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채우는 초록의 속삭임

연지민(문학 담당 기자)

 

  불길 내어 당신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움 길 내어 당신을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름 건너 가을 건너 겨울도 건너

타는 그리움 길로 고이 돌아오소서

햇빛보다 더 눈부신 순백의 아름다움 그대로

당신은 당신의 집에 다시 돌아와

끝내 못 볼지라도

초록빛 세상을 또다시 예비하리니

-‘떨어진 목련꽃잎을 태우며중에서

 

자연을 노래한 차옥혜 시인의 9번째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가 시문학사에서 출간됐다.

4부로 구성된 시집은 자연이 배경이다. 

꽃이 피고 지고, 푸른 잎들을 거느리던 나무가 가을이면 열매를 맺는 자연의 법칙은 시인에게 경이로움을 선물하는 기쁨의 근원지가 되었다. 

도심 한가운데 살면서 고향이 그리워 자연에 눈을 돌리게 됐다는 시인은 농촌 마을에 자리를 잡고 서툰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도망치고도 싶었지만 식물들에서 푸릇푸릇 새싹이 솟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 것을 보고 자연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황토밭에서 20년 넘게 식물 글자로 시를 써온 일은 고달프기도 하지만 내 삶에 참으로 유익하고 소중하고 귀한 체험이라고 회고한다. 

오랜 자연과의 교감은 시인에게 평화롭고 자유로운 자연 풍경과 우주를 이루고 있는 생명들을 초록의 언어로 거듭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응교 문학평론가는 시인은 식물을 단순한 대상으로 관조하지 않고 스스로 황토밭을 원고지에 옮겨놓았다면서 자연과 생산물과 작가는 완전히 하나로 연대하는 유기적 관계로 엮인다며 시인의 삶터로 자연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충청타임즈 2010.3.25.자 수록>

 

 

차옥혜 시집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문덕수(시인예술원 회원)

 

차옥혜(車玉惠,1984한국문학시인상 당선)의 제 9시집.

새와 유리창등 모두 72편을 수록.

생태주의를 선명하게 내세운 점에서, 이 시집은 특히 주목된다. 생명체의 공생(共生)’은 생태학의 중심개념인데, 사람도 공생 시스템 속의 존재다. 생태시의 가장 큰 문제는 많은 생명체 속에서 인간존재를 어떻게 정착시키느냐에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중심사상, 자연지배욕 등의 포기. 이를테면 인간의 우월주의를 완전히 버리고, 존재자 전체(existentia)의 연관 속에서도 가장 낮은 한 존재자로 편입되어야 한다. 인간도 존재자 전체 속의 한 구성체라는 입장을 확립하고 이 입장에서 반공생(反共生), 혹은 환경파괴 현실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감행되어야 한다.

차옥혜의 이 시집이 보여준 생태주의는 인간존재를 존재자의 전체 연관 속에 정착시키는 문제를 체험적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 환경이나 생태문제를 신체적 레벨의 자각을 토대로 한 점이 높이 평가된다. 생태시의 풍요한 수확이다.

 

<시문학 20104월호 194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

     우주가족의 초록시

  김응교(시인, 문학평론가)

 

시 한편을 꽃송이라 한다면, 시집 한권은 꽃밭이라 할 수 있겠다. 한권의 시집이 꽃밭을 넘어, 꽃산인 경우도 있다. 시집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는 단순히 꽃밭이니 정원으로 한정지을 수 없다. 한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이것은 시인이 지금까지 경작해온 열매다. 한편 한편이 제각기 다른 얘기를 하고 있는 시집. 어떤 시는 침묵하고, 어떤 시는 독창하고, 어떤 시는 합창하고, 어떤 시는 울고 있고, 어떤 시는 싸우고 있는 이 시집을 간단히 평하기는 쉽지 않다. 차옥혜 시인의 시에 대해 살아온 것 혹은 살아가는 것들을 그냥 허비하지 않고 그 자국들 하나하나에 애틋애틋 의미 짓는 일이 여기에 있다고 고은 시인이 기록했듯이, 그야말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시를 간단히 평할 능력이 나에겐 없다. 이번 시집은 물리적으로 한권의 책이지만, 영적으로는 만권의 생태계(Ecosystem) 도서관이다.

   초록시의 탄생

예술가는 사물에서 도구를 얻고, 그 도구를 소재로 숨겨진 의미를 밝혀내어 불멸의 진의(眞意)을 드러낸다(하이데거예술작품의 근원). 시골 아낙네나 광부들이 신고 다니던 낡은 구두[=도구]를 빈센트 반 고흐는 여러 번 그렸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도구는 시간이 지나면 신뢰성이 사라져 간다. 고흐가 그렸던 신발들도 닳고 낡아 버려졌을 것이다. 고흐가 담고자 했던 것은 사라져가는 구두라는 사물이 아니라, 구두가 숨기고 있던 이었다. 시골 아낙과 광부들의 고단한 을 낡아버린 구두를 통해 암시하려 했던 것이다. 참예술은 이렇게 사물에 숨겨진 삶의 진리를 드러낸다. 고흐가 낡은 신발을 통해 숨겨진 촌부와 광부의 고단한 삶을 살려내 명작을 남겼듯이, 차옥혜 시인은 모든 식물에 숨어있는 진실을 드러내는 시로 빚어낸다. 이 시집을 총체적으로 아우르고 있는 첫시를 보자 

 

황토밭 원고지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야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후에도 보살피지 않으면

제멋대로거나 사라지지만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이다.

언제나 설레고 아름답고 편안한

숨 쉬는 생명시이다.

옷은 황톳물과 풀물로 얼룩지고

호미 들고 동동거려 팔다리가 쑤셔

볼 품 없이 늙고 여위어도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것이 즐겁다.

 

어느 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 지 어언 20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지금 내 몸과 영혼의 집이 어여쁘다.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전문

 

시인은 식물을 단순한 대상으로 관조하지 않고, 스스로 황토밭 원고지에……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쓴다. 쓰고 난 뒤에도 보살피지 않으면고흐의 신발처럼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시인은 참뜻을 담으려고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를 쓴다. 차 시인이 드러내고 싶은 진의는, “파노라마 초록시. 여기서 자연과 생산물과 작가는 완전히 하나로 연대하는 유기적 관계로 엮인다. 유기적 연대는 단순히 자연을 대상으로 바라보는 관조적 관계가 아니다.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차 시인은 이렇게 식물과 일체가 되어 시를 써왔다. “어느 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지 어언 20이란 구절은 그녀의 오랜 시력(詩歷)을 표기하고 있다. 1986년 민음사에서 출간된 깊고 먼 그 이름이후 20여 년간 꾸준히, 자연과 인간에 대한 길디긴 탐구를 이어 왔다. 관념이 아니라, 실제로 농토에서 한여름 뙤약볕에서 김을 맨다/ 몸은 햇볕과 전쟁”(물이 햇볕을 이기다)을 벌였던 세월이었다. 이후 발 아래 있는 하늘(1993),흙바람 속으로(1996),아름다운 독(2000),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2006),허공에서 싹트다(2008)로 이어지는 시집의 일관성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이후, 인용되는 시는 시 제목 뒤에 연도를 적어 시집 출전을 표기한다. 가령, ‘(허공에서 싹트다,2008)’(2008)’으로 표기한다] 차 시인의 시세계에 은둔된 일관성은 모성적 시상, 반복법의 변주, 종교적 심상 등을 말할 수 있겠으나, 윗구절로 볼 때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식물에 관해 쓴 초록시정신이다. 흔히 이러한 시정신을 생태적 상상력이라고 한다. 

생태학(生態學, ecology)이라는 용어는 독일 예나 대학에서 동물학을 강의한 에른스트 헤켈(Ernst Haeckel)1869년에 처음 사용했다. 그는 자연의 경제에 관한 지식의 총체를 생태학이라고 불렀다. ‘생태학 곧 오이콜로지(Oekologia)라는 그리스어는 가정 또는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οiκος)“‘와 연구를 뜻하는 로지아(logia)의 합성어다. 여기서 집은 개체가 사는 생물권, 넓게는 우주 전체를 가리킨다. 따라서 생태학이란, 지구의 생물이 생물과 비생물이 항상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 생명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그러나 1950년대 생태학은 인류를 단순한 환경 속의 인간(Man-in-Environment)'으로 보고, 경제성에 치우친 경제적 생태학이 되어 자연 과학의 아류가 되는 한계를 보여 주기도 했다. 문학은 생명 활동의 아우라(aura)인 녹색생명을 외면할 수 없었다. 미커(Joseph W. Meeker)The Comedy of Survival(1974)에 처음 문학 생태학(literary ecology)’ ‘생태학적 문학’(ecological literature)이라는 용어가 등장한 이후, 우리는 생태학적 상상력 혹은 녹색 상상력, 그리고 패미니즘(feminism)과 관련해서는 생태 패미니즘 혹은 에코 패미니즘 등으로 부르고 있다. 그리고 생태적 상상력을 지닌 시를 생태시생명시녹색시자연시생태 환경시 등으로 부르고, 아래 분류로 전통적 생태시, 민중적 생태시, 모더니즘적 생태시로 나누기도 한다.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곧 영혼의 집은, 자연을 인간이 점령해서 개발해야 하며, 인간이 관조하는 대상으로 전락시켰던 진화론적 세계관에 반대하고, 자연 자체를 하나의 생명으로 파악한다. 대상화된 자연이 아니라, ‘자율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이번에 읽게 되는 차옥혜 시인의 시집은 바로 자율적으로 살아있는 자연에 관한 기록이다.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써온 차옥혜 시인의 시는 기존의 그러한 표현과 달리 초록시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초록시의 말법

백석의 시에는 음식 이름이 많이 나오는데, 연작시흙을 향한 노래(1993) 이후, 차옥혜 시인의 시에는 나무, 나물, , 꽃 이름이 많이 등장한다. 19985월 산림청에서 주관한 <생명의 숲과 문학의 만남>이란 행사에서 한 시집에 나무 이름이 많이 나온 시인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위 윤석산 80, 2위 신석정 41, 3위 김관식 36, 4위 차옥혜 36종으로 조사되고 있다. 탁월한 시인은 단어 하나라도 아무 계산 없이 시에 마구 던져놓지 않는다. 시인은 쓰잘 데 없는 단어 하나라도, 바둑알 한수 놓듯, 꼭 있어야 할 자리에 모신다. 철저하게 계산된 시를 써넣고도 고수(高手)는 독자가 전혀 눈치 못챌 정도로 자연스러운 시를 써놓고, 시치미를 뗀다. (인용된 시 앞의 알파벳은 설명을 위해 필자가 붙였다) 

 

A1 달구지풀, 작두콩, 병풍나물, 삿갓나물

      요강나물, 족두리풀, 비녀골풀, 투구꽃, 갈퀴나물

      이런 이름들 가만히 불러보면

B1  가난해도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시골 할머니네 마을 사람들이 보이네.

A2  갯패랭이꽃, 구름패랭이꽃, 난장이패랭이꽃

      섬패랭이꽃, 각시패랭이꽃, 술패랭이꽃, 수염패랭이꽃

      패랭이꽃들 이름을 불러보면

B2  장대비 쏟아져, 폭풍 휘몰아쳐, 천둥 번개 쳐, 폭설 내려

      삼천리 방방곡곡 억울하게 죽은 목숨들 떠오르네.

A3  , 씀바귀, 냉이, 달래, 두릅, 원추리 불러보면

B3  몸에 생기가 돌고

A4  산수유, 매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불러보면

B4  겨울 창도 환하고 따뜻해지네.

A5  어쩌다 묵은 책갈피 속에서 떨어진

      첫 사랑 편지를 읽으면

B5  아득한 옛날이 지금인 듯 늙은 가슴도 설레고

      돋보기안경 낀 얼굴도 화끈거리며 웃음꽃 피네.

-말의 마법(밑줄은 인용자

 

“~()으로 맺는 A구문과 “~()로 끝나는 B구문이 반복되고 있다. 이름을 부를 대상과의 관계는, “저만치 홀로 피어 있네”(김소월산유화)처럼 거리를 두고 있는 뜸한 관계가 아니다. 또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처럼 대상인 자연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관계도 아니다. 여기서 식물의 모든 이름은 인간과 동격을 이루고 있다. A1-B1에서 시작하여, A5-B5에 이르기까지, 노래로 치면 5절의 형식이다. 그런데 낭송해보면 단순한 흐름이 아니다. A1에서 A2까지를 느리게(largo) 낭송한다면, A3에서 A4는 갑자기 빠르고 상쾌하게(allegro) 읽힌다. 그리고 A5는 보통 빠르기(moderato)로 읽을 수 있겠다. A1의 나물과 풀이름들은 마을 사람들의 다른 이름들이다. A2의 꽃이름들은 억울하게 죽은 목숨들의 이름모를 이름들이다. 그래서 어려운 꽃이름이 나열되었을 것이다. A3의 나물들은 우리 몸에 좋은 먹거리들이기에 몸에 생기가 돌것이고, A4의 나무이름들은 인간들에게 가장 가까운 벗들이다. 그래서 겨울창도 환하고 따뜻할 것이다. 이렇게 의미 깊은 나무 이름 하나 하나의 이미지와 의미가 점점 크게 크레센도(crescendo)되어 A5에 이르러 첫사랑의 이미지와 만난다. 묵은 사랑이 모두 저 헤아릴 수 없는 꽃의 생명만치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수많은 꽃과 나물과 나무들은 웃음꽃과 이어져, 진정한 예술로서 도구성이 사라진 삶의 궁극적인 진리를 드러낸다. 차 시인이 수많은 꽃과 나물과 나무를 통해 겨냥하는 바는 숨겨진 삶과 예술의 궁극적 진리(ultimate truth)를 드러내는 진경(珍景)이다. 

    죽음을 직시하는 존재들

시집 곳곳에서 시인의 시적 고백도 드러난다. 이 시집에서 말하는 식물 글자의 주체는 지구에 살아 있는 모든 존재들이다. 거실 큰 유리창에 부딪쳐 땅에 떨어져 죽은 새 한 마리도 식물 글자의 주체다 

 

오라, 오라! 손짓한

하늘과 구름과 나무와 풀과 꽃을 향해

기쁨으로 전 속력을 다해 질주했는데

느닷없이 앞을 가로막고 선

보이지 않는 유리창

유리창에 반사 된 허상의 유혹에

목숨을 잃어버린 새

 

죽은 새 위로

유리창을 아슬아슬하게 비껴 날아가는

또 한 마리의 새

저 새가 날아가는 곳은 어디일까?

 

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

갑자기 나는 더듬대고 머뭇거린다.

-새와 유리창에서 

 

유리창에 반사 된 허상의 유혹을 사실로 알고 부딪쳐 목숨을 잃어버린 새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새를 보며 달리던 환한 길 앞에서시인은 더듬대고 머뭇거린다.

인간이란 자기가 선택하지도 만들지도 않은 세계에 자의(自意)와 상관없이 던져진 존재라고, 하이데거는 지적했다.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이런 상태를 그는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이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피투성은 불안(Sorge)을 통해 자각된다. 예를 들면, 어느 순간 왜 나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까같은 불안처럼, 차 시인은 우리의 삶이 유리창에 반사 된 허상의 유혹이 아닌지 더듬대고 머묻거리며 묻는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살아가는 환한 길 앞이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가상의 세계 곧 시뮬라크르(Simulacre)일 수도 있다.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 나타나듯,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것처럼, 때로는 존재하는 것보다 더 생생하게 인식되는 거짓 세계일 수도 있다. “허상의 유혹을 정면으로 묵상하는 순간, 인간은 불안하다. 자신도 모르게 이 세계에 던져졌다는 피투성을 불안하게지각할 때, “목숨을 잃어버린 새처럼 언젠가 자신도 죽게 될 것이며 이 세계를 강제로 떠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죽음[]을 지각하며 살아갈 때, 우리의 삶은 역설적으로 역동성(逆動性)을 얻게 된다. 마치 마늘 싹이/ 허공을”(허공에서 싹트다2008) 깨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쩔 수 없는 세계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자각하며, 인간은 역설적으로 자신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던져 넣는 것이다. 그 불안과 죽음에서 시인은 존재의 의미를 찾아낸다 

 

딱따구리가 날아와

딱딱딱 나를 쪼며 노래할 때

아프기도 정신이 없기도 했지만

내 이파리들 기뻐 우우 노래로 화답했네.

 

딱딱딱 딱따구리가

내 마음에 둥지를 틀 때

부드럽고 따뜻하여

내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노래로 흔들렸네.

 

딱따구리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세계가 실려 오고

나도 딱딱딱 세계를 쪼아 집을 짓는

딱따구리가 되었네.

 

딱딱딱 딱따구리는 나

딱딱딱 나는 딱따구리

우주는 나

나는 우주

-딱따구리가 날아왔다전문 

 

불안에 직면해 있는 에게 딱따구리가 찾아온다. 딱따구리가 날아와 쪼아대는 는 뿌리에서 우듬지까지 흔들리며 노래하는 식물이다. 딱따구리가 뚫어놓은 구멍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바람에 세계가 실려 들어오고 는 딱따구리가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을 보면 딱따구리=(식물)=우주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여기서 ’[작은 누리], 시인은 우주[온누리]의 대필자(代筆者)가 되어 역설적으로 건너편의 자유를 획득하게 된다. 이러한 태도를 하이데거는 기투(企投, Entwurf)’라고 호명했고, 죽음을 예리하게 의식하는 다짐을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覺悟性)’이라 불렀다. 나는 위 시를 읽으면서 시인의 불안에서 선구적 각오성을 읽는다. 딱따구리와의 일치를 깨닫는 눈뜸은 새의 죽음을 보며 삶의 의미를 포착해서 재구성하는 기투의 다짐과 동일하다. 그래서 바다와 하늘이 내 몸에서 움직인다. / 바다와 하늘과 내가 순환한다. / 오래 전부터 바다와 하늘과 나는 / 하나.”(바다와 하늘과 나)이고, 내 몸과 나무의 나이테가 일치가 되는(나이테) 것이다. 이쯤되면 불안의 어둠은 사라지고, 독자의 그늘에 또아리틀고 있던 패배적 상상력은 햇살을 향한 식물적 향일성(向日性)으로 서서히 융기(隆起)한다. 

    마른 껍질들, 호모 사케르의 합창

이미 껍질들처럼 버려진 존재에 대해, 15편의 연작시(2008)에서 시인은 자신의 어린시절로, 아프리카로, 아프가니스탄으로, 그리고 소외된 이웃과 배곯는 북한 주민들에 주목한 바 있다. 이 시에서 껍질들은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 나타나는 껍데기와 다르다 

 

가을걷이 끝난 들녘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들린다.

 

누렇게 마른

콩대, 깻대, 도라지 꽃대, 더덕 줄기, 토란대

호박 줄기, 고춧대, 참취, 벌개미취, 해바라기, 볏짚

새 생명을 낳은 산모들

영원으로 대지로 우주로 귀향하며

기쁨에 넘쳐 부르는 노래 노래

마음과 영혼으로 듣는

소리 없는 합창

 

한여름 힘겨운 임신과

몸서리치는 산고는 옛 이야기

가벼워진 몸으로 당당한 승리자의 눈빛으로

영생과 안식의 집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세상을 이어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들의 소리 없는 노래

 

가을 벌판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듣는다.

-마른 껍질들의 합창전문 

 

알곡만을 1등으로 삼고 기억하는 사회에 시인은 1등이 아닌 꼴찌들, 그러니까 버려진 껍질들의 소리없는 합창을 듣는다. 그들은 누렇게 마른것들이고, 그 이름들을 시인은 친절하게 호명해준다. 껍질들, 버려진 존재들의 합창은 엠마누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가 말한 이름 없는 타자들의 향유다. 그 향유의 처음과 마무리인 1연과 4연은 단순한 수미상관이 아니다. “가을 걷이 끝난 들녘에 서면”(1)이 더욱 헐벗어진 가을벌판에 서면”(4)으로 바뀐다. ‘가을걷이들녘이라는 따스한 이미지가 사라지고 가을벌판이라는 빈 공간에서 시인은 오히려 꽉찬 소리 없는 합창소리를 듣는 것이다.

레바논 등지에서 억울하고 비참하게 죽은 유령들”(광시증에 걸린 지구), “집에서 척추장애로 누워 지내며 천식까지 앓고 있는 아들의 대소변을 요 위에서 받아내고 얼굴과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양치질을 시킨 뒤 이 쪽 저 쪽으로 아들의 몸을 젖혀가며 운동시키는 정원사의 아내, “언제 해고될지 몰라 불안하면서도, 더 열심히 병들고 상처 나고 시들거리는 나무들을 보살피”(슬픈 정원사)는 비정규직 정원사, “다섯 살도 안 된 자식 / 병원 못 가 죽어 가슴에 묻는 아프리카 여인(오죽), “달동네 철거민처럼”(짐승이 운다) 우는 짐승 닮은 이들은 모두 껍질로 살아간다.

그런데 차 시인이 보는 이들은 흔히 말하는 계급적인 민중 개념과 다르다. 그의 시에 나오는 존재들은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중심이 되지 못한 주변적(the marginal)인 것들, 자기의 이름을 갖지 못하고 남에 의해 자기 이름과 역사와 삶이 번역되는(translated) 변두리의 서벌턴(subaltern), 살아있지만 죽어 있는 호모 사케르(Homo sacer)의 환유법이다.

그런데 자연은 늘 이렇게 서로 돕기만 하는 절대적인 유기체가 아니다. 자연에 대해 시를 쓰는 어떤 시인은 자연의 미()를 예찬하고, 나아가 자연의 이기적인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자연에 대해 무조건적인 찬사하고, 자연을 신비화 하는 관념적 놀이 속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자연/문명을 대립시키고, 자연을 절대적 선, 문명은 절대적 악으로 도식화하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자연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차 시인은 자연을 신비화하지 않는다. 자연 속에도 폭력이 존재한다 

 

내 뜰의 눈향나무는 눈이 있어

북쪽 막힌 벽 쪽으로는 새순을 내지 않고

비 내리고 바람 불고 햇빛 비치는 남동쪽으로만

할미꽃과 수국과 철쭉을 서슴없이 덮쳐가며

몸을 불렸다.

우아하고 아름답게 품위를 지키면서

푸르게 표 안 나게 소리 없이 진격하여

영토를 늘리고 힘을 키우는 눈향나무는

오늘도 작고 가냘픈 무수카리, 채송화, 은방울꽃을

망설임 없이 깔아뭉갰다.

 

눈은 있으나

마음의 눈이 없는

눈향나무를 어쩌나

-눈향나무는 눈은 있으나전문 

 

눈향나무가 가냘픈 무수카리, 채송화, 은방울꽃을 깔아뭉개며 세력을 펼쳐나가는 것을 어쩌나라며 안타까워 하는 시편이다. 신비스런 자연에도 강을 건너는 들소 떼는 어김없이 악어 떼들에게 물려죽어 / 악어와 새와 물고기의 밥이 된다”(생명의 빛은 어디서 오는가). 자연 속의 폭력에는 마음의 눈이 없다. 자연 속의 폭력을 신성화한 사건이 실제로 역사에서 일어난 사례는 너무도 많다. 19세기에 자연과 인간이 통일체임을 강조하며, ‘대지에 대한 사랑호전적인 인종주의가 치명적으로 연계되었던 에코 파시즘도 있었다. 시인은 콩밭, 배추밭, 무밭을 김매고 난 뒤, 쓰레기로 버려진 잡초를 보며 에코 파시즘을 깨닫는다 

 

인종청소가 이랬을까

다 같이 푸른 어깨 부비며

반짝일 순 없을까

 

하늘까지 가서 세상을 다 내려다본

미루나무가

온몸의 잎을 흔들어대며 우는 까닭을

이제야 알겠다.

-김매기에서

 

시인은 버려진 식물 쓰레기 더미에서 인종청소를 상상한다. 생태학과 연결된 역사적인 인종청소도 있었다. 히틀러의 나치는 생태적 건강을 인종적 건강과 결합시켰던 극단적인 에코 파시즘이었다. 실제로 유대인 대학살[Holocaust]은 극단적인 생태주의를 배경으로 일어난 비극이었다. 차 시인은 자연을 절대화하는 정신주의 생태시의 오류와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현실에서 우리는 마음의 눈이 없는 / 눈향나무를 얼마나 많이 목격하고 미루나무처럼 흔들어 우는가 

    지구가족의 어머니

식물들은 자기들끼리 가족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기 주목들 꽃삽으로 정성껏 떠서/ 양지바른 텃밭에 옮겨 심으니 / 어미 주목이 환해”(동물이나 식물이나 어미들은 한마음)진다. “아빠 은행나무는 엄마 은행나무가 / 당신을 닮아 아기 은행들이 크고 잘 생”(은행나무 부부)긴 은행나무 가족도 등장한다. 들깨향기를 좋아하여 시인의 들깨를 한사코 제 것이라고 /끈질기게 제 집이라고”(들깨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기는 벌레 이야기는 미세한 감동을 준다. 결국 이 우주의 궁극적 법이란 곧 개개의 모든 존재가 상호관계하는 상의성(相依性)의 법이다. 모든 존재들의 관계를 지구 가족(earth houeshold)’으로 이해하는 시인은 타인의 아픔도 아파한다. 어머니의 몸으로 

 

지하도 상가 문턱을 베고 자다가

갑자기 내려온 철문에 깔려 죽은 노숙자가

추석날 휴전선 앞에서 북녁 고향을 향해 절하며

제사지내는 할아버지가

뉴욕의 쌍둥이 빌딩이

관타나모와 이라크가

아프리카 여인들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핵실험을 한 북한이

(중략)

가슴을 번갈아 찔러 나는 만성통증

아프다. 아프다.

-아프다에서

 

차 시인은 우주의 삼라만상을 어머니의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따르면, 가이아(Gaia)는 대지의 인격신으로 태초의 혼돈인 카오스에서 태어난 최초의 피조물로 하늘, 바다, 산들이 그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구를 가이아라고 했다. 지구의 생물들, 대기, 대양, 지표면이 모두 함께 하나의 시스템을 형성하여, 이 지구를 약동하는 쾌적한 장소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 가이아(Gaia) 이론’(J.E. Lovelock,가이아-생명체로서의 지구)은 지구의 모든 사물을 유기체적인 가족 공동체로 본다. 우리는 위 시에서 생태적 상상력이 역사적 지평과 만나는 것을 목도한다. 시인은 죽은 노숙자, 휴전선 앞에서 제사지내는 할아버지, 관타나모 수용소,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천주교 주교단의 성명 등을 가슴을 찌르는 만성통증으로 아파한다. 시인 자신이 자연과 온갖 사건에 가이아 공동체로 아파하고 있는 것이다.

온누리를 느끼며 체험하는 초록시에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는 어머니라는 이미지다. 이 시집의 많은 시편에 어머니 이미지는 라캉(Jaques Lacan)이 말했던 누빔점(point de caption, 소파의 천을 고정시키는 자리)의 역할을 하고 있다. 차 시인의 시는 어머니라는 누빔점으로 인해 질서와 평화가 유지된다. 어머니 이미지는 제2부에서 드문드문 읽히다가, 4부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시인은 먼먼 훗날 / 우주 정거장에서 만난 외계인이 / 당신의 나라는 어디요?”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고 말한다 

 

당신의 고향은 어디요?

묻는다면

지구입니다

말하리라.

어디를 가는 중이요?

묻는다면

억 광년 떨어진 행복태양계 대륙으로

  시집간 딸의 출산을 돌보러 갑니다

말하리라.

-내 고향은 지구에서

 

 

나무와 풀이 나를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제 몸에 벌레를 잡아 달라 하고

웃자란 머리칼을 예쁘게 깎아 달라 한다.

나무와 풀은 저희들을 돌보느라

애면글면 일하는 내가 안쓰러워

어머니 드세요 하며

싱싱한 열매와 잎을 듬뿍 내밀고

나에게 우주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쓴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봐에서 

 

에서 시인은 저는 생명 평화 지구 만들기 회원이랍니다라고 고백한다. 에서 나무와 풀과 벌레가 시인을 어머니로 부른다. 시인과 자연은 하나의 가족공동체다. 앞서 전문을 인용한 시마른 껍질들의 합창에서 콩대, 깻대, 도라지 꽃대 같은 온갖 식물들도, “새 생명을 낳은 산모들로 승격한다. 모든 껍데기와 껍질의 노래도 이미 한여름 힘겨운 임신과 / 몸서리치는 산고는 옛 이야기이며 어머니들의 소리 없는 노래인 것이다. “어머니 되는 지구가 아버지 되는 태양을 통해서 수태했으며 이 수태를 통해서 생명은 생명권에 태어나게 된 것”(A.J. Toynbee, Mankind and Mother Earth - A Narrative History the world, 1976)이라는 말도 있듯이, 이 시집에서 시인과 우주는 모성적 연대를 이루고 있다. 그리스 원어 그대로 온누리가 한 가족[οiκος“‘]이 된 상태다.

모성을 기초로 한 여성적 생태 페미니즘(ecofeminism)은 가부장적으로 기획된 자연파괴에 끊임없이 저항해 왔다. 다만 간혹 여성=자연을 지나치게 신비화하거나 숭배하는 경향을 띠면서, 여성을 권력 주체로 보거나, 팔루스(pallus, 남성권력)를 무조건 무찔러야 할 적으로 파악하는 사나운 페미니스트도 있다. 이에 비해, 차 시인의 모성적 생태 페미니즘은 환경 문제 해결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아직도 남의 가정을 파괴하고 평정하여 / 태연하게 왕으로 군림하는수컷 사자들을 시인은 경고한다. 그러면서도, “암컷과 수컷이 마주 보고 / 서로 아끼고 존중하고 도와야”(아직도 그들은 수컷 사자들)하는 세계를 시인은 꿈꾼다. 근대화라는 개발에 대항하여, 비폭력적이고 성별에 기반하지 않는, 모든 인간을 포괄하는 대안으로서 모성적 원리의 회복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녀에게 남성은 대립해야 할 적이 아니라, 어머니가 껴안아야 할 대상이다.

어머니로서 자연을 바라보는 시인의 입장에서 우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는 행동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생명을 실어 나르는 대동맥

나를 파헤치고 퍼내어 내 살과 뼈 사이 장벽 쌓아

내 안에 배를 띠우지 마오.

내가 기르는 풀꽃과 나무와 물풀과

물고기와 다슬기와 곤충과 짐승만이 아니라

내게 목숨을 대고 있는 벌판과 산과 마을도 죽는다오.

배달겨레도 당신들도 죽게 된다오.

나를 있는 그대로 살게 해다오.

나 이 땅 목숨을 키우고 지키고 사랑하며

푸르게 푸르게 살아

한반도를 영원토록 빛내고 싶으니

나를 지금처럼 흐르도록 내버려두오.

-있는 그대로 살게 해다오에서 

 

강물은 생명을 실어 나르는 대동맥인 생태의 보고(寶庫). 시인은 강물을 통해서 진정한 생명의 근원을 모색하는 길은 지금처럼 흐르도록 내버려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차 시인의 초록시는 그대로 놓여진 자연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한다. “있는 그대로”“내버려두오노자(老子)무위자연(無爲自然)’의 세계관과 닮아 있다. 이러한 태도는 변하지 않는 존재에 대한 공경으로부터 시작한다. 동시에 차 시인의 초록시는 환경을 변화시키려는 정책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그 변화에 대응하는 실천을 선택한다.

그런데 한반도 대운하에 반대하는 차 시인의 생각을 단순히 노자적인 운동논리로 생각하면 안된다. ‘은 곧 어머니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몸, 로 가득찬 자궁은 가족을 만들고 세계를 만든다. 차 시인에게 존재는 물에서 나서 물로 살다 /물로 돌아갈 뿐”(물로 돌아갈 뿐이다)이다. 또한 인간이 욕망을 쫓아 바벨탑에게 묻지 말고 물에게 길을”(물에게 길을 묻는다) 물으라고 권한다. 4부의 어머니에 대한 시편에 등장하는 상징은 시인에게 근원적인 힘을 제공하는 원천(源泉). 의 시인은 자연을 파괴하는 정책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한다

  시집이 숲이네

베토벤의 전원교향곡은 그가 사랑했던 산과 들과 인류에 보내는 최대의 찬사였다. 그는 귀가 들리지 않았을 때 스스로 자연과 일체가 되어 36분간의 명작을 역사에 남겼다. 우리는 전원교향곡을 들으며 초록의 숲길을 산책하게 된다. 차옥혜 시인은 여름 숲에 와보니 / 숲은 시집이네”(이 시인은 누구일까)라고 했지만, 이 시집을 읽는 이들은 오래오래 초록숲을 몽상할 것이다.

이제까지 생태주의 문학이라 하면, 생명시의 원조격으로 생명사상을 주창하는 김지하의 생명시, 녹색공동체 운동의 김종철, 불교의 공의 개념을 천착해서 새로운 통합적 세계를 그려내는 최승호의 시, 꽃 한송이로 상징되는 정현종의 시 등을 떠올릴 수 있겠다.

차옥혜 선생의 초록시에는 기존의 생태시와 다른 깊은 매혹이 있다. 그녀의 초록시 철저하게 가족 공동체로 삼라만상을 파악하고 있다. 그녀의 초록시에서 개체와 생태계의 관계도 상호 의존적 관계이며, 존재와 존재 사이의 관계도 상호 의존적 관계로 유지된다. 개체 없는 생태계가 있을 수 없으며, 반대로 생태계 없는 개체도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차옥혜 시인의 초록시는 중심이 아닌 주변적이며, 종교적초록시이며, 식물 글자의 세계를 위해 주장하고 실천하는 모성적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열매다.

아홉 번째 시집, 우리는 한 시인의 완성을 목도한다. 읽는 내내 산소의 숲, 초록의 숲길을 산책하는 몽상에 빠져든다. 초록시가 뿜어내는 산소의 너울은 그윽하고 넓다. 그러하니 더 기다리게 된다, 시인이 또 어떤 우주가족을 또 환대해주실른지.

 

<시문학 20106월호 재수록>

Posted by 차옥혜
,

     첫눈 같은 시인의 영혼집

  이보숙(시인)

   

차옥혜 시인은 성급한 겨울을 이끌며 오는 차가운 첫눈이 시인의 마음을 오히려 뜨겁게 달구듯이 옷 벗은 거리의 나무들의 맨몸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낙엽을, 늦은 밤 귀가하는 사람들의 가슴을 어루만져주는 시이기를 마음으로 기원하며 시를 쓰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첫눈은 혹독한 겨울을 예고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신선함과 새로움과 희망을 느끼게 하는 불가사의함을 지니고 있다고 그는 시인의 말에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차옥혜 시인은 1984년에 한국문학으로 등단한 후 1995경희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매우 부지런히 시를 써온 시인이다. 이번에 상재한 시집허공에서 싹트다가 그의 여덟번째 시집이기 때문이다.

내가 알고 있는 시인은 인간뿐만 아니라 우주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을 몹시 사랑하고 아끼며 사물 하나하나에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그의 안에 존재하는 신으로부터 오는 본성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유달리 부모에 대한 애틋함이 간절하기 그지없고 인간의 불행한 모습에 눈물겨워하는 모습이 시집에 가득 담겨있다. 세상의 부정적인 모습을 탓하기보다는 긍정적인 사고가 그를 지배하고 있는 듯하다.

 

 

꽃을 보기 위하여

먼 길 걸어가는 이여

오래 아파하는 이여

꽃을 위하여

오래 울고 있는 이여

꽃을 지키기 위하여

긴 세월 시달리는 이여

꽃을 보고 꽃과 함께 하는 시간은

순간이지만 언제나 아쉽지만

때로는 끝내 못 만나기도 하지만

꽃을 위하여

모두를 바치는 당신의 삶은

꽃보다 더욱 아름답다 순결하다

꽃을 오래 참고 기다리는 당신은

꽃보다 더욱 눈부시다.

-꽃보다 눈부신 사람전문

 

시인들은 모두 저마다의 꽃을 위하여 날마다 가시밭길을 마다않고 가고 있다.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우려고 피를 흘리며 가슴을 조이며 밤잠을 설치며 때로는 기가 죽어 이마에 주름마저 깊어진다.

영국의 대 시인 워즈워드가 좋은 시는 강력한 감정의 자발적 발로라고 말한 바 있다. 다음의 시는 차 시인이 이 어두운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등댓불을 지키기 위하여

홀로 어두운 등대지기여

내 밤바다 등댓불을 끄십시요

나도 어두어져

당신의 어둠과 하나 되어

당신의 밤바다 등대지기가 되겠습니다

 

당신의 밤바다에 내가 등댓불을 지피고

내 밤바다에 당신이 등댓불을 지피면

당신과 나에게 밤은 없으리

세상에 어둠은 없으리

-등대지기부분

 

차 시인은 또 삶에 대해서도 매우 아름다운 정의를 내리고 있다.

싫든 좋든 해롭든 이롭든 삶은 우리 인생이 지고 가야할 십자가이며 묵묵히 받아드려야 할 과정인 것이다. 그는 묵묵히 생을 지고가며 깊고 큰 산이 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다는 것은

제안에

동굴 나날이 길어져 아파도

껴안고 쓰담으며

제 밖에

조팝나무 가시나무 칡 인동

노루귀 씀바귀 솜다리 질경이

산돼지 다람쥐 여우 늑대

여치 소쩍새 땅강아지 부엉이

미워도 고와도 찾아온 생명이면 무엇이든

품어 기르는

산이 되는 것

-산다는 것은.2부분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시인의 목적은 이익이나 교훈을 주는 일, 또는 기쁨을 주는 일과 인생에 어떤 유익한 교훈을 결합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또는 작은 농장을 운영해 보기 위해 서울에서 좀 떨어진 농원에 집을 짓고 종종 내려가 농사일도 하고 정원도 가꾸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아마 그 속에서 많은 경험을 하며 시를 쓰곤 할 것이다. 그는 작은 것에서도 진리와 기쁨 그리고 슬픔도 간과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쪼글쪼글한 마늘이

말라비틀어지는 마늘이

제 몸의 수분을 한 방울이라도 더 짜서

새싹을 조금이라도 더 밀어 올리려고

몸부림친다

 

마늘싹이

허공을 깬다

-허공에서 싹 트다부분 

 

마치 어머니가 자신의 몸속의 모든 영양분으로 만들어진 젖을 먹여 아이를 길러내며 자신은 점점 쪼글어드는 듯한 모습이 연상되지 않는가. 시인은 글을 통하여 종종 구도자의 역할을 한다. 상처 입은 짐승처럼 가슴을 웅크리고 있는 자들에게 시는 하나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세상 바람에 흔들리고 흔들려

세상 집을 잃은 이여

오라 숲으로

각시붓꽃 할미꽃 제비꽃 패랭이꽃 초롱꽃

어느덧 너의 부서진 집 다시 지어놓아

너를 편히 쉬게 하며

너도 이 꽃 저 꽃으로 피어나

네가 어여쁘다 속삭인다

 

세상 비에 젖어

꿈을 잊은 이여

오라 숲으로

별개미취 더덕 도라지 송이버섯 쑥

어느덧 땅 속 깊은 열기 퍼 올려

너를 보송보송 말려

새처럼 나비처럼

꿈을 물고 날아오르게 한다

-오라 숲으로부분

 

시인은 또한 매우 인도주의적인 시인이다. 그는 세상 구석구석 어두운 곳에 등불을 비추고 싶어한다.

 

 

세 살쯤 되었을까

뼈만 남은 아프리카 어린아이가

흙집들 모여 앉은 죽은 듯 고요한 마을 앞

성긴 풀잎 삐쭉거리며

돌멩이와 지푸라기 드문드문한 황량한 들에

어른들은 어디 가고 홀로

배가 고파 쓰러져 땅에 머리 박고 엎드려 있는데

검은 독수리가

그 어린아이의 등 뒤 조금 떨어진 거리에 서서

어린아이의 검은 등을 노리고 있다

앞으로 쑥 내민 날카롭고 무지막지한

독수리의 흰 부리가

막 그 어린아이의 등을 쫄 것 같다

 

나에게 창을 던지는

그러나 도망갈 수 없는

수단의 굶주린 소녀라는 제목의

퓰리처상 수상 사진

-. 1 굶주린 소녀와 독수리부분 

 

차옥혜 시인의 기억 속에는 네다섯 살적 한국 전쟁이 각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의 시집 속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 민족이 겪어야 했던 불행의 단면을 빼 놓을 수 없다. 또 이 시에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은 밥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고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그 시절은 지금은 별미가 되어있는 꽁보리밥, 그 한 숟갈 얻어먹기도 어려웠던 배고프고 굶주렸던 때였다. 

 

두 살 난 아기 등에 업고

임신한 몸으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팔

빨래비누 머리에 이고

논둑을 걸어가고 있었다.

어머니는 내게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지만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다 야단맞고 발 동동거리며

싸리대문 앞에서 울고 있는 다섯 살배기 내가 가엾어

여치와 메뚜기가 발등을 간질이는지도 모르고

뜸북뜸북 뜸부기 울음소리도 듣지 못하고

눈물을 쏟았을 것이다.

아니면 어머니 눈에

붉은 맨드라미 가득 피어 쓰라렸을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눈을 감으면

내 아름다운 서른세 살 어머니가

내 마음 논둑을 아프게 걸어가고 있다.

-. 4 서른세 살 우리 어머니부분 

 

차옥혜 시인의 시는 참으로 읽기 쉽고 편안하다. 그는 시에서 철학을 논하려고 하지 않고 미사여구를 쓰려고 하지도 않는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서는 깊은 감정의 골을 느낄 수 있고 아픔과 희열의 강물이 넘쳐남을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부담 없이 그의 시는 읽혀진다. 그렇다고해서 그의 시가 가볍거나 무게가 없다고 할 수 없다. 서정적인 미술작품을 아낌없이 보여주고 있어 그의 시 앞에 머리가 숙여 진다. 차옥혜 시인의 가슴에 넘치는 시심이 많은 독자를 계속 울려주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문학과 창작 2008년 가을호 213-219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