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밥 혹은 밥의 시

  조영미

 

우리가 말하는 현대란 거대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마트E-mart와 같다. 이 거대한 시장 속에는 현대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여러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이들 상품은 일련의 과학적인 편리함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완전무장 되어 자본과의 영합을 꿈꾸고 있다.

시장에 나가 보라. 언제부턴가 재래시장을 대신하고 있는 '마트'는 재래시장의 단점을 보완하여 편리하고 깨끗한 서비스로 값싸고 청결하게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감각의 마트는 재래시장의 규모를 축소하고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나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현대적인 마트를 이용하면서도 재래시장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시말해,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도 불편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의 좌판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상반된 현상은 현대인의 삶이 도식화되고 기계화되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삶은 '화폐 가치'로 환산된다. , 화폐의 크고 작음과 정확한 단위 계산에 의해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된다. 그러므로 마트에서는 '한 주먹 더'란 있을 수 없다.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화폐로 환산된 상품이기 때문에 "에이기분이다." 혹은 "밑지는데!." 하는 식의 '얹어주기'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사람을 앞서가고 사람이 물질을 쫓아가는 현 시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재래시장 곧, '정적情的인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사람 사는 냄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한 주먹 더 얹어주는 나물 한 움큼, 사과 한 알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성격을 띤다. 여기서 '그 무엇'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값어치이며 재래시장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중략 )

이러한 재래시장의 상징적인 의미는 {시와산문} 가을호에 실린 김성수의 []과 차옥혜의 [],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에서 물질화 된 자본주의의 암울한 일상으로 그려진다.

(···중략···) 

 

20022340대 여자가

굶어죽었다

쌀 재고량 1200만 섬이 쌓여 있는 나라에서

 

대구 수성동 임대아파트에 두 달 전

열두 살 딸과 함께

2만원을 가지고 이사와

간간이 빵을 사먹다

관리비 6만원을 못 내어

수돗물과 도시가스까지 끊겨

약숫물을 길어 먹다

그 여자가 굶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을 빼려고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땀을 흘리는 도시에서

 

그 여자가 죽어가면서 본

하늘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사람들은 무슨 모습이었을까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

차옥혜의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전문

 

차옥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와 소외를 통해 현대인의 개인주의적인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은 타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생활 침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것 같지만 실상 이러한 배려는 우리의 이웃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어린 딸과 여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김성수는 그의 []에서 "너그런 맘씨"를 떠올리게 되고, 차옥혜는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를 보여주게 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시인이 []을 통해 내보이는 삶의 태도이다. , 밥이라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의 밥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쓰기의 괴로움을 선사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시가 돈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시인의 밥은 시가 된다. 이때 시인에게 밥이 되는 시는 돈이라는 물질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시인은 돈을 쫓기보다는 우리의 각박해진 현실을 들춰내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소설처럼 리얼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참다운 삶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비껴 서 있는 듯한 관조 또한 삶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는 없지만 올바로 가는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의 밥이며 밥의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밥은 잡곡밥일 수도 있고 오곡밥일 수도 있으며 찰밥이나 보리밥일 수도 있다. 밥은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정성에 의해 그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밥인 동시에 시인 것이다.

(···중략···)

[]을 시제로 한 김성수와 차옥혜,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먹힘()"이라는 의미를 통과해 "버려짐()"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의 시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먹히고 버려지지만 결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김성수에게는 '()자본주의'로 그려지고 차옥혜에게는 '(소외)가랑잎'으로 그려지며, 김행숙에게는 '먹다버린 삶'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밥은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켜주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밥의 에너지만으로는 세상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밥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코드를 통해 보다 가까운 삶의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것이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내가 눈물 적실 때마다 그대는 별빛으로 걸어"(이동녘)올 것이며, '시선'(주봉구)을 통해 새로운 통로를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신문 문학평론 2002.12.6.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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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승하

 

 

21세기가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우리 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는 좋은 시가 없다며 문예지와 시집을 외면하고 있다. 간혹 큰 서점에 가보면 시집 코너는 늘 한산하고, 간혹 손님이 계산대에 갖고 가는 시집은 그 이름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베스트셀러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시집이다. 문학평론가에게 부과된 의무가 있다면 매달 매 계절 쏟아져 나오는 문예지에서 '좋은 시'를 찾아내어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인의 등단 지면발표 지면안면학연지연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평가하기란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옛 사람의 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자신을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탁자(琢字)와 연구(鍊句)에 숙달하는 일과 사물을 본뜨고 정서를 묘사하는 미묘한 일들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자연스러움이 첫째의 어려움이요, 깨끗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정약용이 {與猶堂全書}에서 한 말이다. 다산은 시어를 조탁하고 시구를 연마하는 것이나, 사물과 정서를 잘 묘사하는 일이야 웬만큼 수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좋은 시 쓰기가 어려운 것은 지나친 꾸밈새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움에서 자꾸 벗어나기 때문이며, 깨끗한 여운을 남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터인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서거정이 {東人詩話}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시는 마땅히 기절(氣節)을 앞세우고 문조(文藻)는 뒤로 해야 한다." 시인의 기개와 절조, 즉 시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언어 조형력, 즉 기교가 그에 앞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동양의 시학이다.

서구의 상징주의와 주지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후 우리 시는 '정신의 시'를 버리고 '기교의 시'를 열심히 배우고 학습했던 것이 아닐까. 정말 좋은 시는 양자의 선미한 결합, 다시 말해 기법에 있어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요 정신에 있어서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이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보들레르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나 랭보의 견자(見者)의 시학이 오로지 기교에만 국한된 시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는 시인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특히 사물에 대한 감각과 사물과의 교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랭보는 보편적 영혼에 이르기 위한 착종의 감각을 중시한 견자의 시학을 들려주었다. 글쎄, 정신의 깊이가 아니라면 감각의 눈부심, 이미지의 떨림을 전해주는 시가 나와야 될 터인데 그런 시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625전쟁이 터진 가을

12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 더부살이였는데

끼니때마다 큰아버지가 밥 많이 먹는다고 소리쳐

무릎이 곪고 부은 발로

낙엽을 밟으며 사라졌다.

친척들 집에 자식들을 나누어 맡기고

며칠마다 둘러보던 어머니가 오빠를 찾아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가보니

오빠는 호두나무 밑에서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12살 오빠와 호두나무와 쌀 한 가마'란 부제가 붙어 있는 차옥혜의 시 []({시와 생명}, 2001. 겨울)의 전반부이다. 1945년 생 시인의 작품이므로 아마도 시 내용의 거의 전부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싶다. 이 시에서 시적 기교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일을 별다른 감정의 이입이 없이, 즉 담담히 술회하고 있을 뿐이다. 625를 만나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다. 열두 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큰아버지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소리치자 다시금 자기가 살던,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집에는 호두나무가 있었던가 보다 

 

어머니가 다시 큰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오빠는 호두나무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전쟁터 집에 머물렀다.

얼마 후 12살 오빠는

국군들 잔심부름하는 소년병으로 지원하면

가족에게 쌀 한 가마 준다는 말에

어머니가 잠든 사이

얼어터진 발로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눈을 밟으며 집을 떠났다.

 

제목과 부제를 다시 새긴다. , 12살 오빠, 호두나무, 쌀 한 가마. 설움 받고 살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소년, 가족이 얼마 동안 ''을 먹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한 열두 살 소년의 마음이 심금을 울리는 바가 없다면 그 독자는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이 시에서 비유의 참신함이나 시적 형상화의 진경을 찾아볼 수 없다고 누가 수준 미달작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 반대할 것이다. 시적 진정성은 소재의 특이함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이 시처럼 주제의 힘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감동은 흔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두 살 오빠의 착한 마음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누이의 착한 마음이 '깨끗한 여운'을 남긴다.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 시의 마지막 6행은 문장이 다소 길어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문학나무 20027월호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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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인적 정서의 객관화

전원범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볼 때, 보는 방법은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것을 이해타산으로 보는 것이며, 마지막 하나는 느낌으로 보는 것이다. 사물을 대할 때나 사람을 대할 때 대부분 무심히 보아 넘기는 경우가 가장 많고, 유심히 보더라도 나와의 이해상관 속에서 득실을 따져 보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보는 경우가 일상적인 보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인이나 예술가들은 느낌으로 대하기 때문에 그 대상을 새롭게 볼 수 있고 자신의 감정을 이입시켜 주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시는 대상을 일상적 인식으로부터 새로운 인식 영역으로 이동시키는 일이 중심이 된다. 습관적이거나 의례적인 인식을 벗어나 새로운 그리고 돌발적인 견지에서 인식하여 이를 엉뚱한 문맥 속에 넣음으로써 그 것을 낯설게 만든다. 대상을 낯설게 인식한다는 것은 그 대상이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지녀온 상투적 의미를 벗어나 아주 새로운 의미로 바꿔지는 것을 뜻한다. 이는 한 대상에 대한 습관적일상적기계적 반응을 와해시키고 참신한 개성의 아름다움을 얻는 일이 된다. 그래서 시작 행위는 대상을 낯선 문맥에서 보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시의 유형을 흔히 네 가지로 나눠 객관화와 주관화, 주관 대상의 객과화와 주관화로 말하기도 한다. 이는 객관대상이나 주관 대상을 수용인식하는 태도에 의해서 나눈 것이다. 주체인 시인이 객관대상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나 심정등 주관을 표출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제시하는냐 아니면 주관으로 변형시켜 의미의 변용을 가하느냐에 따라 객관대상의 객관화, 객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된다. 또 주체인 시인이 자신의 내부에서 표출되는 영상이나 개인적 상념인 주관대상을 현상 그대로 제시하고 마는가 아니면 주관적인 재구성을 하느냐에 따라 주관대상의 객관화, 주관대상의 주관화로 구분하고 있다.

어떤 유형의 시가 됐든 시는 주체적인 시인의 주관적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요, 그 표현되는 정서가 독자에게 전달되어 감동을 주어야 한다. 주체의 정서는 어떤 오브제를 통해서 어떤 방법으로 표출되든 전달 기능에 문제가 있다면 그 것은 시로서의 의미가 없다. 말하자면 공감될 수 없는 시는 시라 할 수가 없다. 객관대상을 객관화하여 독자에게 맡기든지, 주관화하여 새롭게 의미화하든지 거기에는 독특한 시적 구조가 갖춰져야 미감을 획득하여 전달될 수가 있다. 또한 주관대상을 그대로 피력하거나 아니면 다시 해석구조로 변용시키든 그것도 독자에게 공감될 수 있는 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야 시로서의 구실을 가게 된다.

시가 아무리 주관적인 예술이지만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모두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시로 표현되었을 때 최소한의 전달 기능을 갖추지 않으면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곧 주관적 정서가 감동이라는 객관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다. 좋은 시란 개인의 정서가 잘 담긴 정서적 반응이면서 독자에게 공유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이 공유가 곧 객관성을 가졌을 때만 가능하다. 이 정서의 객관화를 위해서는 내적인 표현의 적절성과 외적인 문법의 정확성이 따라야만 한다.

중략

시인 개인의 감정과 사상이 잘 용해된 주관적 정서이지만 독자의 것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으로 차옥혜김운식위상진의 시를 들 수가 있었다. 

 

늙은 어머니의 이사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 집 에 불이 켜졌다/ 어머니의 외로움이 불붙어/ 어머니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 돌아오라 손짓하는/ 어머니의 불붙은 손/ 그 불 꺼드리지 못 하면/ 밤새도록/ 어머니 불덩이일 것 알면서도/ 불켜진 어머니 집 등지 고/ 나는 간다//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밖엔/ 불켜진 어머니 집 이 천 개 만 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가고 있다.

차옥혜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전문(시문학5)

 

어머니의 외로움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외로움이나 쓸쓸함이 불붙어 불켜진 집이 되고, 어머니의 불붙은 손, 불덩이인 어머니, 그 불을 꺼드리지 못한 채 등지고 가야 하는 안타까움이 한이 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불켜진 어머니의 집은 천 개 만 개가 되어 앞서게 된다. 차마 어머니를 쓸쓸하게 두고 떠나야 하는 아픔을 천 개 만개의 불로 해석하고 있다는데 이 불의 이미지는 매우 의외적이고 새로운 것이며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그 직감은 쉽게 전달되는 객관성을 확보하고 있다.

 

<시문학 20025월호 159-163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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