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승하

 

 

21세기가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우리 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는 좋은 시가 없다며 문예지와 시집을 외면하고 있다. 간혹 큰 서점에 가보면 시집 코너는 늘 한산하고, 간혹 손님이 계산대에 갖고 가는 시집은 그 이름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베스트셀러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시집이다. 문학평론가에게 부과된 의무가 있다면 매달 매 계절 쏟아져 나오는 문예지에서 '좋은 시'를 찾아내어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인의 등단 지면발표 지면안면학연지연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평가하기란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옛 사람의 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자신을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탁자(琢字)와 연구(鍊句)에 숙달하는 일과 사물을 본뜨고 정서를 묘사하는 미묘한 일들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자연스러움이 첫째의 어려움이요, 깨끗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정약용이 {與猶堂全書}에서 한 말이다. 다산은 시어를 조탁하고 시구를 연마하는 것이나, 사물과 정서를 잘 묘사하는 일이야 웬만큼 수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좋은 시 쓰기가 어려운 것은 지나친 꾸밈새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움에서 자꾸 벗어나기 때문이며, 깨끗한 여운을 남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터인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서거정이 {東人詩話}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시는 마땅히 기절(氣節)을 앞세우고 문조(文藻)는 뒤로 해야 한다." 시인의 기개와 절조, 즉 시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언어 조형력, 즉 기교가 그에 앞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동양의 시학이다.

서구의 상징주의와 주지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후 우리 시는 '정신의 시'를 버리고 '기교의 시'를 열심히 배우고 학습했던 것이 아닐까. 정말 좋은 시는 양자의 선미한 결합, 다시 말해 기법에 있어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요 정신에 있어서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이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보들레르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나 랭보의 견자(見者)의 시학이 오로지 기교에만 국한된 시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는 시인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특히 사물에 대한 감각과 사물과의 교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랭보는 보편적 영혼에 이르기 위한 착종의 감각을 중시한 견자의 시학을 들려주었다. 글쎄, 정신의 깊이가 아니라면 감각의 눈부심, 이미지의 떨림을 전해주는 시가 나와야 될 터인데 그런 시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625전쟁이 터진 가을

12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 더부살이였는데

끼니때마다 큰아버지가 밥 많이 먹는다고 소리쳐

무릎이 곪고 부은 발로

낙엽을 밟으며 사라졌다.

친척들 집에 자식들을 나누어 맡기고

며칠마다 둘러보던 어머니가 오빠를 찾아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가보니

오빠는 호두나무 밑에서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12살 오빠와 호두나무와 쌀 한 가마'란 부제가 붙어 있는 차옥혜의 시 []({시와 생명}, 2001. 겨울)의 전반부이다. 1945년 생 시인의 작품이므로 아마도 시 내용의 거의 전부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싶다. 이 시에서 시적 기교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일을 별다른 감정의 이입이 없이, 즉 담담히 술회하고 있을 뿐이다. 625를 만나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다. 열두 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큰아버지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소리치자 다시금 자기가 살던,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집에는 호두나무가 있었던가 보다 

 

어머니가 다시 큰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오빠는 호두나무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전쟁터 집에 머물렀다.

얼마 후 12살 오빠는

국군들 잔심부름하는 소년병으로 지원하면

가족에게 쌀 한 가마 준다는 말에

어머니가 잠든 사이

얼어터진 발로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눈을 밟으며 집을 떠났다.

 

제목과 부제를 다시 새긴다. , 12살 오빠, 호두나무, 쌀 한 가마. 설움 받고 살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소년, 가족이 얼마 동안 ''을 먹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한 열두 살 소년의 마음이 심금을 울리는 바가 없다면 그 독자는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이 시에서 비유의 참신함이나 시적 형상화의 진경을 찾아볼 수 없다고 누가 수준 미달작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 반대할 것이다. 시적 진정성은 소재의 특이함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이 시처럼 주제의 힘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감동은 흔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두 살 오빠의 착한 마음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누이의 착한 마음이 '깨끗한 여운'을 남긴다.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 시의 마지막 6행은 문장이 다소 길어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문학나무 20027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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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 정서의 객관화

전원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보는 방법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을 이해타산으로 보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대부분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경우가 가장 많고, 유심히 보더라도 나와의 이해상관 속에서 득실을 따져 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는 경우가 일상적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느낌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새롭게 볼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주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시는 대상을 일상적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중심이 된다. 습관적이거나 의례적인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그리고 돌발적인 견지에서 인식하여 이를 엉뚱한 문맥 속에 넣음으로써 그 것을 낯설게 만든다. 대상을 낯설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지녀온 상투적 의미를 벗어나 아주 새로운 의미로 바꿔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한 대상에 대한 습관적일상적기계적 반응을 와해시키고 참신한 개성의 아름다움을 얻는 일이 된다. 그래서 시작 행위는 대상을 낯선 문맥에서 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유형을 흔히 네 가지로 나눠 객관화와 주관화, 주관 대상의 객과화와 주관화로 말하기도 한다. 이는 객관대상이나 주관 대상을 수용인식하는 태도에 의해서 나눈 것이다. 주체인 시인이 객관대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심정등 주관을 표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제시하는냐 아니면 주관으로 변형시켜 의미의 변용을 가하느냐에 따라 객관대상의 객관화, 객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된다. 또 주체인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표출되는 영상이나 개인적 상념인 주관대상을 현상 그대로 제시하고 마는가 아니면 주관적인 재구성을 하느냐에 따라 주관대상의 객관화, 주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하고 있다.

어떤 유형의 시가 됐든 시는 주체적인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요, 그 표현되는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 주체의 정서는 어떤 오브제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표출되든 전달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그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공감될 수 없는 시는 시라 할 수가 없다. 객관대상을 객관화하여 독자에게 맡기든지, 주관화하여 새롭게 의미화하든지 거기에는 독특한 시적 구조가 갖춰져야 미감을 획득하여 전달될 수가 있다. 또한 주관대상을 그대로 피력하거나 아니면 다시 해석구조로 변용시키든 그것도 독자에게 공감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시로서의 구실을 가게 된다.

시가 아무리 주관적인 예술이지만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시로 표현되었을 때 최소한의 전달 기능을 갖추지 않으면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곧 주관적 정서가 감동이라는 객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좋은 시란 개인의 정서가 잘 담긴 정서적 반응이면서 독자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공유가 곧 객관성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이 정서의 객관화를 위해서는 내적인 표현의 적절성과 외적인 문법의 정확성이 따라야만 한다.

중략

시인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잘 용해된 주관적 정서이지만 독자의 것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차옥혜김운식위상진의 시를 들 수가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이사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 집 에 불이 켜졌다/ 어머니의 외로움이 불붙어/ 어머니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 돌아오라 손짓하는/ 어머니의 불붙은 손/ 그 불 꺼드리지 못 하면/ 밤새도록/ 어머니 불덩이일 것 알면서도/ 불켜진 어머니 집 등지 고/ 나는 간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밖엔/ 불켜진 어머니 집 이 천 개 만 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

차옥혜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전문(시문학5)

 

어머니의 외로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이 되고, 어머니의 불붙은 손, 불덩이인 어머니, 그 불을 꺼드리지 못한 채 등지고 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한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켜진 어머니의 집은 천 개 만 개가 되어 앞서게 된다. 차마 어머니를 쓸쓸하게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픔을 천 개 만개의 불로 해석하고 있다는데 이 불의 이미지는 매우 의외적이고 새로운 것이며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 직감은 쉽게 전달되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문학 20025월호 159-16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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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듣기

윤동재(시인, 고려대 강사)

 

    1.

잘 알다시피 헬렌 켈러는 삼중고(三重苦)의 성녀로 불려지고 있다. 헬렌 켈러는 태어난 지 열아홉 달 만에 열병을 앓아, 소경귀머거리벙어리가 되었다. 헬렌 켈러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말할 수도 없는 신체조건에 낙망하지 않고 가정교사였던 설리번 선생의 살뜰한 교육을 받은 끝에, 장애인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1900년 하버드대학교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1904년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 때 마크 트웨인은 삼중고를 안고 마음의 힘, 정신의 힘으로 오늘의 영예를 차지하고도 아직 여유가 있다라고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다.

헬렌 켈러가 장애인이었으면서도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육체의 눈과 귀는 열리지 않았으나 마음의 눈과 귀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곧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면 행복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육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육체의 귀로 세상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까. 육체의 눈과 귀가 열렸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눈과 귀까지 함께 열리지 않으면 참다운 의미로 행복하다고 할 수 없다.

육체의 눈과 귀만 열린 사람은 사물이나 세상살이를 살피면서, 스스로가 살핀 대로 자세히 묘사할 수는 있어도, 사물이나 세상살이에 내재한 그윽한 이치는 밝혀낼 수 없다. 그래서 육체의 눈과 귀가 열린 사람이나 열리지 않은 사람이나 가리지 않고, 바라건대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리기를 꿈꾼다. 특히 시인은 육체의 눈과 귀로만 보고 듣는 데 머무르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은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보려고 하고, 들으려 한다. 이 달에 발표된 시 가운데는 이 점을 확인해 주는 시가 몇 편 있어 눈길을 끈다. 이 달에는 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살펴보는 일은 공연한 헛수고가 아니다.

 

  2.

화개장터에서 쌍계사 입구까지 벚꽃길은 누구나 한 번쯤 걸어 봤으면 하는 길이다. 수십년 벚꽃나무에 벚꽃이 핀 모습은 가히 환상적이다. 이 십리 벚꽃길은 일명 혼례길로 알려져 있다.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잡고 이 길을 걸으면 그해 꼭 결혼하게 된다고 해서 불려진 이름이다. 차옥혜 시인은 쌍계사 입구의 벚꽃길 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서울 시민들에게는 잘 알려진 남산의 벚꽃길을 거닐면서 만난 맹인 부부의 아름다운 모습을 잘 되살려 놓았다.

 

맹인 부부가 남산 중턱 산책길

벚꽃 아치 아래 벚꽃을 밟으며

팔짱을 끼고 소곤거리며 벚꽃 얼굴로 걷는다

 

그들은 마음의 눈으로

벚꽃 나라를 보고 있다.

사랑으로 지핀 마음의 꽃등을 앞세우고

서로서로 부축하며 서로서로 이끌며

캄캄한 세상을 밀쳐내며

벚꽃놀이를 하고 있다

 

엉켜 한 몸이 되어버린

맹인부부가 두 그루 벚나무가

시방

벚꽃을 피우며 벚꽃을 흩뿌리며

벚꽃 눈을 뜨고

벚꽃 사랑을 하고 있다

눈은 떴지만

마음의 눈이 없는

사람들 틈에서

차옥혜, 마음의 눈으로

 

맹인 부부에게 활짝 핀 벚꽃이 보이겠는가 하는 걱정은 육체의 눈으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들의 부질없는 걱정일 뿐이다. 시 속의 맹인 부부는 육체의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제약쯤은 일찌감치 벗어던졌다. 그들은 마음의 눈이 열려 있음으로 해서 누구보다도 세상의 변화를 잘 살필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벚꽃이 핀 사실을 알아차리고서는 벚꽃 구경을 나왔다. 맹인 부부의 얼굴에는 조금의 구김살도 없다. 시인은 그것을 벚꽃 얼굴이라고 했다. 맹인 부부의 얼굴이 벚꽃처럼 더할 나위 없이 화사하다는 뜻이리라. 이는 겉치레로 괜시리 한 번 입에 발린 소리로서의 미화법이 아니다. 안받침이 충분히 되고 있는 미화법이다.

두 번째 연에서 보면 맹인 부부들이 마음의 눈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서로 깊이깊이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맹인부부는 사랑으로 서로를 지피고 있다. , “서로서로 부축하며” “서로서로 이끌며살아가고 있다. 그러다 보니 캄캄한 세상마음의 꽃등을 앞세우고, 밀치며 나아갈 수 있다.

시인은 세 번째 연에서 벚꽃나무만 벚꽃을 피울 수 있는 게 아님을 말해준다. “엉켜 한 몸이 되면”, 누구나 벚꽃나무가 되어 벚꽃을 피울 수 있고, 벚꽃을 흩뿌릴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벚꽃 눈을 뜨고 벚꽃 사랑을 나눌 수 있다고 했다. 육체의 눈은 떴지만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한 사람은 벚꽃을 피울 수도 없고, 벚꽃을 흩뿌릴 수 없고, 벚꽃 사랑을 나눌 수 없는 데 비해서 말이다. 결국 시인은 마음의 눈을 뜬 맹인 부부를 통해서, 육체의 눈만 뜬 사람보다는 육체의 눈은 비록 뜨지 못했지만 마음의 눈을 뜬 사람이 오히려 더 아름답고 행복하다는 아름다운 진실을 말해 주고 있다. 차옥혜 시인은 마음의 눈을 가진 사람은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차옥혜 시인은 자기 자신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삶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시인은 관찰자로서 머물고 있다.

중략

 

  3.

이 달에는 시인들이 마음의 눈과 귀로 보고 들은 것을 시로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육체의 눈과 귀는 사물과 사람살이의 겉모습을 묘사하는 데는 어느 정도 쓰임새가 있을지 몰라도 사물과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드러내는 데는 턱없이 부족하다. 사물과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드러낸다든지, 구체적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된 결과를 다시 시로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는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과 사람살이를 보고 듣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달에 살펴본 세 시인은 이 점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인식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차옥혜 시인의 경우는 단순히 관찰자로서, 육체의 눈과 귀는 열리지 않았지만 마음의 눈과 귀가 열린 맹인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보여줌으로써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읽는 이들이 어렵지 않게 깨칠 수 있게 해 주었다.

신지혜 시인은 육체의 눈으로는 잘 들여다볼 수 없을 것 같은 물방울 하나 속을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방식이 어떤지 깨치고 있다. 신지혜 시인은 물방울 하나라는 매우 구체적인 사물을 마음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스스로의 삶을 성찰하고 그 성찰된 결과를 다시 시로 드러내 보이고 있다. 채호기 시인은 차옥혜, 신지혜 시인이 마음의 눈에 대해 성찰해 본 것과는 달리, 마음의 귀에 대한 성찰을 보여주고 있다.

채호기 시인은 수련의 꽃봉오리가 열리는 것을 눈으로 살피기보다는 귀로 살피고 있다. 이는 육체의 눈, 또는 마음의 눈으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살피려는 태도가 아니라 육체의 귀, 또는 마음의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내재한 이치를 살피려는 태도이다.

세 시인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물이나 사람살이에 대해서 살피고 있지만 결국은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이나 사람살이를 살펴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기 위해 힘썼다는 점은 한결같다. 세 시인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도 마음의 눈과 귀로 사물과 사람살이에 대해 보고 들을 수 있도록 힘썼으면 좋겠다.

 

<문학과 창작 20025월호 194-203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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