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러니의 상반성과 시적 감동

  김석환

 

시는 언어의 외피 속에 감추어진 의미, 즉 내포적 의미를 포착하여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상적 언어 양식과 다르다. 그것은 시가 어떤 대상의 변화하는 형상들 속에 내재된 변화하지 않는 본질을 찾는 언어 예술이기 때문이며, 그런 관점에서 볼 때 아이러니는 시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한 아이러니는 여러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으나 공통적으로 2중성과 상반성을 기본적인 특성으로 갖고 있으며 겉과 속이 서로 대립될 경우 성립한다. 즉 시인이 더러운 외피 속에서 순결을, 큰 것 속에서 작은 것을, 사소함 속에서 소중함을 발견하고 그 상반된 겉과 속을 동시에 바라볼 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독자들은 그 아이러니 구조를 통하여 정서적 감동이나 충격을 받고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대상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현대시가 궁극적으로 아이러니를 추구하는 것도 그런 힘 때문일 것이다.

중략  

 

쓰러진 나무가 홀씨를 날려

억울하고 화난 세상을

캄캄하고 아픈 시간을

건너고 있다

-차옥혜 시인의 쓰러진 나무가 홀씨를 날려일부

 

위의 시에서 쓰러진 나무는 그냥 썩어가지 않고 자신의 생명력과 꿈을 담은 홀씨를 날리고 있다. 앞 연에서 보면 그 나무는 열심히 키를 키우고 잎을 매달아/하늘에 닿을 듯했는데장대비에 쓰러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지들이 썩는 나무는 오히려 홀씨를 날림으로써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 꿈의 나라인 영원으로 가고 있다. 왕성한 생명력을 발휘하며 꿈을 키우던 나무가 쓰러지고, 그 나무의 죽음이 다시 홀씨로 부활하여 꿈을 이루는, 즉 나무의 의지와 그 결과의 상반성이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시인은 그러한 아이러니를 통하여 인간의 운명이 자신의 의도나 욕망보다 자연의 섭리에 지배되는 것이며 그러기에 겸손한 삶의 자세가 필요함을 보여준다.

 

<시문학 200312월호 170-172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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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밥 혹은 밥의 시

  조영미

 

우리가 말하는 현대란 거대한 자본에 의해 움직이는 이-마트E-mart와 같다. 이 거대한 시장 속에는 현대라는 이름을 대신하는 여러 상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기 위한 상품들이 즐비하다. 이들 상품은 일련의 과학적인 편리함과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완전무장 되어 자본과의 영합을 꿈꾸고 있다.

시장에 나가 보라. 언제부턴가 재래시장을 대신하고 있는 '마트'는 재래시장의 단점을 보완하여 편리하고 깨끗한 서비스로 값싸고 청결하게 소비자들을 유혹하고 있다. 이러한 현대감각의 마트는 재래시장의 규모를 축소하고 도시의 후미진 뒷골목에나 존재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사람들은 현대적인 마트를 이용하면서도 재래시장을 그리워하고 있다. 다시말해, 편리함을 추구하면서도 불편하고 지저분했던 과거의 좌판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상반된 현상은 현대인의 삶이 도식화되고 기계화되어 갈수록 더욱 심해지는 모습을 보인다.

'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삶은 '화폐 가치'로 환산된다. , 화폐의 크고 작음과 정확한 단위 계산에 의해 내 것과 네 것이 구분된다. 그러므로 마트에서는 '한 주먹 더'란 있을 수 없다.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화폐로 환산된 상품이기 때문에 "에이기분이다." 혹은 "밑지는데!." 하는 식의 '얹어주기'란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사람을 앞서가고 사람이 물질을 쫓아가는 현 시점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것은 재래시장 곧, '정적情的인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사람 사는 냄새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래시장에서 한 주먹 더 얹어주는 나물 한 움큼, 사과 한 알 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 무엇의 성격을 띤다. 여기서 '그 무엇'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정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돈으로 환산될 수 없는 값어치이며 재래시장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이미지이기도 하다.

 

(중략 )

이러한 재래시장의 상징적인 의미는 {시와산문} 가을호에 실린 김성수의 []과 차옥혜의 [],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에서 물질화 된 자본주의의 암울한 일상으로 그려진다.

(···중략···) 

 

20022340대 여자가

굶어죽었다

쌀 재고량 1200만 섬이 쌓여 있는 나라에서

 

대구 수성동 임대아파트에 두 달 전

열두 살 딸과 함께

2만원을 가지고 이사와

간간이 빵을 사먹다

관리비 6만원을 못 내어

수돗물과 도시가스까지 끊겨

약숫물을 길어 먹다

그 여자가 굶어 죽었다

많은 사람들이 살을 빼려고

헬스클럽 러닝머신에서 땀을 흘리는 도시에서

 

그 여자가 죽어가면서 본

하늘은 무슨 빛깔이었을까

사람들은 무슨 모습이었을까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

차옥혜의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전문

 

차옥혜는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격차와 소외를 통해 현대인의 개인주의적인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내 것이 아닌 것에는 관심이 없는 현대인들은 타인의 사생활에 간섭하려들지 않는다. 그것은 곧 사생활 침해라는 그럴 듯한 이유로 상대방을 배려하려는 것 같지만 실상 이러한 배려는 우리의 이웃을 죽음으로 몰고 가기도 한다. 조그만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어린 딸과 여자는 죽음이라는 극한적인 상황으로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김성수는 그의 []에서 "너그런 맘씨"를 떠올리게 되고, 차옥혜는 "봄이 와도 녹지 않을/ 얼음 속에 갇힌/ 가랑잎 하나"를 보여주게 된다.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두 시인이 []을 통해 내보이는 삶의 태도이다. , 밥이라는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자본주의에 잠식당하고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과연 무엇의 밥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이러한 물음은 시를 쓰는 시인에게 시쓰기의 괴로움을 선사한다.

그런데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시가 돈이 될 수 없는 현실에서 시인의 밥은 시가 된다. 이때 시인에게 밥이 되는 시는 돈이라는 물질과는 상당한 거리를 두게 마련이다. 시인은 돈을 쫓기보다는 우리의 각박해진 현실을 들춰내고 잃어버린 것들을 기억해주길 바란다. 소설처럼 리얼하게 살아가는 방법이 참다운 삶일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에 비껴 서 있는 듯한 관조 또한 삶의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그 시대의 흐름을 바꿔놓을 수는 없지만 올바로 가는 길을 제시해 줄 수는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의 밥이며 밥의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한 밥은 잡곡밥일 수도 있고 오곡밥일 수도 있으며 찰밥이나 보리밥일 수도 있다. 밥은 만드는 사람의 기술이나 정성에 의해 그 맛과 향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시인에게 있어서 시는 밥인 동시에 시인 것이다.

(···중략···)

[]을 시제로 한 김성수와 차옥혜, 김행숙의 [먹다버린 빵]"먹힘()"이라는 의미를 통과해 "버려짐()"이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들의 시는 서로 다른 접근을 통해 먹히고 버려지지만 결국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것이 김성수에게는 '()자본주의'로 그려지고 차옥혜에게는 '(소외)가랑잎'으로 그려지며, 김행숙에게는 '먹다버린 삶'으로 그려지는 것이다.

밥은 우리의 생명을 지속시켜주는 에너지이다. 그러나 우리는 밥의 에너지만으로는 세상을 살아낼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밥이 내포하는 여러 가지 코드를 통해 보다 가까운 삶의 진실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그것이 시를 쓰는 시인에게 있어 진정한 의미의 밥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사랑하는 이여 내가 눈물 적실 때마다 그대는 별빛으로 걸어"(이동녘)올 것이며, '시선'(주봉구)을 통해 새로운 통로를 열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신문 문학평론 2002.12.6.자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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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감동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승하

 

 

21세기가 된 지도 1년이 지났다. 우리 시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문예지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일반 독자는 좋은 시가 없다며 문예지와 시집을 외면하고 있다. 간혹 큰 서점에 가보면 시집 코너는 늘 한산하고, 간혹 손님이 계산대에 갖고 가는 시집은 그 이름이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베스트셀러 시집'을 펴내는 시인의 시집이다. 문학평론가에게 부과된 의무가 있다면 매달 매 계절 쏟아져 나오는 문예지에서 '좋은 시'를 찾아내어 제대로 평가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그 시인의 등단 지면발표 지면안면학연지연 등을 염두에 두지 않고 공정한 입장에 서서 평가하기란 기실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옛 사람의 지혜로운 말씀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 자신을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매다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시에는 두 가지 어려움이 있다. 탁자(琢字)와 연구(鍊句)에 숙달하는 일과 사물을 본뜨고 정서를 묘사하는 미묘한 일들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오직 자연스러움이 첫째의 어려움이요, 깨끗한 여운을 남기는 것이 두 번째 어려움이다.

정약용이 {與猶堂全書}에서 한 말이다. 다산은 시어를 조탁하고 시구를 연마하는 것이나, 사물과 정서를 잘 묘사하는 일이야 웬만큼 수련하면 가능하다고 보았다. 좋은 시 쓰기가 어려운 것은 지나친 꾸밈새로 말미암아 자연스러움에서 자꾸 벗어나기 때문이며, 깨끗한 여운을 남기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일 터인데, 공감이 가는 말이다. 서거정이 {東人詩話}에서 한 다음과 같은 말도 가슴에 새기고 있다. "시는 마땅히 기절(氣節)을 앞세우고 문조(文藻)는 뒤로 해야 한다." 시인의 기개와 절조, 즉 시정신이 중요한 것이지 언어 조형력, 즉 기교가 그에 앞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이것은 동양의 시학이다.

서구의 상징주의와 주지주의,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이후 우리 시는 '정신의 시'를 버리고 '기교의 시'를 열심히 배우고 학습했던 것이 아닐까. 정말 좋은 시는 양자의 선미한 결합, 다시 말해 기법에 있어서는 천의무봉(天衣無縫)이요 정신에 있어서는 사무사(思無邪)의 경지에 이른 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보면 보들레르의 만물조응(萬物照應)이나 랭보의 견자(見者)의 시학이 오로지 기교에만 국한된 시론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들레르는 시인의 존재 의의에 대해서, 특히 사물에 대한 감각과 사물과의 교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랭보는 보편적 영혼에 이르기 위한 착종의 감각을 중시한 견자의 시학을 들려주었다. 글쎄, 정신의 깊이가 아니라면 감각의 눈부심, 이미지의 떨림을 전해주는 시가 나와야 될 터인데 그런 시를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625전쟁이 터진 가을

12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 더부살이였는데

끼니때마다 큰아버지가 밥 많이 먹는다고 소리쳐

무릎이 곪고 부은 발로

낙엽을 밟으며 사라졌다.

친척들 집에 자식들을 나누어 맡기고

며칠마다 둘러보던 어머니가 오빠를 찾아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가보니

오빠는 호두나무 밑에서 호두를 까먹고 있었다.

 

'12살 오빠와 호두나무와 쌀 한 가마'란 부제가 붙어 있는 차옥혜의 시 []({시와 생명}, 2001. 겨울)의 전반부이다. 1945년 생 시인의 작품이므로 아마도 시 내용의 거의 전부가 사실에 근거한 것이지 싶다. 이 시에서 시적 기교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일을 별다른 감정의 이입이 없이, 즉 담담히 술회하고 있을 뿐이다. 625를 만나 일가가 뿔뿔이 흩어진다. 열두 살 오빠는 시골 큰아버지 집으로 피난을 갔는데 큰아버지가 밥을 많이 먹는다고 소리치자 다시금 자기가 살던, "정신 없이 폭탄이 떨어지는 빈 도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 집에는 호두나무가 있었던가 보다 

 

어머니가 다시 큰집으로 데려가려 하자

오빠는 호두나무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전쟁터 집에 머물렀다.

얼마 후 12살 오빠는

국군들 잔심부름하는 소년병으로 지원하면

가족에게 쌀 한 가마 준다는 말에

어머니가 잠든 사이

얼어터진 발로 떨어진 고무신을 신고

눈을 밟으며 집을 떠났다.

 

제목과 부제를 다시 새긴다. , 12살 오빠, 호두나무, 쌀 한 가마. 설움 받고 살기가 죽기보다 싫었던 소년, 가족이 얼마 동안 ''을 먹을 수 있다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도 좋다고 생각한 열두 살 소년의 마음이 심금을 울리는 바가 없다면 그 독자는 이 땅에서 살아갈 자격이 없다. 이 시에서 비유의 참신함이나 시적 형상화의 진경을 찾아볼 수 없다고 누가 수준 미달작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 말에 반대할 것이다. 시적 진정성은 소재의 특이함에서 나오기도 하지만 이 시처럼 주제의 힘에서 나오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감동은 흔히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열두 살 오빠의 착한 마음과 그 마음을 잘 이해하고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는 누이의 착한 마음이 '깨끗한 여운'을 남긴다. 아쉬운 것은 지나치게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것, 시의 마지막 6행은 문장이 다소 길어 답답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문학나무 20027월호 수록>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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