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의 작품/

신덕룡(평론가)

 

차옥혜의 눈이 오지 않는다(동서문학 2)는 일상성이 단절된 데서 오는 안타까움을 노래하고 있다. 일상성의 단절은 곧 자연스러움의 상실을 의미한다. 시인은 눈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과 중간, 끝 부분에서의 반복을 통해 일상성이 단절된 상황을 독자에게 환기시킨다. 겨울이 겨울답기 위해선 눈이 와야 함을 작중 화자를 통해 강조하고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겨울은 상실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여름내 키운 나뭇잎을/다 빼앗긴/오동나무/마디마디 상처를 어루만질/눈이 오지 않는다/가을 난장바람에 끌려가며/나뭇잎이 남기고 간/통곡소리를 잠재울/눈이 오지 않는다(눈이오지 않는다2)

여기서 빼앗긴/끌려가며’, ‘상처/통곡소리가 주는 어감은 비극적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여름내 무성했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모체에서 떨어져나감은 자연스런 생명현상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화자는 자연스런 생명현상을 빼앗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순리를 역리로 받아들이는 화자의 생에 대한 비극적 인식은 삶의 메마름에서 기인하고 있다. 그렇기에 벌거숭이의 뜰에 사랑과 위안을 가져다 줄 눈을 안타깝게 기대하고 있다. 기다림과 안타까움의 소망은 꿈에서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꿈과 현실 어디에서도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상성의 단절은 그만큼 깊은 좌절과 절망적인 상황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상황은 눈이 오지 않음으로 야기된 것이지만, 이 시의 내면에는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담겨져 있음을 포착하게 된다. 꿈과 현실어디에서도 메마름의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비극적 인식이 좌절과 절망으로 끝나지 않고 있음은 이 시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안타까운 소망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비극적 상황을 반복해서 보여주면서도 비극을 비극으로 떨어뜨리지 않으려는 안타까운 몸짓은 풍요로움의 회복을 위한 준비이고, 삶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동서문학 19893337-338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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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5 한국시 총평

김광림 (시인)

 

예전에는 시인이 고통스러운 감정을 언어로 잘 드러내기만 하면 시가 되었지만 오늘의 시는 그것만으로 안 된다. 시인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날카로운 자의식에 의해 분석하고 그 속에서 자기를 확인하지 않으면 고통의 감정을 표현에 옮기려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존재론적 만남이 없이 섣불리 이를 말로 새겨서도 안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사정을 뒷받침이나 하듯이 신인 차옥혜는 그의 시(소설문학)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너를 향하여 불을 지핀다.

불빛보고 내게 오라

기다리다 지쳐 잠들면

너는 나를 부른다.

반가워 깨어나면

이미 떠나고 체취만 남았다.

더 밝은 불을 지피랴

내 몸 구석구석 남김 없이 태우랴

타버린 재를 들치고

내 영혼 안을 구르는

舍利로 와

만남의 기쁨이 비로소

노래로 터지려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시인의 감정은 날카로운 자의식에 의해 분석되고 그 속에서 자기 확인이 되어야 비로소 자기연소를 통한 표현이 가능해지지만 타버린 재속에서 舍利를 들춰내듯 고통을 겪고서 만나는 기쁨이 가 아닐까.

 

<心象 198512월호 42-4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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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달의 詩評

오세영(시인평론가서울대학 교수)

 

차옥혜의 목련바다(현대문학9월호)를 재미있게 읽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시상, 절제된 언어, 투명하고 밝은 이미지 그리고 주관 표출의 억제 등이 돋보였다. 전체적으로 볼 때 이 작품은 이미지즘 계열에 드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시인은 아마도 <수많은 작품보다 일생일대의 훌륭한 단 하나의 이미지를 창조하기 위하여>(파운드) 고심하고 있는 것 같다. 가령, 목련을 예로 들어보자. 

 

하얀 새들이 깃을 친다.

 

평생 형틀에 매여

살은 삭고 뼈만 남은

한 남자가 승천한다.

 

세계의 싸움터에

총소리가 멎는다.

 

드디어 하늘을 껴안은

하얀 나비떼

지상으로 돌아온다.

 

시인에게 있어서 제목의 선정이란 여러 가지 문학적 장치의 고려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 시에서는 시적 인식의 대상, 즉 소재를 제시하는 기능을 맡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시의 전체내용이 <목련꽃>에 대해서 씌어지고 있음을 암시해준다는 말이다. 목련꽃에 대한 순간적 지각의 의미가 이 시의 전체내용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총 4연으로 되어 있는 이 시는 각개 연 하나하나가 목련꽃을 서술한다. 시적 진술에 여러 가지 부차적 장식들이 있지만, 이를 추상화시키면 대략 다음과 같다. (1)목련꽃 = 깃을 치는 하얀 새, (2)목련꽃 = 형벌로 뼈만 남은 한 남자의 승천, (3)목련꽃 = 세계의 싸움터에서 멎는 총소리, (4) 목련꽃 = 지상으로 돌아오는 하얀 나비떼 등이다. 이상의 요약은 이 시가 시인의 어떤 관념이나 주장을 독자에게 호소하려는 의도에서 씌어진 것이 아니라,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때 얻어진 순수한 현상학적 의미를 형상화함으로써 씌어진 것임을 알게 한다. 요컨대, 어떤 관습적인 의미나 경험적 인상, 또는 편견을 배제하고 시인이 사물로서의 목련을 소위 순수의식으로 바라보았을 때 그것은 순간적으로 새도 되고 남자도 되고, 또한 총소리나 나비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이미지 제시에 의해서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복합적인 의미가 함축된 이미지를 일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여러 가지 위험이 따르겠지만, 대상과의 유사성을 전제하고 살펴본다면 대체로 구원과 평화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하얀 목련꽃들은 소복 입은 여인 같은 느낌을 주는 데, 동시에 꽃망울이 떨어진 연후에 잎이 돋아나는 생리는 이와 관련하여 자기희생, 속죄양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목련꽃이 지닌 이와 같은 자기 헌신, 죽음 순수동경, 구원 등의 의미를 시인은 <하얀 새> <승천하는 남자> <싸움터에서 멎는 총소리> <하얀 나비떼> 등으로 형상화시킨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차옥혜의 목련은 시인이 이미지 창조에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독자에게 호소해야 될 어떤 인생론적 관점을 결여하고 있다. 아름다운 시와 훌륭한 시는 다른 것이다. 앞으로 차옥혜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아름다운 이미지를 통해 어떤 삶의 진실을 이야기할 것인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현대문학 198510월호 420-421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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