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옥혜의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인 나라

  박이도 장로(시인, 전 경희대 교수)

 

 

연륜이 더해갈 수록 시심도 더욱 무르익어 가는 다산성의 시인이다. 필자는 차옥혜 시인의 시집 흙바람 속으로’(96)에서 보여 준 흙, 고향으로의 귀향의식이 특유의 모성애로 변주된 흙의 담론으로 진한 인상을 받은바 있다. 최근작 시집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에서 믿음의 바탕에서 쓴 작품 한 편을 감상하자.

 

하루가 천년이고 천년이 하루인 나라

 

 

그 나라엔 시간이 없다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없다네.

순간이 영원이고 영원이 순간인

그 나라엔 죽음도 없다네.

어린이도 젊은이도 노인도 없는

나이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네.

사람들은 별처럼 빛나

서로서로 길을 밝혀준다네.

식물들은 나이테를 만들지 않고

동물들도 늙지 않고 싸우지 않는다네.

모두 공기만 먹고 살아도 건강하다네.

바위와 냇물과 식물과 동물이 사람과 말을 하고

사람과 함께 시를 읊고 노래를 한다네.

그 나라엔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가 살고 계시고

이 세상에서 아직 못 본 내 손자들도 있다네.

평화와 사랑만 있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그 나라엔 시간이 없다네.

 

시인은 에덴동산 같은 천국을 꿈꾸고 있다. 시인은 천국의 영원한 삶을 노래한다. 이사야 선지자가 땅이나 나무나 혹은 해와 달을 의인화해서 천국의 삶을 비유한 문학적 표현이 연상된다.

시간 개념은 베드로가 예수님의 재림의 시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의 제목은 베드로 후서 38절의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에서 따왔다. ‘시간이 없고’ ‘죽음도 없는 나라는 곧 영원한 나라요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시편 902절에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노래한 것처럼 차옥혜 시인도 영생의 날에 이르게 될 영원한 천국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한국문학’(84)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깊고 먼 그 이름’ ‘흙바람 속으로6권의 시집과 서사시집 바람 바람꽃’(87)이 있다.

 

<한국장로신문 2007.4.21.12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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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보석함

  조병옥(작곡가, 수필가)

 

 

노래가 끝날 때 나는 어제 우편으로 받은 차옥혜 씨의 시 한 수를 낭송했다.

(중략 )

시 속에 녹아 나오는 남다른 사회의식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였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부러워했던 것은 그녀만이 가진 색조 높은 언어의 보석함,(독일어로 wortschatz)이다.

 

누가 우리를 미치게 했는가

 

 

미치지 않고서야

어머니 가슴팍에 불비 쏟았으리

미치지 안고서야

형제끼리 죽창 휘둘렀으리

 

풀도 하늘도 붉던 그날

우리들 혼은 재로 흩날리고

여름은 갔지

 

반신불수 어머니

타버린 꿈 못 잊어

남은 목숨에 불을 질러도

눈밭의 보리는 오월을 기다리다 지쳤다네

(중략)

백두에서 한라까지 오가며

산비탈에 벌판에

꽃씨 뿌리고 싶은

우리는 바람이네

 

물이 가른다고 갈라지던가

바람이 자른다고 잘라지던가

 

누가 우리를 미치게 하는가

 

외지에서의 오랜 삶을 접고 제나라의 자연, 역사적인 여건과 상황 속에서 새로 태어나 제 나라 흙냄새 맡으며 글 쓰고 있는 차옥혜 씨가 나는 부러웠다.

고향을 떠나던 날부터 가슴에 방황의 씨앗을 심은 여기 이 망명자들, 그들의 노래 속엔 아직 고향의 삶이 살아 있고, 무릎 치는 손바닥 바람결에 그들의 춤사위가 튕겨지고, 곡성 같은 창() 속에 아쟁이 애끓게 울고 있건만, 여기는 아직도 시베리아, 바위처럼 두터운 얼음장 밑에서 봄은 아직 기척도 없었다.

 

<라인강변에 꽃상여 가네2006163-165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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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적 통찰과 상상력

정순진

 

시와 다른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보다 매재가 다르다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언어의 핵심기능을 시의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에서 아무리 운율이 중요해도, 아무리 이미지가 중요해도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고 혹은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예술에서보다 시에서 높은 정신세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명명한 철학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삼라만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더라도 그 통찰을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좋은 시란 시인의 통찰력이 결합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중략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시인인 것을 알았네.

문자로 남긴 시는 한 줄도 없지만

벌판에 산에 강에 바다에

길에 집에 마을에 도시에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네.

나만 볼 수 있는 시

내가 번역해야만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의 시를 읽네.

-차옥혜의 우리 어머니는 시인에서

 

이 시는 내가 시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시인이었다는 깨달음이 시의 핵심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글 다루는 사람을 존중해 글 쓰는 사람은 우대하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 하거나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일거에 깨고 시 한 줄 쓰지 않은 어머니를 시인으로 명명하는 것은 감동적이다.

어머니의 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읽을 수 있다. 몸이 곧 텍스트인 경우 그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다는 표현은 염념처처念念處處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며 절실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다. 또한 3연은 글로 쓰는 시와 몸으로 쓰는 시를 대비시키면서 구두선에 그치기 쉬운 글쟁이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의 시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시를 읊는 글로 된 이 시는 다소 수다수러워 감정이 떠버렸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웃어버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웃기 어렵다. 텍스트를 읽을거리는 확보했지만 어머니의 몸이 곧 택스트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해 차분하게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확보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문학 20067월호 142-145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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