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人은 누구인가?
서홍관(시인ㆍ의사)
머리글
시인은 누구인가? 시인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인가? 시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왜 그 사람은 시인이 되었는가? 그 사람은 시인이 되어서 그 사람의 인생의 무엇이 달라졌는가?
나는 한 사람의 시집을 읽을 때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가끔’이라고 말한 것은 항상 그런 근본적인 문제까지 도달하지 않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한 사람의 시집을 評해보라는 엄청난 과제가 떨어져서 차옥혜의 시집을 읽으면서 계속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차옥혜라는 사람의 삶은 시인으로서 다른 사람과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시인은 범상한 사람과 달리 ‘역시 고상한 삶’과 ‘역시 고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만약 고상한 삶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것은 원래 그랬던 것인가 아니면 시를 쓰면서 그렇게 된 것인가? 만약 고상한 삶이 아니라면 시인이 된 것과 되지 못한 것의 차이는 단지 이름 뒤에 ‘詩人’이라는 멋있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과 그러지 못하는 것과의 차이밖에 없는 것인가? 나는 이런 의문을 가지고 이 시집의 시들을 꼼꼼히 읽어보았다.
우선 이 글은 평론가의 글과는 달리 시를 쓰는 한 사람이 다른 시인의 시를 감상하는 수준에서 다루었다는 점을 밝혀둔다. 아무개의 시 세계를 싸그리 정리분석해서 독자에게 보여주는 글은 아예 언감생심 생각조차 하지 못하였고, 그저 평범한 한 독자의 입장에서 느낀 점들을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다 보니 매우 주관적으로 생각이 흘렀음을 미리 고백하고 다른 이들이 부족한 점을 보충해주기를 바란다.
우선 분류된 순서대로 1부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1부의 詩들
20面 「꿈을 준다는 돌고래와 어느 곡예소녀」라는 작품은 이미 충분히 보도된바 있는 유흥업소에서 줄타기를 하는 12살 소녀의 이야기를 돌고래에 비유해서 쓴 시이다.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자란 소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과 분노를 돌고래를 동원해서 적확하게 전달하고 있다. 한가지 아쉽다면 마지막 연에서 ‘돌고래와 곡예소녀가/내 가슴 블랙홀에/한없이 추락한다.’라고 기술했는데 블랙홀 운운한 대목은 도리어 사족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연은 없어도 좋았을 것이다.
16面 「문」은 열쇠를 잃어버린 주인이 열 수 없었던 아파트 문이 몇 일 전 도둑에게 그랬던 것처럼 열쇠기술자에게 쉽게 열리는 것을 보고 ‘정작 주인은 문 밖에서 서성거리다 떠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는 내용의 시이다. 작은 사실에서 커다란 사실로 상상력을 넓혀 가는 것에서 시인답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18面 「삶」이라는 시는 어머니와 나와 아들과 죽은 이후의 나로 이어지는 세월 속에서 ‘힘든 삶’을 이겨보려고 ‘바람은 곧 멎을 거라고’ 믿으면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내용을 보여준다. 그러나 삭다 만 뼈가 바람은 곧 멎을 거라고 말한다는 대목에서 좌절된 허망함을 느끼기 보다 오히려 희망을 간직하려는 인간의 따스하고 끈질긴 생명력이 느껴지는 곳에 미덕이 있다.
14面 이 시집의 표제시인 「발 아래 있는 하늘」은 이제까지 ‘머리 위에 있는 하늘’만 보고 살았는데 ‘발 아래 있는 하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그리고 발 아래 있는 하늘과 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 하나로 우리를 감싸서 ‘하늘과 나와 당신이 하나인 것’을 본다는 내용이다. 다만 이 시는 이 시를 쓰는 화자의 주변정황이 불명확하고, 화자가 느낀 ‘우주적 감동’이 독자에게 전달이 되지 않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고 보인다.
11面의 「흙은 흙을 거부하지 않는다」는 작품은 우리 인간에게 자연이 가르쳐주는 교훈을 간결하게 형상화한 좋은 작품이었다.
또한 생활인으로서 자신의 일상적인 삶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갈고 닦는 시인의 모습을 보는 시들도 있다. 예를 들면 「새해 새아침」(23面)이라든지 「산다는 것은」(12面)과 같은 작품들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아쉬운 점이 있었다. 1부에서 「무지개」「고요」「만남」등은 상식적인 작품이라고 생각되었고, 「여름」은 너무 간단하게 쓰여져서 전달될 것이 미처 담아지지 않은 작품이라고 생각되었다. 「겨울고목」은 ‘겨울고목이 사상을 한다’는 명제가 무슨 뜻인지 그 국어적인 말의 쓰임에도 의문을 품게 되었고 전체적인 시의 내용도 시인만이 목에 힘을 주고 있을 뿐 독자가 감동할만한 여백을 남겨주지 못했다.
2부의 詩들
「춤」연작 1-7을 읽으면서 1부에서 느꼈던 감동을 느끼지 못했다. 어쩐지 어색하고, 막연하고, 작위적인 느낌을 받았다. 춤이라는 것이 때로는 기막히고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삶의 곡절을 표현하는 뜨거운 몸짓이라고 할 때 ------ 물춤, 하늘춤, 불춤, 바람춤으로 표현되는 ‘춤’이 작자만이 이해하는 것처럼, 관객과 동떨어진 거리감을 느껐다. 「춤2」도 마치 詩作法에 나오는 시처럼 깔끔하되 건조하였다. 구체적인 삶의 곡절을 반영하지 않아서 그렇게 느꼈던 것인가 아니면 또 다른 무엇이 있단 말인가.
38面의 「고속도로에서는」에서는 ‘가장 빠르게 기분 좋게 이르는 고속도로/고속도로에서는/고속도로 만세를/아니/사람 만세를/ 소리치지 않을 수 없구나’라는 대목에서는 너무 순진하고 솔직한(?) 느낌을 받았고 ‘고속도로에서는/할머니와 할아버지를/부모와 자식을/나를/부인할 수 없구나’라는 대목이라든지 ‘내 몸도 고속도로로 누울 그곳까지’라는 대목은 무슨 뜻인지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40面의 「장마」와 42面의 「바람」,「냇물」,「닫힌 문 열리니」에서는 원초적인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가고파 하는 인간의 그리움이 간직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부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작품은 44面의 「콩깍지」였다. 익자마자 맞아서 콩을 내놓고, 태워져서 재로 밭머리에 뿌려진 콩깍지에서 빼앗길 대로 빼앗긴 어머니를 연상한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느낄 수 있었다.
3부의 詩들
3부에서는 통렬한 정치적 또는 사회적 메시지를 볼 수 있다.
「두 여인의 하루」에서는 ‘건축공사장에서 석면을 붙이는’ 여인과 ‘사우나탕에 들락거리는 회장부인’이 등장해서 두 사람의 삶을 비교한다. 「김성희」에서는 불평등한 세상에서 불평등하게 자라서 온갖 고초를 다 겪은 44살 노처녀가 누구나 벌거숭이인 공중목욕탕에 가는 것이 취미라는 것을 통해서 인간의 평등한 모습을 공중목욕탕에서야 겨우 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불평등한 세상을 꼬집고 있다.
「1991년 지하철역 한국 민주주의」에서도 한국의 민주주의 수준을 비판하고 있다.
통일에 대한 시들이 또 눈에 띄는데 「통일조국 어머니」와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에서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아마도 「지금은 2월」에서도 실은 분단된 조국의 아픔과 통일된 조국을 그리는 내용이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점에서 이 시도 통일을 주제로 한 시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66面의 「홍수」에서는 홍수를 ‘다수의 폭력’이라고 표현하고 적어도 민주주의라면 ‘아무도 단 한 송이 풀꽃이라도 그렇게 으깨버릴 수 없다’라고 선언하면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빙자한 권력의 횡포를 비난하고 있다.
다만 「초록빛으로 흔들리자」에서는 핵문제를 이야기하되 상식적인 표현으로 인하여 건조하다. 마지막으로 「잘린 수세미 꽃이」에서는 반생명에 대한 강력한 반발을 통해 생명을 귀하게 생각하는 시인의 생각이 드러난다.
4부의 詩들
4부는 흙을 향한 노래 14편으로 구성되었다. 나에게는 이 시집의 가장 좋은 시들이 여기에 몰려있다고 느껴졌다. 72面의 모깃불을 피운 저녁식사라든지, 73面의 농약 때문에 사라져버린 개구리, 맹꽁이, 지렁이를 생각하며 잠 못 이루는 밤이라든지, 75面의 농약을 제 손으로 뿌리는 자기 모순에 대한 분노(?)라든지, 76面의 손이 잘린 점례의 아픈 이야기라든지, 농촌의 모든 사람들과 벌레와 집짐승들이 스승이라는 77面의 시들이 하나같이 쉽게 가라앉힐 수 없는 생래적인 흙과 농촌에 대한 애정이 절절하게 배어있다.
또 홀로 된 느티나무집 할아버지의 외로움과 운명을 그린 82面의 시와 경찰의 잘못된 사격으로 사망한 한국원씨의 이야기를 그린 84面의 시와 농약을 마시고 쉰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바위네 엄마의 아야기를 그린 86面의 시들이 모두 생생하다. 다만 86面의 시에서 바위네 엄마가 자살한 이유가 불분명한 것이 조금 걸린다.
90面의 시는 골프장을 건설한다고 산을 파헤쳐서 산사태가 났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농촌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정신나간 사람들)을 담고 있는데 골프장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는 농촌사람들이 수동적인 입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완전히 면책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 근본적인 원인 제공자를 먼저 비판하지 않고 단순 가담자만을 비난한다면 그 지적은 부당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85面의 호박에 대한 시는 대체로 좋은 시임에도 마지막 연의 ‘당신 만세/호박만세’라는 대목은 긴장하던 독자들을 깜짝놀라게 하여 긴장을 풀어지게 하는 느낌을 준다. 80面의 시는 들깨가 쏟아지는 들깨줄거리와 나를 비교한 것인데 ‘이 다음 죽은 나에게서/무엇이 쏟아질까요’하고 질문을 던졌으나 나와 들깨에 대한 충분한 연결이 되지 않아서 질문을 통해서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지 못하고 있다.
또한 81面의 조롱박에서는 작위적인 -시를 창작한다는 의식이 너무(?) 드러난-느낌을 주면서 특히 마지막 연의 ‘아아 당신을 사랑합니다.’에서는 감정의 무분별한 토로가 아닌가 싶다.
5부의 詩들
5부에서는 스승의날 남북작가회의 한다고 판문점으로 가던 스승이 갇힌 서울구치소로 면회 가는 장면을 그린 95面의 「어느 스승의 날」이 인상적이었다. 또 지주대가 있어야 오르는 더덕을 보면서 ‘당신에 기대지 않고는 나 하늘에 오를 수 없음을 이제야 겸손히 고백합니다’라고 고백하는 97面의 「더덕밭에서」는 아마도 당신이 ‘神’이나 ‘眞理’를 의미하지 않을까 싶다. 또한 나 자신이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박제된 것이 아닌가 하고의심하는 「박제된 나」등의 시들이 맘에 들었다.
여성문제를 다룬 102面의 「여자, 나를 풀어 떠나보내며」에서는 ‘여자와 남자가 함께 하늘을 이고 있는 세상’을 그리고 있다. 다만 약간 산만해보이는 점이 아쉽다.
그러나 「북」이라든지, 「비」라든지에서는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불분명했고, 105面의 「나는 어떤 나라 여자인가」에서는 왜 작자가 ‘왜 그토록 감탄’하고 ‘나는 어떤 나라 여자인가’하고 의문을 제기하는지 독자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또 108面의 「가을바람」이나 109面의 「너는 어디 있는가」도 막연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친구의 죽음을 다룬 「너는 갔어도」라는 시에서도 왜 친구가 죽었는지가 밝혀져 있지 않고 그 친구와 자신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지 않아서 왜 ‘친구야/너는 갔어도 가지 않았구나/삶과 죽음의 멍에 하나로 지고 우리 함께 서 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이처럼 전달하는 내용이 불분명하게 감춰져 있는 시들은 시와 독자 또는 시인과 독자의 거리를 멀게 해주는데 기여할 뿐이다.
맺음말
지금까지 시인으로 등단하신지 9년이 되는 차옥혜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의 시들을 감상해보았다. 이 78편의 시들은 저자의 말에 의하면 1988년 후반에서 1992년 사이에 씌어졌다고 한다. 왕성한 창작의욕이 감지되는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었다. 저자의 서문을 읽어봐도 시인으로서 ‘티’를 내려는 기색은 보이지 않고 마치 처음 시인으로 등단하던 각오처럼 의욕적인 느낌을 준다.
나에게 인상깊은 시들은 흙과 농촌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4부의 시들과 3부에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쓴 시들과, 살아가면서 생명을 고귀하게 생각하는 시들이었다.
본격적인 비평이 되지 못한 점 사과 드리며, 더욱 좋은 시를 쓰시기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시인 자신의 말을 빌어 ‘새로운 각오로 더욱 시인과 그의 가족과 이웃의 삶을 사랑하며 머리와 가슴만이 아니라 온몸으로 시를 쓰도록 노력하시기’를 바라면서 이 글을 맺는다.
<민족문학작가회의 시분과위원회 1993년 3월 시집 합평회에서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