗으니 다 보이는구나]에서 

 

서기 365년 대지진으로 파괴된 키프로스 쿠리온 시 유적터의 한 주택 내부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가 마주 꼭 껴안고 아빠가 엄마의 등 뒤에서 엄마와 어린 아이를 함께 꼭 껴안고 있는 모습의 완전한 유골이 발견되어 그 사진이 신문에 실렸다.

공포의 순간을 사랑으로 버티고, 1996년 오늘까지 이 세상의 뼈들 중에 가장 행복하게 남아 있는 이 유골들을 나는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아름다워라

-[가족] 전문 

 

그녀 시의 화자가 <넋을 잃고 바라보>는 이 가족의 사랑은 지상의 사랑이다. 그러므로 비록 차옥혜의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이 세상에 가시적인 모습으로 세워진 집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려는 집이다. 화자의 그러한 의지는 <아름다워라>라는 찬탄 속에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그녀 시의 화자는 가시적인 집이 아니라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집은 쉽게 허물어지고 영속하지 안는다. 그녀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그런 집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과 더불어 영원히 살 수 있는 마음의 집이다. 

 

내가 지은 집이

어느 날 정신을 차려보니

모래성이었습니다.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철근 기둥 세워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콘크리트 지붕 위에 기와를 올리고

높다란 돌담에 철대문도 달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잠깐 왔다가는 세상

바람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모래성이었습니다

이제는 해와 달이 아무리 넘나들고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

부서지지 않을

(중략)

울타리 없는

집을 지으렵니다

-[모래성]에서 

 

차옥혜 시의 화자가 짓고 싶어하는 집은 <바람 불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집이 아니라, <천둥이 울고 비바람이 몰아쳐도/부서지지 않을> 집이며 <울타리 없는> 집이다. 이 집은 지상에 세워진, 가시적인 형태를 가진 집이 아니라 차라리 마음 속에 세워진 집이며, 화자의 삶이 끝난 후에<내가 떠난 후에도 내 노래는 남아> 사람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집이다.

[명심보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만금의 재물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그것을 지키지 못할 것이고, 만 권의 책을 모아서 자식에게 물려주어도 자식이 능히 그것을 다 읽지 못할 것이다. 오직 덕을 쌓아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것이 가장 값진 것이다 라는. 그녀 시의 화자는 이같은 자세로 오직 <당신> 속에서만 올바르게 평가받을 수 있는, <당신>의 세계의 흔적을 가진 마음의 집을 짓고 싶어한다. 그 집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이 세계 속에 없다. 그러나 우리와 함께 이 세계 속에 있다. 

  3

이 시집에 대한 해설을 마치면서 필자는 첫머리에서 늘어놓았던 변명과 관련하여 개인적인 입장에서 이와 같은 차옥혜 시의 기독교적 세계에 대해 한마디 덧붙이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당신()>에 대한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과 관계된 것이다. 그녀 시의 목마른 갈망은 순수한 죄의식과 그 죄의식을 가지고 완전한 <당신>에게로 나아가려는 의지로 충만해 있기 때문에 신에 대한 인간적인 갈등의 흔적이 별로 없다. 이를테면 필자와 같은 경우 <가족>과 같은 시를 읽으면서 신의 완전한 사랑에 필적하는 인간의 사랑에 대한 아름다움과 함께, 그 같은 사랑을 지닌 인간들을 참혹한 죽음으로 몰아넣는 신의 의지에 대한 강한 반발심과 회의를 느낀다. 그러나 차옥혜 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그것이 이 번 시집에 수록된<아버지>에 대한 시들에서 엿볼 수 있듯 독실한 기독교 집안의 풍토에 기인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필자는, 개인적인 소신으로는, 이러한 반발과 회의의 진폭이 진정한 기독교인에게일수록 필요한 것이라 믿고 있다.

                                                      198912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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