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언어, 민족어 완성의 길

김재홍(경희대교수, 평론가)

 

차옥혜도 이 시대를 힘들고 아프게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등대지기의 외로움을 통해 시인의 마음, 시의 길이 어떠한가를 말해주어 관심을 환기한다. 등대지기.(시와사람, 가을호)가 그 한 예이다.

 

칠흑의 바다에 불덩어리 등대 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배들이 항구들이

등대지기의 쓸쓸함과 고통과 사랑에

심지를 대고 타는

등대 불로 어둠을 이겼을까

등대 불로 여기까지 온 사람들

등대 불로 여기까지 온 세계

 

등대지기의 아픔이 내 아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슬픔이 내 슬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눈물이 내 눈물을 사르고

 

등대 불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어두운 등대지기여

내 밤바다 등대 불을 끄십시오

나도 어두워져

당신의 어둠과 하나 되어

당신의 밤바다 등대지기가 되겠습니다

당신의 밤바다에 내가 등대 불을 지피고

내 밤바다에 당신이 등대 불을 지피면

당신과 나에게 밤은 없으리

세상에 어둠은 없으리

-<등대지기>

 

산다는 일은 무엇인가?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온갖 고통과 고난을 이기는 일이며, 동시에 외로움과 허무감을 극복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해볼 수는 없겠는가. 바로 여기에서 이 시의 의미가 드러난다. 그것은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에서 등불 하나 켜들고 항해하는 배들을, 사람들을 희망의 나라로 이끌어주고 힘과 용기를 불러일으켜 주는 등대지기의 외로움을 이해하고 함께 하려는 마음가짐이라고 하겠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과 고단함을 속 깊이 이해하고 함께 공감하면서 격려하는 생명사랑, 인간사랑의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이자, 시정신이라는 뜻이다. “등대지기의 아픔이 내 아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외로움이 내 외로움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슬픔이 내 슬픔을 사르고/ 등대지기의 눈물이 내 눈물을 사르고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특히 당신의 밤바다에 내가 등대 불을 지피고/ 내 밤바다에 당신이 등대 불을 지피면/ 당신과 나에게 밤은 없으리/ 세상에 어둠은 없으리라는 결구 속에는 이러한 상처받고 외로운 사람들의 아픔과 슬픔, 외로움을 함께하고자 하는 인간애의 정신 또는 연대의식이 담겨 있는 것으로 보여 은은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문학사상 200112월호 297-299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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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가 운다 시인이 운다

박찬일(시인/평론가)

 

매미가 운다

 

 

우렁우렁 산을 무너뜨리고 있는

굴삭기와 싸우며

매미가 운다

 

매미가 울어

곤두박질치는 나무에게

겁에 질린 풀잎에게

무너지는 흙더미에게

다가간다 함께 한다

 

매미가 운다

뙤약볕을 흔들며

굴삭기 소리를 깨뜨리며

굴삭기 소리에 혼절한 새들을 깨우며

매미가 운다

 

우는 매미여 시인이여

차옥혜(1945- ) [매미가 운다]

 

매미가 운다. 시인이 운다. 산을 무너뜨리고 있는 굴삭기 소리에 맞서서 매미가 운다. 시인이 운다. 매미가 운다. 시인이 운다. 곤두박질치는 나무를 위해, 겁에 질린 풀잎을 위해, 무너지는 흙더미를 위해, 혼절한 새들을 위해 매미가 운다. 시인이 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운다.

두 개의 알레고리.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도구적 인간 homo faber 에 대한, 혹은 도구적 인간이 만든 현대문명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굴삭기, 굴삭기 소리. 둘째, 이러한 굴삭기, 굴삭기 소리에 맞서 싸우는 시인, 혹은 시인의 사명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매미, 매미의 울음소리. 언제 궁핍한 시대가 아닌 때가 있었던가. 언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울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중심과 함께 하는 자는 시인이 아니다. ‘과 함께 하는 자는 시인이 아니다. 변방에 있는 자가 시인이다. 반대하는 숙명을 갖고 태어난 자가 시인이다. 나무, 풀잎, 흙더미, 새 등 연약한 것들과 함께 하는 자가 시인이다. 굴삭기 소리와 매미 울음소리를 대비시켜 시인의 사명을 새삼스럽게 환기해낸 매우 탁월한 시!

 

<군포시민신문 2001.6.5., 16쪽 수록>

 

 

  

    생태주의 문학 시론試論

박찬일(시인)

 

 

댐 건설 및 도로 건설 등은 자연에 대한 인간 우위를, 혹은 다른 생명에 대한 인간 우위를, 다른 말로 하면 인간중심주의의 폐해를, 가장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예. 댐과 도로 건설로 얼마나 많은 자연이 훼손되었는가. 식물들이 멸종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동물들이 죽거나 자신들의 터전에서 쫒겨났는가. 다음은 차옥혜 시인의 매미가 운다라는 시.

 

우렁우렁 산을 무너뜨리고 있는

굴삭기와 싸우며

매미가 운다

매미가 울어

곤두박질치는 나무에게

겁에 질린 풀잎에게

무너지는 흙더미에게

다가간다 함께 한다

 

매미는 울어

굴삭기에 맞서

굴삭기 소리에 떠서

굴삭기 소리를 치받는다

 

매미가 운다

뙤약볕을 흔들며

굴삭기 소리를 깨뜨리며

굴삭기 소리에 혼절한 새들을 깨우며

매미가 운다

우는 매미여 시인이여

 

노만 커슨즈는 인간들이 국가에 귀속되고 국가 구성원들인간들의 생존을 염려하는 일을 떠맡게 된 후, 인간들은 스스로를 보존본능Erhaltungsinstinkt을 상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의 인간들은 인류의 일에 직접 마음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국가는 아스팔트, 댐을 만드는 국가이고, 핵폭탄을 만드는 국가이나, 개개인은 그것이 인류의 환경 및 생존에 끼치는 영향을 의식하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커슨즈는 개인이 생존본능을 다시 되찾아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국가보다 인류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알레고리. 첫째,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이용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는 도구적 인간homo faber에 대한, 혹은 도구적 인간이 만든 현대문명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굴삭기, 굴삭기 소리. 둘째, 이러한 굴삭기, 굴삭기 소리에 맞서 싸우는 시인, 혹은 시인의 사명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매미, 매미의 울음소리. 언제 궁핍한 시대가 아닌 때가 있었는가. 언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아닌 때가 있었던가. 언제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울지 않은 때가 있었던가.

 

<시민문학(군포문인협회) 2002년 여름호 25-26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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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만 아니라 절망도 감사할 줄 아는 마음

김준태(시인)

     기도 2

                          차옥혜

 

기쁨만 아니라

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

희망만 아니라

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

가진 것만 아니라

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

승리만 아니라

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

건강만 아니라

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

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

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

 

  도대체 차옥혜는 누구인가? 나는 그녀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그녀의 시가 무서운 감동으로 가득 차 있음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우선 그녀의 시 <기도 2>를 읽어보자. “기쁨만 아니라/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로 시작해서 희망만 아니라/절망도 감사하겠습니다.” “가진 것만 아니라/없는 것도 감사하겠습니다.”까지 읽어 내려가다가, 그만 나는 내 온몸과 정신이 찌르르 아찔해짐을 어찌하지 못한다. 그 어떤 고압선에 달라붙어 스파이크가 돼버린 것처럼. 내가 차옥혜의 시구에서 헤어나오지 못함을 뒤늦게 야 알게 된다. “승리만 아니라/패배도 감사하겠습니다”, “건강만 아니라/아픔도 감사하겠습니다노래하다가, 이윽고 당차게 불붙고 맞아서 제구실하는 대장간 쇠붙이를 저는 압니다라는 결구는 이 시를 한껏 절창으로 만들고 있다.
  그럼 <기도 2>를 쓴 차옥혜는 누구인가. 그녀의 첫시집 깊고 먼 그 이름뒷켠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1945년 전주 출생으로 전주여고와 경희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유학길에 오른 남편을 따라 오랫동안 독일에서 생활을 한다. 그런데 그곳에서 아주 힘든 병을 얻고 만다. 낯선 이국의 병동에서 투병을 계속해야만 하는 코리아의 가냘픈 여인. 유난히 밤이 빨리 찾아오고 구죽죽한 비마저 자주 내리는 독일의 겨울. 그 낯선 어둠의 한 복판에 누어 병과 싸우면서 그러나 그녀는 시를 만난다. 그 결과 <기도 2>와 같은 시가 탄생한 것이다.
  “기쁨만 아니라/슬픔도 감사하겠습니다따위는 누구한테나 함부로 찾아오는 그런 시구이며 깨달음이 아니다. 수많은 밤을 앓아 본 사람한테나 찾아오는 그런 시구이며 깨달음이자 사랑이다. 아니 그 아픔과 사랑함의 승리가 아니랴. 지금은 한국에 돌아와 살고 있는 차옥혜 시인의 건투를 빌고 싶다.

                                         <사랑의 변주199922-2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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