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시 -1 2006. 4. 22. 11:17

   

 서시

                                                                   차옥혜

 

바람이 부네

밟혀 일어서지 못하는 풀들

일으키려

바람이 부네

두더지가 갉아먹은 뿌리

그 상처 어루만져

잔뿌리 키워주려

바람이 부네

가뭄에 목 타는 잎새

싱싱한 푸른 잎으로

다시 살라고

바람이 부네

이 벌판 가녀린 풀잎으로

흔들리는 것이 서러워

흐느끼는 풀에게

네가 바로 하늘이다

너의 흐느낌은

어둠을 쫓는 노래이고

너의 흔들림은 빛을 몰아오는 춤이다

라고 속삭이며

바람이 부네

어제 죽고 오늘 죽은 풀들

내일 다시 태어나고

눈보라에 떠난 풀들

봄날에 다시 돌아오는

보라

너희는 죽지 않는 생명

영원히 이 벌판을 지키리니

나 바람이 너 풀이고

너 풀이

나 바람이다

는 것 보여주려

바람이 부네

풀벌레와

두더지도

이빨을 잠재우고

한 점 바람으로

풀잎과 함께

바람길로 오라고

바람이 부네

하늘을 열고 열어

눈부신 새 빛을

풀들의 가슴에 안기려고

바람이 부네

바람이 부네

 

<서사시 바람 바람꽃』 1987>

 


'시 -1 '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흙사람 1  (0) 2006.05.05
고목 -편지 1  (0) 2006.05.05
갱도를 달리는 열차  (0) 2006.05.01
뼈에 구멍이 숭숭 뚫려  (0) 2006.04.25
연필  (0) 2006.04.23
Posted by 차옥혜
,

 

     시의 구조와 표현의 단면

  이향아(호남대 명예교수시인)

 

 

내가 길을 떠나는 것은

장미나 백합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소낙비에 목숨을 대고

타는 목마름 견디고 견디느라 가시 돋은 몸에

눈부시고 아름답게 핀

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것이다

강이나 바다나 계곡을 낀 마을이나 도시에도

드문드문 사막은 있어

선인장 꽃 만나면

고개 숙여 절하고

숨죽여 우러르며

비는 왜 제멋대로만 오는가

물은 왜 흐르는 데만 흐르는가

묻고 묻다가 해가져

선인장 꽃 타는 눈동자만 안고

귀가하지만

내일도 모래도 나는

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순례자이리라

-차옥혜 선인장 꽃을 순례하다 

 

지금까지 필자가 읽어온 차옥혜의 시는 언제나 휴머니즘을 저변에 깔고 있었다. 지난 호에 게재된 세 편의 시 가을 고목의 눈물」 「선인장 꽃을 순례하다」 「떠돌이 별의 공통점 역시 휴머니즘이다. 그러나 휴머니즘이란 입으로만 말하고 지나갈 만큼 가벼운 것이 아니다. 그 것은 사랑이란 말의 다른 표현이며 감사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그리고 봉사와 실천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위의 시에서 우리는 시인의 삶의 주제, 삶의 목적을 어렵지 않게 엿볼 수 있다. ‘내가 길을 떠나는 것은/ 장미나 백합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선인장 꽃을 순례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비장하게 선포한다. 선인장 꽃은 사막의 모래밭에 피지만, ‘강이나 바다나 계곡을 낀 마을이나 도시에도/ 드문드문 사막은 있어선인장 꽃을 만나면 반갑게 절하고 숨죽여 우러르면서 선인장 꽃이 겪는 삶의 아픔, 그 곤고함의 궁핍함을 시인이 마냥 죄스러워한다.

비는 왜 제멋대로만 오는가/ 물은 왜 흐르는 데만 흐르는가/ 묻고 묻다가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한 세상을 개탄하는 시인, 그러다가 해가 지듯 귀가하는 시인의 정신세계. 그는 내일도 모래도 선인장 꽃을 찾아 순례할 것임을 공고하게 발표한다.

이러한 주제의 시는 떠돌이 별에서 더욱 표면화한다. ‘떠돌이 별로 은유한 시의 제재는 시인의 온정과 염려의 대상인 노숙자나 무주택자를 포함하는 빈자가 될 것이다. 누가 그걸 원했겠느냐. 누가 붙박아 살고 싶은 희망을 품지 않았겠느냐. 불가피한 상황이 떠돌이별을 정처 없이 흐르게 하고 춥고 배고프게 하고 주눅이 들게 하였을 것이라고, 시인은 변호한다. 그리고 밤하늘로 표현된 어둡고 추운 세상, 떠돌이 별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깊고 너무 넓으며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세상을 안타까워한다.

시인의 마음은 긍휼로 가득 차 있으며 그 사랑과 긍휼은 가을 고목의 눈물에서 감사로 연결된다.

 

<창조문예 20092월호 239-240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

    식물이 되어 길을 찾다

이보숙(시인)

 

2009년 차옥혜시집 허공에서 싹트다의 리뷰를 쓴 것이 어제 일 같은데 그새 시인은 아홉 번째 시집을 또다시 상재했다. 참으로 부지런한 시인이다.

차옥혜 시인은 1945년 전주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영문과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한국문학신인상으로 등단 후 7권의 서정시집과 1권의 서사시집, 1권의 시선집을 출간한바 있고 <경희문학상>을 수상했다.

20여 년 전 시인은 콘크리트 벽 속에 갇혀 사는 것보다 흙냄새를 맡으며 사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풀과 냇물과 나무가 있는 곳을 찾아 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과 인간이 대등한 관계로 살 수 있는 곳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유기농법으로 나무와 화초와 야채를 기르느라 육체가 삭아 들어가는 각고의 세월을 보내는 중에 삽자루와 호미를 던져버리고 그 곳을 떠나고 싶은 갈등을 수없이 겪은듯하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뿌리고 심은 식물들이 푸릇푸릇 싹이 돋아나고 꽃이 피고 열매 맺는 것을 보며 감격과 환희를 느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버렸다. 처음엔 식물의 주인 행세를 하였으나 차츰 그들의 어머니 형제 또는 자식이 되는 것을 느끼며 식물의 마음을 지니게 되면서 식물자체가 되어버렸다고 시인은 서문에 쓰고 있다.

그러다 어느 날 시인은 문득 식물은 신이 인간에게 읽히고 싶어 흙에 쓴 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밭과 정원은 시인이 식물글자로 세상을 향해 생명과 평화와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시를 쓴 황토밭 원고지가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된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 아닐 수 없다. 

 

황토밭 원고지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

온 몸으로 껴안고 사랑하며

땀 흘려야 쓸 수 있지만

쓰고 난 후에도 보살피지 않으면

제멋대로거나 사라지지만

날마다 새로운 파노라마 초록시이다

언제나 설레고 아름답고 편안한

숨 쉬는 생명시이다

옷은 황톳물과 풀물로 얼룩지고

호미 들고 동동거려 팔다리가 쑤셔

볼품없이 늙고 여위어도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것이 즐겁다

 

어느 날 들판이 문득 나를 불러

땅에 식물 글자로 시를 쓴 지 어언 20

출판할 수 없는 시집 한 권

지금 내 몸과 영혼의 집이 어여쁘다

-식물 글자로 시를 쓴다전문

 

시인은 밭과 들에서 식물을 재배하면서 자연스레 시를 쓰게 되고 들녘에서 들려오는 평화의 소리를 듣는다. 도시에서 맛볼 수 없는 평안을 느끼며 우주를 안은 듯한 희열에 잠긴다.

가을걷이 끝난 들판을 바라본 시인은 봄부터 여름을 거쳐 가을에 추수하는 식물들을 임신한 여인이 10 달 만에 귀한 아이를 얻는 산모에 비유하고 있다. 당당한 승리자가 되어 영생과 안식의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에 비유하고 있다. 실제로 두 아들을 낳아 훌륭히 키워놓은 시인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다. 기독교를 믿고 있는 시인의 종교철학이 배어있는 시를 읽어보자. 이 시를 읽고 있으면 멀리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의 합창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가을걷이 끝난 들녘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들린다

 

누렇게 마른

콩대, 깻대, 도라지 꽃대, 더덕 줄기, 토란대

호박 줄기, 고춧대, 참취, 벌개미취, 해바라기, 볏짚

새 생명을 낳은 산모들이

영원으로 대지로 우주로 귀향하며

기쁨에 넘쳐 부르는 노래 노래

마음과 영혼으로 듣는

소리 없는 합창

 

한여름 힘겨운 임신과

몸서리치는 산고는 옛 이야기

가벼워진 몸으로 당당한 승리자의 눈빛으로

영생과 안식의 집으로 돌아가는

세상과 세상을 이어준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들의 소리 없는 노래

 

가을 벌판에 서면

마른 껍질들의 합창 소리 듣는다

-마른 껍질들의 합창전문

 

시인은 또한 식물에서 인생을 읽어내고 있는 것을 본다. 삶의 고뇌와 번뇌를 겪어내지 않고는 인생을 이해할 수 없고 삶의 강물을 건널 수 없는 것이다. 맨몸으로 눈보라를 견디고 가물에 목말라본 나무는 모든 시련을 이겨낸 사람 또는 시인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 밤하늘의 별을 보고 아픈 가슴을 훑어내며, 흘러가는 구름을 보고 서러움을 토해내는 시인만이 아름다운 훈장을 받을 것이라고 시인은 말하고 싶은 것이다. 

 

일 년에 200일 이상 비가 와

일 년 내내

몸이 자라고 나뭇잎이 노래하는

적도 부근에 사는 나무들은

나이테가 없다

 

나이테는

백팔번뇌를 겪은 나무에게

맨몸으로 눈보라를 견디고

가물에 목발라본 나무에게

밤하늘의 별이 얼마나 아픈 것인가를

아는 나무에게

하늘이 주는 훈장이다

 

내 몸에서

나이테를 찾아보는 가을 날

자꾸만 눈이 시리다

-나이테전문

 

시인은 애쓰고 힘써서 일하면 신은 열 배 백 배 보상해 준다는 신앙을 갖고 있다. 그녀는 시에서 신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시의 여백에 그런 철학이 담겨 있음을 인지할 수 있다. 시인은 식물에 대한 사랑을 어찌할 수 없어 식물 속에 들어가 살고 있으면서 그들이 보여주는 진실함에 기뻐하고 우주의 비밀을 알 수 있는 편지까지 그들에게서 받는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인의 세계에 필자도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풀과 나무만 보면 설레고 좋아

씨를 뿌리고 나무를 심어대니

, 다람쥐, 여치, 매미가 와서 살고

꽃은 나비와 벌을 데리고 줄지어 찾아와

저절로 한 세상이 열렸다

나무나라 지키려 하루에 땀 한 말 쏟으니

평화는 서 말로 오고 사랑은 다섯 말로 솟아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다움뿐이다

나무와 풀이 나를 어머니 어머니 부르며

제 몸에 벌레를 잡아 달라 하고

웃자란 머리칼을 예쁘게 깎아 달라 한다

나무와 풀은 저희들을 돌보느라

애면글면 일하는 내가 안쓰러워

어머니 드세요 하며

싱싱한 열매와 잎을 듬뿍 내밀고

나에게 우주의 비밀이 담긴 편지를 쓴다

-나는 전생에 나무였나 봐전문

 

시인은 동식물에 대한 사랑 이상으로 인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아프리카 어린이나 여인에 대한 연민으로 눈물 흘리는 모습이 역력하다. 시인은 보금자리 잃고 우는 짐승의 모습에서 아메리카 신대륙 원주민들의 애환을 떠올리고 슬퍼하며 달동네 철거민의 울부짖음을 듣는다.

차옥혜시인은 시집에서 식물 글자로 시를 쓰는 모습 외에도 병들어가는 지구의 문제, 남성과 대등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여성의 문제, 그늘에서 찌들어가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문제 등 많은 것을 제기하고 있다. 사실 그런 것들은 차시인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쉬운 필체로 어려운 문제들을 열심히 웨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모두 함께 고민 해볼 일이라 생각 된다. 차옥혜 시인이 더 아름답고 강인한 시집을 곧 또 보여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열심히 식물을 재배하며 추수의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시인이 더욱 건강키를 기원한다.

 

<문학과 창작 2010년 여름호, 262267쪽 수록>

Posted by 차옥혜
,