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찾아서
오철수(시인/문학평론가)
序詩 ―개구리
차옥혜
불 붙은 목으로
사무쳐 부르는 이름
부르는 이름에
신이 들려서
밤새도록
너는 부른다.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그 이름을 찾아서
-그것을 우리는 인생이라고 하던가요-
시인은 무엇인가.
밤낮 없이 개골개골 대는 개구리의 울음에서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을 생각하고, ‘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 생각하는 시인은 정말 제 2의 창조주인가. 흙으로 빚은 사람 모양에 아담의 갈비뼈 하나를 꺼내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서 창조했다는 창조주의 창조 행위를 저도 모르게 닮아버린 족속.
시인은 무엇인가.
저 혼자라면 그저 물질의 본능에 따라 시간과 공간 속으로 스며들어 자취도 없을 것들에 <의미라는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과 닮은 세계로 만드는 시인은 무엇인가. 진정 제 2의 창조주인가.
그러나 그 이 얼마나 외로운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사무친 가슴 가진 사람이었으면 개골개골 밤낮 없는 그 울음에서 ‘사무쳐 부르는 이름’을 생각했으며 ‘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 떠올렸을까. 아니 그의 목에 ‘불 붙’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읽는 차옥혜 님의 「서시―개구리」에서 저는 한 인간의 억누를 수 없는 갈구와 그에 신들려 가는 열창을 느낍니다. 왠지 전에 읽었던 ‘잔디/잔디/금잔디/심심 산천에 붙는 불은/가신 님 무덤 가에 금잔디’라는 김소월 님의 「금잔디」 일 절을 듣는 듯.
개구리 울음 소리에 제 몸이 달았습니다.
‘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 부르는 소리’, 시인의 마음도 그 울림 그대로 신이 들려서 밤새도록 부릅니다. 목에 ‘불 붙’었습니다. 심심산천에 불 붙 듯, 아아 이름을 부릅니다. 그 자체가 존재 이유이자 생명이 된,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그 이름을’ 부릅니다.
저는 지금 그 소리에 취해 있습니다. 온통 개골개골 거리는 소리, 그 자체가 존재 이유이자 생명인 소리(아마 그것을 추구한다하여 시인은 이 시를 「서시」라고 이름했나 봅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되지요.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부르는 행위의 것, 그것은 무엇일까. 내 한평생을 살아가며 그 자체가 나의 <존재 이유이자 생명>이어서 추구하는 그것은 무엇일까.
그런 사념에 빠져 있노라면, 그 먼 어디쯤에 이런 문구 하나가 마치 늦가을 감나무에 까치밥처럼 걸립니다.
<우리 본디의 모습을 한 우리--->
저는 이 시의 핵심이 바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우리>에 대한 존재론적 갈구라고 생각합니다. ‘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 /그 이름’은 바로 <본디의 나>, 소외되지 않은 나, 그래서 자유를 만끽하고 있는 자유로운 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소외를 극복하고 완전히 발전된 인간과 그를 닮은 사회를 누리는 인간!
그렇습니다.
이 시는 그것을 부릅니다. 깜깜한 밤, 그 실존의 어둠 속에서 밤이 지새도록 지금의 존재를 존재이게 해주는 그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 부름과 갈구가 멈추는 날 존재는 허물어지고, 물질의 법칙 속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갑니다. 그래서 ‘부르는 이름에/ 신이 들려서’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도 다른 어디에 있는 무엇(절대자 같은 것)이 아닌, 바로 현재의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지요.
왜 하필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인가? 하늘나라에 있는 그 이름일 수도 있고, 죽음일 수도 있는데, 왜 하필 ‘네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그 이름’인가?(이 점은 이 시 자체로만 해석하기에는 상당한 억측이 따릅니다. 왜냐하면 그 개연성이 너무 넓고, 이 시는 단지 개구리 소리만을 형상한 것이 아닌 「서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과 이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 이후의 작품 경향에 도움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것을 다 읽어보지 않은 분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그 경향을 소개하면 가장 최근에 나온 시집 『발 아래 있는 하늘』에 집약되어 있는 <현실에 대한 관심>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 존재가 자신을 성장시켜 나가는 힘은 그 자신 안에 있고, 그것도 오늘의 내가 일-사회적 활동-을 통해 획득한 내 모습의 반성적 인식과 새로운 실천-사회적 활동-을 통해 나를 성장시킨다고.
실재로 우리는 이런 과정을 통해 오늘의 나보다는 바람직한 내일의 나를 갖곤 합니다. 간단한 예로, 몇 천 년 전의 인간과 현재의 인간을 비교하면 이 말은 당연한 말이지요. 그래서 비록 오늘의 존재는 오늘의 사회적 규정성 속에 있는 존재이지만, 그 마음 속에 있는 존재는 그것을 넘어선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 때 그 마음 속에 있는 존재는 현재의 존재를 <지양-‘제거와 보존’>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그 상태는 지금과의 단절,-혹은 초월-이 아닌 연속성 속에 있는 것이지요(이 점이 중요한 것은 이후 시창작이 더 추상적인 절대자에 대한 갈구로 갈 것이냐, 아니면 더 나은 인간적 삶의 진전 속에서 신을 닮아갈 것이냐는 하는 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후자의 길을 택한 것 같습니다. ‘머리 위에 있는 하늘만 보고 산 나는/오늘 처음으로 발 아래 있는 하늘도/보았습니다./아니 발 아래 있는 하늘과/머리 위에 있는 하늘이/소중히 감싸고 있는/나를/당신을/보았습니다.’-「발 아래 있는 하늘」중에서).
저는 바로 이 지점에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의 비밀을 일체 지웠으면 합니다. 즉 지금의 내가 지양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좀더 편안하게 생각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지금의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또 하나의 자신이 있습니다. <그 나>는 현실의 나 속에서 배태된 <나>입니다. 현실을 살아가며 불만족스러웠던 내가 하나 둘 불만족의 껍데기를 벗겨 만족스러운 <나>를 만들어 간 것이지요.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나>는 현재의 <내>가 만나야 할 <나>인 것이죠. 경제적으로 어려워 소외되었던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해방된 <나>를, 사회적으로 억눌렸던 사람은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를, 그런 <나>의 총체로서 현재의 <나>속에 있는 또 다른 <나>.
그것의 간절한 형상적 표현이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인 것입니다, 즉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나>이고, 그 <나>는 현재의 나를 지양한 <나>이기 때문에 ‘깊고 먼’ <나>입니다(우리는 그런 <나>를 소외되지 않은 자유로운 인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또 삶-인생-이라는 것은 현재의 내가 그런 자유로운 나를 찾아가는 행위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 시는 그 점이 인식되고, 이제쯤 그 갈구를 느끼는 상태에서 쓰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도 이 시가 쓰여질 수 있었던 것은 개구리 울음 속에서 이런 존재론적 갈구를 감동의 자리로 가졌을 때였을 테이니까요.
그래서 이런 갈구는 무통분만일 수 없습니다.
아주 충분한 갈구의 내적 조건을 가져야만 합니다. <나 속에 있는 나를>, ‘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 지금 여기에서 이처럼(‘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신이 들려서’)부르도록 했던 이유를 말입니다(특히 편폭이 짧은 서정시에서는 서정의 힘으로). 예를 들어, 현실 속의 자신의 모습에서나 이웃의 모습에서, 그것도 가장 부자유한, 손상된, 말 그대로 소외된 인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속에서 이런 서정을 응축했을 법한.
웃으려는데
어인 일일까
반쪽 얼굴은 웃고
반쪽은 무표정하다.
말하려는데
한쪽 입술은 움직이고
다른 쪽은 가만히 있으니
바람이 샌다.
내게 두 사람이 있어
한 사람은 좁은 길로
다른 사람은 큰 길로
가려고 한다
한 사람은 빈 밥 그릇을
다른 사람은 가득 찬 밥 그릇을
풍성한 것이라고 고집한다
-「안면마비」중에서
그런 일단을 느끼게 해주는 소외의 다른 표현이지요(이런 현실의 모습은 「서시」가 실린 『깊고 먼 그 이름』 이후 『비로 오는 그 사람』, 『발 아래 있는 하늘』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상화를 이룹니다).
바로 이런 인식에 바탕하여 소외 속에서 소외되지 않는 인간의 모습에 대한 갈구,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이 생성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절박했으면 ‘불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는 이름’이라고, ‘부르는 이름에/신이 들려서/밤새도록’부르는 이름이라고 했겠습니까.
그래서 이 시를 읽노라면, 나도 모르게 내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으로의 나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정말이지 길지도 짧지도 않은 육십 평생, <나는 무엇을 추구하며 살았던가?>, <나는 진정 자유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 성실한 실천을 해왔는가? 적어도 시인처럼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신들려/밤새도록’ 나는 행동해 왔는가?>, <내 목숨 위에 있는 깊고 먼 자유로운 나를 찾기 위해 열성이었는가? 아아 나는 그런 것도 없이 생활이라는 중량에 눌려 현실의 노예로 살지는 않았던가?>
그래서 이 시를 읽노라면 내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이 생각납니다. 그런 자유로운 내가 살아가는 그 세상이 그리워집니다. 역사학자에 따르면 <자연적 실재의 단계→사회발전의 단계→자유의 단계>로도, <인간 본질의 소외 단계→소외 극복 단계→역사의 목표인 진정한 사회 단계>로도, <인간의 자연상태→비인간화→인간화의 단계>로도 표현되는 그 마지막 단계이기도 한 그 세상.
혹 그 세상은 고은 시인이 ‘이 얼마나 무중력감을 동반하는 돌연한 세계 개편의 염원인가’라고 평했던
바위산이 무너져 누웠다
차돌맹이 나도
자갈인 너도
부서져 부서져
조개와 게들이 집을 짓고
소라가 소리치고
물새가 알을 묻는
모랫벌 되자
―「모랫벌」중에서
는 아닐까. 내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 이 살고 있는 세상.
그래서 이 시를 읽노라면, 오늘도 그 세상에 살고 있는 나를 만나기 위해 ‘불 붙은 목으로/사무쳐 부르’며 달려가는 거대한 인간의 춤, 실존의 춤이 보입니다.
‘네 목숨 위에 있는/깊고 먼/그 이름을’찾는 사람들, 찾아가는 사람들. 그것을 우리는 사람 세상의 인생이라고 하던가요.
이상이 제가 읽은 차옥혜 님의 「서시―개구리」입니다.
끝으로 시인의 시중에서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은 기억으로 남는 슬프고도 아름다운 시 한편을 읽으며 글을 맺을까 합니다.
구로공단에 취직한 딸이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
영등포 어느 병원 응급실에 있다는
전화를 받고
점례 네 엄마는
마당에 쓰러져
어서 가야 하는데 어서 가야 하는데
정신 없이 중얼거리기만 해
용길이네 할아버지가 경운기에 태워
버스길까지 데려다 줬는데
몇 발짝 사이로
한 시간에 한 번 읍내로 가는 버스를 놓치고
길섶에 주저앉아
어쩔거나 어쩔거나 신음소리 내며
애꿎은 당신만 두 손으로 탕탕 치다
산당화가 되었습니다.
-「흙을 향한 노래-산당화」전문
<『내마음이 다 화사해지는 시읽기』 1995년, 34-4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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