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고은(시인)

 

시인 차옥혜씨는 1984<韓國文學>지 신인상을 통해 문단에 나온 사람이다.

 

1983년 초였던가, 그때 유럽 여행에서 돌아온 兪仁浩 교수로부터 두툼한 서류 봉투를 받았다. 서독에 있는 사람인데 병상에서 쓴 시 원고라고 했다. 그런데 그때의 나는 어디 갔다가 막 돌아온 뒤의 폐인 상태여서 그런 원고 따위를 읽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문자 행위에 대한 혐오까지 막을 수 없던 그런 형편이었다. 그러므로 그 원고 는 나한테 와서 괜히 묵살 당하고 만 것이다.

나는 병상에서 사경을 헤매면서까지 시를 써낸 그를 이미 알 만한 처지였고 그가 탁월한 노동법 학자인 林鍾律 교수의 아내라는 것도 언뜻 들어서 알고 있었으나 그런데 대한 체면치레조차 영 부질없는 것으로 생각되던 때를 지나서 고국에 돌아온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서독에서도 늘 시를 썼고 그 뒤로도 언제나 시에 사로잡혀 있는 중이었다. 시가 그에게는 한 구원인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전격적으로 소개했다. 그래서 그는 이 땅의 많은 시인 중의 한 시인으로 살 수 있는 새로운 시기에 들어선 것이다.

차옥혜씨는 무엇보다도 시 쓰기에 근면한 사람이다. 가만 두면 그의 방은 시로 꽉 찰지 모른다. 뒤늦게 시작한 사업이 무서운 법인데 그를 두고 이런 무서움이 떠오른다. 시집 본문으로 읽어야 하겠지만 먼저 여기서 급히 읽고 싶은 시가 있다.

[서시-개구리-]가 그것이다. 

 

불 붙은 목으로

사무쳐 부르는 이름

부르는 이름에

신이 들려서

밤새도록 너는 부른다.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나는 이 처녀 시집의 표제시이기도 한 이 시를 읽고 나서 이 시집을 다 읽어 버린 느낌이 들어 버렸다. 絶唱이다.

사치스러운 군더더기 얘기 하나 여기에 덧붙이고자 한다. 그야말로 먼 훗날 그의 아들들이 누런 어른이 되어서 이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위해서

비석 하나 세울 때는 이 시를 꼭 새겨 넣기를 바란다. 그 비석이 비바람 속에서 한 시인으로 노래하리라. 얼마나 좋은 광경인가.

 

이 시집의 시 배열은 정리된 것이 아닌 것 같다.

짐작으로는 최근의 것과 몇 해 전의 것이 순서 따위를 무시하고 섞여 있지 않나 싶다. 그렇기 때문에 시의 변모과정이나 그 발전의 단계들을 알아보기에는 편리한 점이 없다. 아마도 이 시집이 그에게 있어 첫 시집인 만큼 이 시집 안에서는 그가 서독에서 쓴 것이나 돌아온 뒤에 쓴 것이나 그것들은 동시성을 가질 수 있겠다. 이런 점은 그가 이 시집을 문학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음을 강조하게 만든다. 이제까지의 작업들을 한꺼번에 청산한다는 의미와 새로운 작업의 기반으로 삼는 의미로서 그에게는 이 시집이 하나의 이정표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집을 통해서 새로운 시인 차옥혜를 잘 만날 수 있다.

 

나는 이 시집 깊고 먼 그 이름에서 내가 무던히 좋아하는 시가 20 편도 더 넘는 사실에 놀란다. 큰 수확이다. 이 시집은 집념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모색된 세계의 여러 형태가 들어 있다. 그런가 하면 봄 가을 겨울 따위의 상투적인 계절감각과 함께 반복되는 이미지들의 구사로 하여금 시 하나하나의 고유성을 약화시키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시집에서 20편 이상의 빛나는 결실이 그것을 읽는 사람을 황홀하게 하는 일이란 신인의 성과로서는 드물기만 하다.

나는 서시를 제외하고도 [無痛分娩] [모랫벌] [첫눈] [재채기] [달밤] [나뭇잎] [매미] [가을 1] [겨울보리 4] [風景] [비 내리는 날] [안면마비] [누가 우리를 미치게 했는가] [파도] [목련] [안개] [광부 김씨] [기도 1, 2] [나와 나 3] [소철나무]들을 몇 번씩 읽을 만큼 좋아하고 있다. 이 우수작들로 하여금 차옥혜씨가 시를 쓰는 일을 우리 모두에게 확신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 시집에는 한두 가지 특질이 있다. 첫째 병 또는 병원 이미지가 두드러지고 있다. 그것은 존재론적인 시편의 절실함에서 자주 출몰하는 이미지이기도 하다. 자연이나 사물에 대한 인식까지도 문득 병적인 것과 결부되는 경우가 있다. 아마도 이런 태도는 삶을 삶과 죽음의 대비로 체험하는 경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한다. [비 내리는 날 2]들이 그렇다.

또 한 가지 그의 사물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답게 뜨거운 사회의식의 색조가 밝혀지고 있다. [가로수] [첫눈을 축복이라 말할 수 없구나] [매미] 일련의 [겨울보리]들이 그렇다. 이와 함께 때로는 그것의 확대로서 분단문제에 대한 비가가 있고 신앙의 자세로서의 성찰이 있기도 하다. 아직은 원숙하다고 볼 수 없는 역사의식에의 입문도 기대해 볼 만하다.

요컨대 이 시인은 흔히 여류시인의 情恨主義와 애상 따위와는 일단 구별이 되는 단호한 묘사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런 비 여류적인 가능성은 그만큼 앞으로의 정진이 요구되거니와 우리를 든든하게 하는 기본이기도 하다. 다만 호흡이 긴 시에서 그가 더 추구해 마땅한 의지의 편성에 천착해주기 바란다. 이 점에서 그의 뛰어난 短詩들의 경우도 한층 더 완벽해질 수 있으리라. 

 

바위산이 무너져 누웠다

 

차돌멩이 나도

자갈인 너도

부서져 부서져

조개와 게들이 집을 짓고

소라가 소리치고

물새가 알을 묻는

모랫벌 되자

 

이것은 [모랫벌]의 일부이다. 이 얼마나 무중력감을 동반하는 돌연한 세계 개편의 염원인가. 별다른 수사 없이도 이런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이런 시 한편 나오기 위하여 시인은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것인가. 좋구나 좋아. 

 

나는 너를

너는 나를 잃는다.

 

삭정이가 되는 나무

돌이 되는 짐승

 

손발을 잃고

귀와 입까지 잃은

나는

나룻배 한 척 없고

풀도 새도 없는

 

[안개]의 시인은 무자비할 만큼 세상에서의 인간의 절대 상실을 노래한다. 어디다가 고독이라는 말을 붙일 수도 없게 처절한 상황을 그는 숨가쁘게 드러내고 있다.

지난 시대의 일제 헌병경찰제도 시대의 젊은이가 쫓기다가 막다른 골목에서 어느 집 담을 뛰어 넘어서 구조되는데 그 구조의 인연으로 그에게 한 독립운동가의 부부가 된 실화가 있다. 그에게도 이 실화와 방불한 인연으로 한 모범적인 가정을 이룩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행복의 주부로만 잠자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인이란 깨어 있는 자의 행복의 형벌을 전적으로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집을 축하해 마지않는다. 깊고 먼 그 이름, 그 이름이 우리에게 달려오고 있지 않는가!

                                                                  1986년 봄

                                                                                             高 銀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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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탄생

     -한국문학 시부문 신인상 심사후기

 

김규동이근배

 

<가을나무>()의 차옥혜씨는 숨결이 고르게 시가 肉化되고 있다. 肉化라는 말은 思考와 언어감각이 이미 詩的情緖에 동화되어서 시에 대한 開眼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겉에 드러나지 않는 無技巧의 기교에 깊은 믿음이 가는 시인이다.

 

<한국문학 198411월호 276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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