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 처절한 고독
신미균(시인)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는 남성의 소변기를 화랑에 전시했다. 사람들은 그 하찮은 소변기가 무슨 작품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에서, 익숙해진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늘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변기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설치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살다보니 대단한 것들이 사람을 감동 시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돌이켜보면 더 큰 감동이 되어 돌아온다.
차옥혜 시인의 시는 오랫동안 곰삭아서 깊은 맛을 내거나, 발효되어 톡 쏘는 시는 아니다. 또한 깊은 좌절과 허무와 비애의 시도 아니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의 작품처럼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기 쉽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차시인은 1986년 민음사에서 『깊고 먼 그 이름』을 첫 출간한 이후부터 20여 년간 꾸준히,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자연에 대한 줄기찬 관심과 사랑을 갖고 시를 써왔으며, 그의 시에는 자유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어머니를 잊어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가 계셨던 병원, 오빠네 집, 노인정, 어머니가 다니셨던 길도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객관화 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차옥혜 시인의 시집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를 만났다. 나는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일년 넘게 참았던 감정을 주체 할 수가 없어 한참을, 아주 한 참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에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기만 하면
언제나 전화를 받던 어머니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 벨은 울리는데」- 부분
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구절이다. 이것은 정말로 체험이 없으면 가슴에 진하게 전해지지 않는 구절이다. 나도 차 시인처럼 매일 아침 전화를 해 봤기 때문에 이 시가 더욱 내 가슴을 친다.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 했던 사람이 이제는 전화를 할 곳이 없어졌다는, 아니 전화를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은 대단하다. 이것은 그 상황을 똑 같이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늙은 어머니의 이삿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의 집에 불이 켜졌다
(〮···중략〮···)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 밖엔
불켜진 어머니의 집이
천개 만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 가고 있다
- 「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부분
며칠 전 뉴스에, 이십대 후반의 어머니가, 불 난 집에서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으나, 일곱 살 된 아들이 집안에 있는 것을 알고는, 아들을 구하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들과 함께 숨졌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상 어느 누가 나를 위해 불 속에 뛰어들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게 깊은데 자식들은 늙으면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도 꺼린다. 내리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어머니가 측은해서 같이 살다가도, 같이 살면 왜 그렇게 속 터지는 일이 많은지, 친정어머니 모시기가 시어머니 모시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를 외롭고 쓸쓸한 방에 혼자 계시게 하고 돌아서는 시인의 마음이 더 아프게 전해져온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잠자다가 거울을 보다가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아픈 가슴으로 말하네
꽃을 보다가 새소리를 듣다가
빨래를 개다가 별을 보다가
어머니 미안해요
시린 뼈로 말하네
-「슬픈 죄인」 - 부분
친척 어들들이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잘하라고, 돌아가시고 나면 뵙고 싶어도 못 뵙는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설마, 뭐 그렇게 까지 보고 싶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무친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 찾아뵙기를 게을리 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어머니에게 잘못했던 일들만 생각나, 차 시인처럼 잘못했습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시가 나에게, 아니, 똑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 갈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서도
죽음의 입구 어머니의 처절한 외로운 싸움에
나는 함께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위태로운데
나는 밥 먹으러 나가고
눈을 붙이러간다
(···중략···)
이별의 순간이 바짝 다가왔는데도
나는 자꾸만 꾸뻑꾸뻑 졸고 눕고 싶다
-「임종, 처절한 고독」- 부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잠을 자야한다. 이 얼마나 진솔한 표현인가, 여기에 어떤 미사여구가 필요하고, 어떤 시적 은유가 필요할 것인가, 깨끗하고 담백한 문장이 도리어 임종의 순간을 객관화 시켜서 혼자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고독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아무리 권세가 높은 제왕일지라도 죽을 때는 혼자이고, 누구도 그것을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그 처절한 고독의 순간이 어머니뿐만 아니고, 곧 우리에게도 다가온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한정된 지면 때문에, 차옥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중에서 제 2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상에는 어머니가 있는 사람과 어머니가 있었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 시집은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싱거울 수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셨거나 혹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시집이다.
<문학과 창작 2006년 겨울호 270쪽-273쪽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