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적 통찰과 상상력

정순진

 

시와 다른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보다 매재가 다르다는 것이다. 언어를 매개로 한다는 것은 언어의 핵심기능을 시의 기본 성격으로 가지고 갈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시에서 아무리 운율이 중요해도, 아무리 이미지가 중요해도 의미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사고 혹은 사상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른 예술에서보다 시에서 높은 정신세계를 쉽게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언어예술이기 때문이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명명한 철학자도 있지 않던가. 그러나 삼라만상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더라도 그 통찰을 추상적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정서를 환기시켜야 한다. 이 때문에 좋은 시란 시인의 통찰력이 결합될 때에만 가능하게 된다.

중략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가 시인인 것을 알았네.

문자로 남긴 시는 한 줄도 없지만

벌판에 산에 강에 바다에

길에 집에 마을에 도시에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네.

나만 볼 수 있는 시

내가 번역해야만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머니의 시를 읽네.

-차옥혜의 우리 어머니는 시인에서

 

이 시는 내가 시인인 줄 알았더니 사실은 우리 어머니가 시인이었다는 깨달음이 시의 핵심이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글 다루는 사람을 존중해 글 쓰는 사람은 우대하지만 몸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알아보지도 못 하거나 하찮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런 경향을 일거에 깨고 시 한 줄 쓰지 않은 어머니를 시인으로 명명하는 것은 감동적이다.

어머니의 시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비로소 읽을 수 있다. 몸이 곧 텍스트인 경우 그 텍스트를 읽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멎는 곳마다 어머니가 몸으로 쓴 시 박혀 있다는 표현은 염념처처念念處處라는 말을 떠올리게 하며 절실한 그리움을 환기시키다. 또한 3연은 글로 쓰는 시와 몸으로 쓰는 시를 대비시키면서 구두선에 그치기 쉬운 글쟁이 모두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의 시는 그렇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시를 읊는 글로 된 이 시는 다소 수다수러워 감정이 떠버렸다. 우스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웃어버리면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웃기 어렵다. 텍스트를 읽을거리는 확보했지만 어머니의 몸이 곧 택스트였다는 사실에 놀라고 감격해 차분하게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확보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문학 20067월호 142-145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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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종, 처절한 고독

신미균(시인)

 

 마르셀 뒤샹이라는 작가는 남성의 소변기를 화랑에 전시했다. 사람들은 그 하찮은 소변기가 무슨 작품이 되느냐고 비아냥 거렸다. 하지만 그는 일상생활에서, 익숙해진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새롭게 환기시키기 위해, 늘 사용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변기를 제시한 것이었다. 이 작품은 오늘날 설치미술의 모태가 되었다.

살다보니 대단한 것들이 사람을 감동 시키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았다. 일상의 사소한 일들이 돌이켜보면 더 큰 감동이 되어 돌아온다.

차옥혜 시인의 시는 오랫동안 곰삭아서 깊은 맛을 내거나, 발효되어 톡 쏘는 시는 아니다. 또한 깊은 좌절과 허무와 비애의 시도 아니다. 하지만 마르셀 뒤샹의 작품처럼 너무나 일상적이기 때문에 지나치기 쉽고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일들이 도리어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고 생각한다.

차시인은 1986년 민음사에서 깊고 먼 그 이름을 첫 출간한 이후부터 20여 년간 꾸준히, 인간과 사회와 역사와 자연에 대한 줄기찬 관심과 사랑을 갖고 시를 써왔으며, 그의 시에는 자유가 있고 생명이 있고 아름다운 사랑이 있다.

작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후, 나는 어머니를 잊어버리려고 무진 애를 썼다. 어머니가 계셨던 병원, 오빠네 집, 노인정, 어머니가 다니셨던 길도 지나가는 것이 싫어서 일부러 피해 다녔다. 어머니라는 단어를 객관화 시키지 않으면 내가 죽을 것 같아 아무에게도 말 못하고 속앓이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 차옥혜 시인의 시집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를 만났다. 나는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일년 넘게 참았던 감정을 주체 할 수가 없어 한참을, 아주 한 참을,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 집에 전화를 한다

전화를 하기만 하면

언제나 전화를 받던 어머니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전화 벨은 울리는데- 부분

 

뭐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구절이다. 이것은 정말로 체험이 없으면 가슴에 진하게 전해지지 않는 구절이다. 나도 차 시인처럼 매일 아침 전화를 해 봤기 때문에 이 시가 더욱 내 가슴을 친다. 매일 어머니에게 전화 했던 사람이 이제는 전화를 할 곳이 없어졌다는, 아니 전화를 해도 받아줄 사람이 없어졌다는 상실감은 대단하다. 이것은 그 상황을 똑 같이 겪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인 것이다 

 

늙은 어머니의 이삿짐을 풀어드리고

돌아가다 되돌아보니

어머니의 집에 불이 켜졌다

(···중략···)

어둠을 뚫고 달리는 버스 차창 밖엔

불켜진 어머니의 집이

천개 만개가 되어 따라오다

어느덧 나보다 앞서 가고 있다

- 늙은 어머니를 고려장하고-부분

  

며칠 전 뉴스에, 이십대 후반의 어머니가, 불 난 집에서 불길을 피해 밖으로 나왔으나, 일곱 살 된 아들이 집안에 있는 것을 알고는, 아들을 구하러 다시 집으로 들어갔다가 아들과 함께 숨졌다는 기사를 보았다.

세상 어느 누가 나를 위해 불 속에 뛰어들 사람이 있을까? 어머니의 사랑은 이렇게 깊은데 자식들은 늙으면 어머니와 같이 사는 것도 꺼린다. 내리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어머니가 측은해서 같이 살다가도, 같이 살면 왜 그렇게 속 터지는 일이 많은지, 친정어머니 모시기가 시어머니 모시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머니를 외롭고 쓸쓸한 방에 혼자 계시게 하고 돌아서는 시인의 마음이 더 아프게 전해져온다. 

 

밥을 먹다가 길을 걷다가

잠자다가 거울을 보다가

어머니 잘못했습니다

아픈 가슴으로 말하네

 

꽃을 보다가 새소리를 듣다가

빨래를 개다가 별을 보다가

어머니 미안해요

시린 뼈로 말하네

-슬픈 죄인- 부분

 

친척 어들들이 나에게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잘하라고, 돌아가시고 나면 뵙고 싶어도 못 뵙는다고 말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나는, 설마, 뭐 그렇게 까지 보고 싶을까 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무친다󰡑는 말의 뜻을 조금은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어머니 찾아뵙기를 게을리 한 것이 너무나 한스럽고, 어머니에게 잘못했던 일들만 생각나, 차 시인처럼 󰡐잘못했습니다󰡑를 입에 달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위의 시가 나에게, 아니, 똑 같은 상황을 겪고 있는 독자들에게 더욱 다가 갈 수 있는 시라고 생각한다 

 

어머니를 사랑한다면서도

죽음의 입구 어머니의 처절한 외로운 싸움에

나는 함께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중환자실에서 위태로운데

나는 밥 먹으러 나가고

눈을 붙이러간다

(···중략···)

이별의 순간이 바짝 다가왔는데도

나는 자꾸만 꾸뻑꾸뻑 졸고 눕고 싶다

-임종, 처절한 고독- 부분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꾸역꾸역 밥을 넘기고 잠을 자야한다. 이 얼마나 진솔한 표현인가, 여기에 어떤 미사여구가 필요하고, 어떤 시적 은유가 필요할 것인가, 깨끗하고 담백한 문장이 도리어 임종의 순간을 객관화 시켜서 혼자 돌아가시는 어머니의 고독을 느끼게 해준다. 그렇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아무리 권세가 높은 제왕일지라도 죽을 때는 혼자이고, 누구도 그것을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그 처절한 고독의 순간이 어머니뿐만 아니고, 곧 우리에게도 다가온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우리를 고독하게 만드는 것은 아닌지···

지금까지 한정된 지면 때문에, 차옥혜 시인의 일곱번째 시집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중에서 제 2부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세상에는 어머니가 있는 사람과 어머니가 있었던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다. 이 시집은 어머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어쩌면 싱거울 수도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방금 돌아가셨거나 혹은 돌아가신지 얼마 안 된 사람들에게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시집이다.

 

<문학과 창작 2006년 겨울호 270-273쪽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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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 긍정의 사상, 생명 사랑의 시편

  이승하(시인중앙대 교수)

 

시를 효용가치를 가지고 따진다면 무용에 가까운 것이리라. 끼니를 한 번만 걸러도 우리의 두뇌는 음식 생각으로 가득 차며, 하룻밤만 못 자도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하지만 시를 읽지 않더라도 생활을 해나가는 데 당장에는 아무런 불편을 못 느낀다. 더군다나 컴퓨터와 휴대폰이란 기기가 우리들의 생활 한복판으로 들어온 이래 우리는 영상의 마력에 넋을 잃고 있다. 세대가 아래로 내려갈수록 책 속의 활자보다 동영상이 더욱 친숙해져 있다. 따라서 영화와 텔레비전의 위력도 컴퓨터와 휴대폰에 못지 않다. 하지만 시가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자. 시가 없다는 것은 우리 모두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뜻이고, 상상력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맛을 내는 데 필요한 소금 없이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는 뜻과 다를 바 없다.

소금은 맛을 내는 데, 부패를 막는 데, 또 인간의 생리 조절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시란 영상매체가 호화찬란한 빛을 뿌리는 이 시대에 저 서해 바닷가 인적 없는 염전에서 햇볕에 몸을 태우고 있는 소금 같은 것이 아닐까. 가뭄 때의 논바닥을 방불케 하는 현대인의 영혼에 필요한 것은 언어의 감칠맛을 전해주는 소금, 영혼의 방부제 역할을 하는 소금, 인간의 몸에 반드시 있어야 하는 염분 같은 시일 것이다. 인간 영혼의 정화(精華)라고 할 수 있는 시라는 것. 이것을 정직하고 성실하게 지켜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이 세상이 아직 완전히 부패하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말해 차옥혜 시인과는 일면식도 없었다. 지금껏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시인의 목소리를 전화기를 통해서 듣고 해설자는, 예전에 받은 시인의 여섯 번째 시집의 제목을 떠올렸다. 2000년 민음사에서 나온 시집 󰡔아름다운 독󰡕이 맞을 것이다. 6년 세월의 고뇌와 좌절, 환희와 보람의 시간을 시인과 함께 했을 시를 읽어보기로 했다. 시집의 앞머리에 놓여 있으며 표제작이 된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부터 읽어보았다.

 

향나무 웃자란 가지를 치는데

순식간에 벌이 장갑 낀 손가락을 쏜다

손가락이 쿡쿡 쑤시고

손등이 부어오르고 팔뚝까지 얼얼해진다

그러나 벌집이 숨어 있는 위험한 향나무를

나는 버릴 수 없다 떠날 수 없다

독이 오른 아픈 손으로

나는 다시 전지를 한다

―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1

 

향나무가 위험한 이유는 벌집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장갑까지 끼고서 일하고 있는 화자의 손가락을 벌이 와서 쏜다. 손등이 부어오르고 팔뚝까지 얼얼해지지만 화자는 독 오른 아픈 손으로 다시 전지를 한다. 향나무에 대한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화자는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 내 한 몸이 큰 고통을 겪고 위험이 따르더라도 향나무를 지키는 정원사의 마음을 차옥혜 시인은 갖고 싶었던 것이리라.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힌 그

불바다에 뛰어든 그

전차에 치일 뻔한 아이를 구하고

두 다리를 잃어버린 역무원

 

사랑한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구나

목숨을 거는 것이구나

사랑 있어

캄캄한 세상도 희망이 되는구나

― 「위험한 향나무를 버릴 수 없다2, 3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엉뚱하게 죽음을 초래할 수 있고, 두 다리를 잃게 할 수도 있다. 사랑이 있기에 캄캄한 세상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지만, 사랑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걸 만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끈화끈 쑤시는 손끝의 아픔을 참으며 전지작업을 한 결과 향나무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 시의 주제는 이타적인 사랑, 혹은 자기 희생적인 사랑의 결과가 가져온 눈물겨운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어려운 처지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긍정의 사상을 설파하려는 시인의 의지의 산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198090년대의 많은 여성 시인이 다룬 세계는 여성성에 훼손에 대한 강력한 비판의 장이었다. 수백 년 가부장제 사회가 구축한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분노가 시편마다 팽팽하게 느껴졌다. 반항의 의지가 너무나 뚜렷했기에 시에 폭력이 난무하였고, 시인 스스로는 자학을 일삼았고, 성적 담론이 아주 거칠게 행해졌다. 그런데 차옥혜의 시는 정반대이다. 포용과 사랑, 수용과 긍정, 교감과 화합……. 궁극적으로는 모성적 감싸안음이 이뤄지는 따뜻한 세계라고 할 수 있겠다. 

 

얼마나 고달프냐 아프냐 무서우냐

용서해다오

 

내 눈물로 너를 적셔주마

 

노래도 분노도 놓아버린 너

믿음 그리고 꿈이라는 말 잃어버린 너

사랑과 평화와 희망이라는 말

속삭일 때까지

너를 안아주마

― 「사막에게24

 

사막을 노래한 시인이 무척 많았는데, 그 많은 시인에게 사막이란 부재와 상실의 이미지로 존재하였다. 하지만 차옥혜 시인은 사막을 내 눈물로 적셔주고 싶어한다. 물론 눈물은 떨어지자마자 증발해버릴 것이다. 하지만 믿음이라는 말을 잃어버린 사막이 사랑평화희망이라는 말을 속삭일 때까지 화자는 사막을 안아줄 결심을 한다. ‘안아준다는 것은 모성의 발현이다. 연인간에는 서로를 안지만, 어머니는 자식을 안아준다’. ‘피에타를 제목으로 한 2편의 시에서도 시인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는 피에타상을 시적 언어로 묘사하면서 포용과 사랑, 수용과 긍정, 교감과 화합의 세계를 꿈꿔본다 

 

고통을 거치지 않은

평화는 없을까

 

죽음을 통과하지 않은

영생은 없을까

 

어둠을 찢고 나오지 않은

빛은 없을까

 

어머니의 눈물 먹어야

피가 도는 지구여

― 「피에타 1전문

 

 

어머니의 아픔이 세상의 아픔을 싸매고

세상의 길들이 어머니의 가슴에서 떠나고

세상의 길들이 어머니의 가슴으로 돌아오고

― 「피에타 2전문

 

모성애희생정신과 뜻이 거의 같다. 어머니는 자식에게서 그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다. 온갖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자식한테 한없이 베풀고 자식을 하염없이 기다린다.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가져와 시인이 그리고자 한 피에타 1의 세계는 평화, 영생, , 그리고 생명의 세계이다. 부정과 불화가 아니라 절대적인 긍정의 세계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당연히, 긍정적인 이미지를 지닌다. 

 

폭력과 절망과 공포와 죽음을

사랑과 꿈과 희망과 평화와 안식과

생명으로 바꾸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 「오아시스3 

 

모래벌판을 가다 가다 기진맥진하여, 목숨이 경각에 다다랐을 때 나타나는 오아시스는 사막을 구원하고 있는 당신이다. 이 정도의 상상은 보통사람도 할 수가 있겠지만, 백로에 대한 형상화는 시인의 긍정적인, 혹은 낙관적인 세계관이 잘 드러나 있어 주목을 요한다 

 

대부분 뭍짐승들은 곤충들은

숲 안 동굴에서 덤불에서 땅속에서 나뭇잎 뒤에서

제 몸을 숨기며 사는데

백로는 숲 위에 꼿꼿이 앉아

언제 날아올지 모르는 포수의 총알이나

매 발톱이나 독수리의 날카로운 부리도

아랑곳없이 제 존재를 환히 드러내고

여름 한낮 따가운 햇살을 받아치며

세상에서 가장 넓고 높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 「백로, 제 몸을 깃발로 내걸고2 

 

몸짓이 느린 백로는 어느 때 운 사납게 포수의 총알을 맞을지도 모르고, 매나 독수리의 먹이가 될지도 모른다. 위험한 상황에 노출되어 있는 백로임에도 그 몸짓이 그렇게 유유자적할 수가 없다. 백로는 여름 한낮 따가운 햇살을 받아치며세상에서 가장 넓고 높은 평화를 누리고 있다”. 시인은 백로를 통해 평화의 진정한 의미를 읽어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느니 지금 이 자리에서 평화를 맘껏 누리는 백로의 자태가 시인은 거룩하게 보이는 것이다. 백로가 현실 긍정의 대표적인 존재로 비쳤기 때문이리라.

이번 시집의 가장 감동적인 시편은 제2부에 실려 있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일련의 작품이 아닐까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 사후에 자식들의 봉양을 한사코 물리치고서 혼자 사신 것 같다. 어머니는 퇴행성관절염에 의한 통증으로 잠을 못 이루었고, 지독한 외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의연히 이 모든 것을 수용하고 견디며 여든여덟 목숨을 사위고 갔다. 

 

자식들 찾아오면

바쁜데 뭐 하러 왔느냐 어서 가라 어서 가라

내 친구 텔레비전 있쟎느냐

새들은 한 번 떠난 어미의 둥지를 다시 찾지 않는다

끝내 속내 감추고 자식들 편하게 해주려 애쓰던 어머니

― 「외로운 방2연에서 

 

앞서 인용했던 2편의 피에타에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아들의 시신을 껴안고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 어머니의 비통한 마음이 담겨 있다. 이 작품은 그와 반대로, 임종을 앞두고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어머니의 애잔한 마음이 담겨 있다 

 

작은아들아

하는 일마다 잘 안 되어 고생하는

외톨이인 너를 내가 더 돌봐주어야 하는데

아무리 기운을 챙기려 해도 안 되는구나.

목사님과 네 형제들에게 너를 부탁했다.

그래도 자꾸만 네가 걸려 어쩔거나.

너는 언제나 내 들국화다.

― 「어머니의 마지막 말씀부분

 

잘 된 다른 자식보다 일이 잘 안 풀려 고초를 겪는 작은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가서 안쓰러워하는 것이 모성이다. 한마디로 말해 어머니의 참사랑인데, 이는 불가에서 말하는 측은지심이나 자비심과도 통하는 것이다. “너는 언제나 내 들국화다.”란 어머니의 말씀이 가슴을 친다. 이렇게 유언을 하신 어머니가 이윽고 고통에서 해방되는 날이 온다. 시인은 세상아비정한 나에게 돌을 던져라.” 하고 외친다. 어머니가 중환자실에서 생과 사의 갈림길에 있을 때 시인은 밥을 먹으러 병실을 나갔었고, 눈을 붙이러 또 어디로 갔었는데, 그것이 못내 한스러워 이렇게 부르짖는 것이다.

시집의 제3부에는 북한을 포함한 국토 곳곳을 다녀보고 쓴 일종의 기행시가 많이 실려 있다. 4부에는 해외 여행의 여적으로 볼 수 있는 시편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들 작품 가운데 인상깊게 읽은 시가 있다. 백두산 천지에서 잡은 그 손이 따뜻하다는 북한을 통해 백두산 탐승에 나선 시인이 천지연 앞에서 자갈에 미끄러져 나뒹굴었던 일을 떠올리며 쓴 시다. 허구가 아니라 사실일 터인데, 인민군 복장을 한 청년이 넘어져 있는 시인에게 손을 내밀었던가 보다 

 

치료를 받으시겠습니까?

부드러운 말씨 걱정스런 눈으로 묻는다.

나는 거절하고 부끄러워 얼른 일어나려 하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별수 없이 그에게 손을 내미니

내 손을 잡아끌어 일으켜준다.

처음 잡아본 북한 사람의 손!

따뜻하다!

― 「백두산 천지에서 잡은 그 손이 따뜻하다부분

 

이 시에 시선이 오래 머문 이유는 북한 군인의 손을 따뜻하게 느낀 시인의 바로 그 따뜻한 마음 때문이다. 차옥혜 시인은 현실을 비판하거나 뜯어고치려고 하지 않는다. 시인인들 이 세계에 대해 왜 절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하지만 절망과 부정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일단은 주어진 현실이나 어떤 현상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시인의 따뜻한 마음이 감지되었기에 이 시는 시인의 현실 긍정의 사상이 잘 나타난 시편으로 꼽을 수 있다. 통일이나 분단 극복 같은 거대담론에 의지하지 않고 그저 북한 군인의 따뜻한 손을 따뜻하게 느꼈다고 말하고 있기에 이 시는 뻔한 통일론보다 훨씬 실감이 나고 또한 감동적이다.

파라과이 밀림 인디오 마을에서 아기를 허리에 낀 여인이 나무토막을 칼로 깎아 앵무새를 조각하고 있다. 작은 것은 1달러, 큰 것은 5달러이므로 여인의 가난은 군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시인은 이 여인을 부정적으로 인식하여 혀를 차거나 외면하지 않는다. 여인의 자연 친화적인 노동의 의미를 찬양하고 가난한 살림살이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그녀의 공해 없는 노동으로

지구는 더 맑고 깨끗한 물과 공기를 가지니

두어 평짜리 움막 흙바닥에 맨발로 사는

그녀의 가난에

세계는 빚지고 있다.

― 「그녀의 가난에 세계는 빚지고끝 부분 

 

미당은 가난이야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차옥혜 시인은 그녀의 가난에세계가 빚지고 있다.”고 한다. 여인의 힘겨운 노동과, 그 노동에도 불구하고 평생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할 여인의 박복한 운명을 시인은 이 한 편의 시로 따뜻하게 위로하고 있다. 시인의 이런 마음은 늙음도 신의 선물”(늙음도 아름다움이다)로 여기고, 버려진 구두에 대해서도 가는 데마다 나와 함께 하고나를 아끼고 나를 자랑했다.”(버려진 구두)고 여기게끔 한다. 시인의 세계 긍정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는 또 한 편의 시가 광화문의 갈릴레이. 

 

어둠이 빛을 삼켜도

내일이면

빛은 어둠까지 끌고

다시 빛이 되느니.

―「광화문의 갈릴레이후반 연

 

이 시를 읽으니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느니 호랑이에게 물려 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느니 하는 속담이 생각난다. 밤이 아무리 길어도 아침은 반드시 온다. 어둠의 힘이 아무리 세지만 빛의 힘을 감당할 수 없다. 세상을 밝게 보려 하니, 세상이 밝아지는 것이다. 이밖에 해설자가 주목한 작품은 어머니를 시인에 빗대어 노래한 시와 시인 스스로 시인에 대해 정의를 내린 시다. 아마도 이번 시집의 주제가 잘 집약되어 있는 2편의 시가 아닌가 한다. 

 

나는 글씨로 시를 쓰느라

사랑을 잃고 삶을 허물었는데

어머니는 몸으로 시를 쓰며

사랑을 이루고 삶을 세우셨네

 

시인인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어머니의 시

내 생애 가장 감동스런 어머니의 시

평생 읽어도 다 못 읽을 어머니의 시

천지 사방에 박혀 있는 어머니의 시

 

우리 어머니는

세상에 몸으로 시를 쓴 시인이네

― 「우리 어머니는 시인후반부 

 

갖은 고초를 다 겪으며, 자식을 위해 오로지 희생으로만 일관해오신 어머니의 생애. 그 어머니는 몸으로 시를 썼고, 사랑을 이루었고, 삶을 세웠다. 어머니의 몸이 곧 시인데, 그만큼 시는 차옥혜 시인이 생각하기에 고결하고 성스러운 것인가 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머니가 하시는 바로 그 일이다. 이 세상에다 몸으로 시를 쓰는 일!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버무리어

생명우주를 빚는다.

현실과 꿈을 버무리어

풀들에 나무들에 시가 주렁주렁 열리는

냇물에 바다에 시가 떼지어 헤엄치는

평화로운 생명마을을 세운다.

사랑과 열정의 넋으로

아늑하고 자유로운 생명집을 짓는다

―「시인마지막 연 

 

이 부분은 차옥혜 시인의 시관이며 시인관이다. 그와 동시에 생명관이며 세계관이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버무리어 생명우주를 빚는다고 함은 시인의 무한한 창조성을 가리킨다. (현실과 꿈을 버무리어) 냇물에 바다에 시가 떼지어 헤엄치는 평화로운 생명마을을 세운다고 함은 시인의 광활한 상상력을 가리킨다. 사랑과 열정의 넋으로 아늑하고 자유로운 생명집을 짓는다고 함은 시인의 영원한 생명력을 가리킨다. 오염된 세상을 정화시키는 시인의 꿈과 말초적인 감각을 순화시키는 시인의 힘에 대한 무한한 신뢰가 낳은 시가 시인이다. 바로 이런 시인이 되고 싶어 이 시를 시집의 제일 말미에 올린 것이리라.

지금까지 해설자의 마음에 와 닿은 시편을 중심으로 차옥혜 시인이 내는 일곱 번째 시집의 의의를 논해보았다. 성에 안 차는 시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한 권 시집 안에 옥만 있을 수는 없다. 긴장감이 떨어지는 몇 편의 시가 오히려 앞날의 시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오늘 나의 시가 많이 부족함을 알기에 또다시 펜을 꺼내드는 성실성은 시인의 생래적인 성품인 듯한 현실 긍정의 사상과 통하는 것일 터이니.

 

 

Posted by 차옥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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